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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21화 (21/226)

<-- 3. 젊은 여공작과 첩 -->

***

그녀가 늘어놓는 사과에 대해서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 어이없는 이유 중에서 유렌의 표정을 변화시킨 것은, 마지막 내용이었다.

그녀가 내가 하프엘프라는 걸 몰랐다는 사실은 그녀의 행동으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나에 대해 시종에게 알아오라고 명령했던 걸로 보아 이제는 그녀가 나에 대한 소문과 과거를 거의 전부 알게 되었다는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 자신의 잘못일리가 없잖은가.

사실은 그녀가 나 자신에게 조금의 호감정도는 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유렌은 전적으로 자신의 외모에 흥미를 가진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된 그녀는 이제부터 나에게 폭언을 퍼붓고 경멸하겠지.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던 그는 딱 10분간만 욕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세이시아가 선택한 것은 그에 대한 비난이 아니고 사과였다.

이런 상황은 생전 처음 당해보는 것이라 그는 내심 굉장히 당황했다. 유렌의 과거와 출신에 대해 누구나가 경멸을 표한 것은 아니었다. 평민들 중에서는 그의 상황에 어느정도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를 동정하는 척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직접적으로 유렌의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하는 말만은 내 머릿속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진심으로 들리는 걸까. 가장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인데도. 어째서 당신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들만 해주는 거지.

"나는 이 세상에 겨우 몇개월 전에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라서, 상식에 대한 것은 잘 몰라."

그녀는 어렵사리 자신의 과거에 대해 꺼냈다. 세이시아 시렌느가 몇 개월 전 사고로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것은 우연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별 문제는 없어 보여 신경쓰지 않았던 점이다.

"너랑 정략결혼을 하게 된 것도, 한달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일이었어. ……하지만, 몰랐다고는 해도 그래도 너랑 결혼하게 된 것은 나니까, 나는 내 남편인 너를 책임져야하는 의무가 있는거야. 그렇지?"

'첩'이라는 말 대신 그녀는 남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차이에 대해 지적하는 것보다, 유렌은 그녀가 자신을 상처주지 않기 위해 말을 골라 사용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쓸데없는 배려였다. 이미 어떤 말에건 익숙해져 있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써준다는 것은.

"어제 알게 되었단말야. 네가 혼혈이라는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아버지가 없다는 것도."

"……아버지는 있습니다만."

어이없다는 듯한 유렌의 말에, 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버지가 아니잖아."

"……."

시아는 조심스레 유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어딘가에 상처가 났는지 살피려는 듯 그 시선은 조심스럽고도 부드러웠다. 유렌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어딜 보고 있는겁니까."

"보면 안 돼?"

자신이,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아는겁니까? 그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크고 투명한 눈망울에 가득 담겨드는 자신의 연록색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따뜻하고 가득찬 느낌이었다.

유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들릴 듯 말 듯 힘이 빠진 목소리였지만, 시아는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나 따위는 태어나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었더라면 좀 더 일찍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었고, 내게서 죽임당한 인간들은 내가 아니었다면 그 나름의 생을 끝까지 살 수 있었을테지요. 그리고 나는 나를 반쪽짜리로 태어나게 해서 더러운 삶을 살게 한 그 자를 증오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말 한 마디로 내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회한에 가득찬 말이었지만 유렌의 어조는 언제나의 평이하고 침착한 말투로 되돌아가 있었다.

"……."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이유는, 오직 그 인간에게 내 손으로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확실히,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당신이 나의 계획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령사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 쪽의 전력이 한 가지 새어나가게 되는 셈이니까요."

무슨 의도인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유렌의 말에 시아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할거야. 네가 원한다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게. 사실 내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남들에게는 비밀이니까, 서로 약점을 잡고 있는걸로 쳐도 좋아."

응응 하면서 세이시아는 유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나는 네가 태어나서는 안될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까지는 그랬다고 해도, 지금부터는 내가 너를 좋아해 주면 되잖아? 내가 널 필요로 해 주면, 이제 죽을 생각같은건 안 해줄수 있어?"

그렇게, 다정하고 달콤하기까지 한 시아의 말에 유렌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아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던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정말 생기가 넘치는 그의 표정은 너무 예뻤다.

"그런 말을 한 것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미친 것 아닙니까?"

"안 미쳤어. 그러니까 말해, 죽지 않겠다고."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정신이 멀쩡함을 증명했다. 유렌은 다시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건 장담 못하겠군요."

"어째서야?"

유렌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다. 그를 지금껏 구차하게나마 인간들 틈에 섞여 살게 한 것은 단지 복수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그 복수를 하고 나서는, 혹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목숨을 쉬이 던져버릴 수 있었다. 그저 분풀이를 위해 검을 휘둘렀고, 조금이라도 복수에 도움이 될까 해서 마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얻게 된 힘에 눈꼽만큼의 애정도 없었다. 검에 나태해지면 실력이 둔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근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고, 마법의 발전도 없었다.

