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젊은 여공작과 첩 -->
그가 돌아가고 한참 후까지, 나는 차가 식어가는 것을 내버려두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랄까, 이제서야 깨달았지만 나는 첫만남에 그에게 굉장한 호감을 느낀 것 같다. 외모도 예뻤지만, 본능적인 친근감이랄까.
그러던 나는 문득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전에 들었던 정령들의 속삭임에서 '서쪽에서 온 사람'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 남자는 혹시 정령사일까? 정령인 나에게 이렇게까지 친숙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정령사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 남자 특유의 깨끗한 기운은 아젤에게서 느껴지는 연하고 맑은 기운보다 더 깊고 진하며 어딘가 모르게 근원적으로 달랐다.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당시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에게서 물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진 것 같기도 했다.
물의 정령을 소환하는 정령사구나.
응응, 그랬던 거였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좋은 기분을 느꼈던 거구나. 꽃은 바람과 친하고 땅에 기반하며 보호받고 물을 매우 좋아하니까.
나는 스스로 납득한 후에, 내일 그를 다시 만나러 가기 위해서 오늘은 나머지 잔업들을 마저 끝내놓기로 마음먹었다.
***
연한 분홍색 원피스에 오렌지빛의 가디건을 걸치고 네리아에게 미리 말해 머리를 곱게 묶어올린 후 그가 머무는 제 4관으로 향했다. 일이 끝나서 당분간 휴식을 가진다고 말해두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네리아에게도 갑자기 일이 늘어나서 피곤할테니 쉬라고 말해두니 굳이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첩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모두 눈치채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어제 예산배분을 고쳐놨으니 일단 내 보좌관이자 비서인 제인부터가 알아버렸을 것이다. 제 4관에 배분한 액수가 상당히 커졌다는 사실을. 게다가 시종도 조금 더 늘리고 유렌에게 4관의 관리를 전적으로 맡겼다. 자기가 사는 집이고, 그 안에서는 유렌이 제일 지위가 높으니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을 두고 한달이 지나서야 하니, 세리안은 내 행동의 의미를 대략 눈치챘다. 다짜고자 찾아와서는 '그 녀석이 꽤 마음에 들어? 하나 더 구해올까?'라고 묻는 것을 보고 알았다.
앞으로 내가 첩을 많이 예뻐할 것임을.
하지만 일에 지장을 줄 정도로는 아니고 그냥 일주일에 한두번씩 찾아가 친분을 쌓을 생각이다. 첫만남으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으니, 친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느새 제 4관에 이르렀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그는 도서관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해 볼까? 나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시종에게 내 방문을 알렸다. 하지만 그는 아주 멀쩡한 얼굴로 옷을 다 챙겨입고 느긋하게 걸어나와, 어제의 냉정한 모습과 달리 잠이 덜깬 부스스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내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얼레. 요거 보게. 어제 내가 돈도 더 주고 시종과 시녀들도 더 늘려줬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묻다니. 이런 도도한 남자같으니라고. 나는 가장 먼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 준비도 없이 받아들였던 어제와는 나도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거야!
"안녕, 잘 잤어?"
그리고 그 뒤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고민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너 물의 정령사지? 난 꽃의 정령왕이니 잘 지내보자'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일단 은근슬쩍 '오늘 물이 참 좋지?'하고 떠볼까? 일단 친해지는 게 나을까. 하지만 함께 목욕하자고는 할 수 없고, 나는 간단히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우리 같이 물이나 한잔 할까?"
"……."
그는 한참을 내 말의 의도를 생각하다가, 가만히 시종을 불렀다.
"차 한잔만 내와 주십시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졸지에 나는 내가 친히 방문했는데 차도 안 내온다고 비꼬는 말을 한 여자로 낙인찍혔다. 말 그대로 물만 마시자는 의미였는데. 나는 그 시종이 나가기 전에 붙잡아서 그게 아니라고 몇번을 외쳤다.
"아냐, 차 필요없어. 안 가져와도 돼!"
그는 차 마시기 싫으면 니 맘대로 하라는 듯이 날 내버려두었다. 나는 시종을 말리고, 다시 밖으로 돌려보냈다. ……온지 5분밖에 안 됐는데 갑자기 심하게 피곤해지는 이유는 뭐지. 무슨 애가 이렇게 대하기 어렵냐, 이건 뭐 귀여워해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잖아.
나는 일단 그와 호칭부터 트기로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생각해보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유렌, 그래, 유렌 위스피닌이었다. 세리안에게서 한달 전에 한번 들었고 어제 시종에게서 한번 더 들었으니 간신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공작의 아들이니 이름 뒤에 '경'을 붙이는 것 같지만 나는 친근하게 호칭 다 떼고 이름만 불렀다.
"저기, 유렌……이라고 불러도 되지? 내 이름은 세이시아 시렌느라고 해."
"네, 공작각하."
"이름 불러도 돼. 너는 마음에 드니까 특별히 시아라고 부르게 해 줄게."
"알겠습니다, 공작각하."
"……."