필요하다면 극단적으로 잠을 줄였을 때도 있고, 아무것도 안 먹고 며칠을 버틴 적도 있었다. 이대로 죽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토록이나 의미없는 생이었는데.

당신이 그 안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건가. 유렌은 마치 자신에게 세뇌하듯 대답했다.

"당신은, 절대로 내 삶의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미를 준다 해도 내가 허락치 않을 것이다. 그저, 이대로라면 충분한 삶이다.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복수의 잔여물일 뿐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마십시오."

이 이상 오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그가 말한다. 하지만 시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너를 살게 해주고 싶고, 필요하다면 네 생명에 의미를 주고 싶어."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유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시아는 유렌의 목에 팔을 감고 강하게 껴안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조금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까 할 정도로 세게 끌어당겼다.

"누가 이렇게 널 안아준 적 있어?"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여자에게 안긴 적은 있지만 이렇게 다정하고 또 따뜻한 느낌이 드는 포옹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는 깨닫고 말았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해준 적은 있어?"

팔의 조이는 힘이 조금 느슨해졌나 싶더니, 시아는 자신의 얼굴을 아래로 내려 유렌의 입술에 키스했다. 처음이라 조금 서투르지만 부드럽고 상냥하게 맞닿은 입술을 사랑스럽다는 듯 비벼댔다. 유렌은 당황했다. 물론 이런 키스도 처음이었다. 입맞춤 자체가 처음인 것은 아니지만, 여자를 흥분시키는 테크닉만을 알고 있는 유렌에게는 그녀처럼 애정어린, 그리고 서슴없는 키스는 처음으로 당해본 것이었다.

3초 남짓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예상치 못한 달콤함에 그는 저항하는 것조차 잊었다. 아니, 오히려 저항은커녕 조금 더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밀어냈다.

"……무슨 짓입니까."

"왜, 왜 그래?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차가운 유렌의 말에 시아는 당황했다. 혹시 막 키스해서 화났나? 그저 애정어린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무례했던걸까.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유렌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축객령을 내렸다.

"이미 30분 지났습니다. 돌아가세요."

"뭐?! 아직 15분밖에……."

"돌아가십시오."

단호한 유렌의 말에 시아는 오늘 한 말이 역효과였는지 생각하며 일단 등을 돌렸다. 너무 직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좀더 달콤하게 꼬드길 걸 그랬나? 하지만 곧장, 팔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

유렌이 엄청나게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서, 팔이 아픈데 내색도 못하고 시아는 왜 그러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그의 초조한듯한 태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앞에서 등 보이지 마세요!!"

"……??"

나, 나가라면서? 나보고 뒷걸음질 쳐서 나가란거야, 지금? 시아는 당황해서 유렌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있는 힘껏 잡았는지 팔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그녀의 눈물에 오히려 유렌이 더 당황해서, 그녀를 강하게 잡아당겨 방 한가운데 내팽개치듯이 떨쳐놓고 자기가 방문을 열고 나가며 소리쳤다.

"내가 나갈테니 당신은 나오지 마십시오!"

"……."

문이 쾅 닫혔다. 혼자 덩그러니 유렌의 방에 남아서, 시아는 한동안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시 한번 고민해야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이 터질 듯 아파오는 걸까, 어째서 심장이 타는 것처럼 뜨겁게 뛰는 걸까.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렌은 그대로 문 앞에 기대서 주륵 주저앉았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곳 복도는 이 시간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미리 아랫사람들에게 명령해 둔 탓이다.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이마가 뜨거웠다. 아니, 몸 전체가 열이 올라 있었다. 심장은 정말 죽기 직전인 사람처럼 궤도를 벗어나 빠르게 뛰어대고 있었고, 신체의 모든 기관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돌아서서 자신에게서 멀어질 때, 어째서 그렇게 숨이 멎을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거였을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유렌은 그대로 문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한숨과 함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셔츠 소매의 금속 단추가 미간에 닿아 차가웠다.

"……후."

아찔해질 만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일 순 없었다. 절대로.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저항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오지 않을 걸 그랬다.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 그 남자에게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다른 가문의 첩으로 들어오는 걸 선택했지만, 이래서는 곤란하다.

그는 자신이 아까 스스로에게 했던 말을, 다시 맹세하듯이 되뇌었다.

"당신은 결코, 내 삶의 의미가 되어서는 안 돼."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

응응 안돼.

유렌은 시아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설정인데 아무도 안알아주는군요ㅠ

넹, 이녀석은 전에도 말했듯이 어쩌면 남주 중에서 성격이 제일 나쁠걸요. 그런 나쁜남자가 한 여자에게만 착하게 군다는 설정 하악. 이거시 바로 개처럼 복종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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