너 지금 시비거냐? 이름 알려줬는데도 끝까지 공작각하네. 게다가 진짜 아까부터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저 태도는 뭐야! 완전 난감하네. 하지만 같이 식사하다 보면 친해질 거야, 그래! 같이 아침 먹자고 해 보자.
"유렌은 아직 아침식사 안 했지?"
"아니오, 한 시간 전에 했습니다."
"……."
난 아직 안 먹었는데……. 시계를 확인하니 8시 10분. 나에게는 보통 기상시간이며 귀족들에게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는 훨씬 더 일찍 일어나나보다. 혹시 기사였을까? 기사는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난다던데.
단단해 보이는 근육을 보면 확실히 기사거나 적어도 기사 지망생이었던 걸로 보였다. 아침은 같이 못먹겠군. 몇몇 기사들은 근육을 유지하거나 더 늘리기 위해 식단을 조절한다고 하니 억지로 아침을 두번 먹일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밥을 안 먹어도 약간의 물과 햇볕으로 광합성을 하는 것으로 영양보충을 할수 있었으므로 나는 아침 대신에 그에게 산책을 신청했다.
"공작 각하께서 원하신다면."
하지만 입에서 유수처럼 흘러나오는 형식적인 어조에 비해 전혀 내키지 않는 표정이라 나는 순간 내가 그에게 폐가 되는 것 같아 주춤했다. 하지만 이왕 칼을 뽑은거 일단 뭔가를 베어봐야 할것 아닌가. 실례를 무릅쓰고 그를 끌고서 정원으로 나갔다.
***
일순 광합성에 너무 심취했나보다.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햇볕 아래에 태양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유렌은 나무그늘 옆의 벤치에 앉아 화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줍음이 많은 민들레가 유렌의 손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그의 근처에는 바람의 정령이 맴돌고 있다. 인간에게는 절대로 가까이 가지 않는 정령인데도 말이다.
나는 일순간 넋을 놓고 유렌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우수에 젖은, 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깊은 녹색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의 콧등 옆선은 날카롭게 쭉 뻗어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톤의 피부색이 섹시하면서도 야성적으로 보여서 그 눈과 맞닿은 순간 압도되는 것 같았다.
나는 살금살금 유렌의 옆으로 다가가보았다. 유렌의 손위에 있던 민들레 정령은 나를 발견하고는 방긋 웃어보였다. 그 때, 유렌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훔쳐보다 들킨 변태처럼 움찔해서 나는 괜히 변명했다.
"아, 아니……. 그 아이가 그렇게 사람을 잘 따른 적은 처음이라서. 나 이외에 누군가의 손 위로 올라가는 것도 처음 본거야."
결코 널 보고 있었다던가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민들레의 반응이 신기했을 뿐이라는 걸 강조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놀라서 크게 떠진 눈동자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봤다.
"……당신, 정령이 보이는 겁니까?"
"에, 아니 그게……. 랄까 유렌도 그게 보여?!"
지금까지 정령을 볼 수 있던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세리안과 아젤조차 내가 볼 수 있는 정령들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단순히 민들레의 꽃잎을 만지는 것인줄 알았는데, 자신의 손 위에 올라온 민들레 정령을 보고 있었다니!
"어째서 보이는거야?"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정말, 이 정령이 보인단 말이지요……."
유렌은 손등에 민들레를 얹은 채 미심쩍다는 듯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자 나는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왠지 심장이 두근거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너무 감각적으로 변해버리는 듯 했다.
그는 내 존재를 꺼리는 듯이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처음으로 서슴없이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붙은 후에, 그는 눈을 감았다.
나는 당황해서 그대로 서있었다. 눈 앞에 바로 보이는 백금빛의 고운 속눈썹과 살짝 다물고 있는 도톰한 입술이 여심을 격하게 뒤흔들었다. 이건, 키스해도 된다는 의미일까? 키, 키스할까? 말까? 첩의 행동에 이상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눈을 반짝 뜨고는 내게서 세 걸음 물러났다.
"……??"
"당신에게서 그다지 정령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정말로 보이십니까?"
뭐야. 정령의 기운을 느껴보려던 거였나……. 그는 미심쩍게 나를 바라보았다. 정령의 기운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불신에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장미 넝쿨로 손을 뻗었다. 옆의 장미꽃 정령이 곧장 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빙그레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자, 이거 봐. 여기 보이지?"
내가 정령을 손에 올려놓고 확인까지 시켜주자, 여전히 불신에 가득찬 눈이었지만, 유렌은 조금정도는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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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한편더입니다!!
덧글이 60개니 두편 더 내놓으라시는 의견이 많군여ㅋㅋ
오늘은 한편 더 곤란하고, 혹시나 이번편에도 덧글이 많으면 내일은 두편분량을 한꺼번에 올립니다!! 왜 하필 내일 두편분량이냐 하면 끊기가 애매해서 이건 정말 절단마공이 될거같은 기분이라 두편분량으로 붙여서 올려도 될거같아서요. 그러니까 덧글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