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젊은 여공작과 첩 -->
초여름에 들어서는 중이라 햇살이 뜨겁다.
서류 정리도 어제 다 해 놨고, 급한 결재를 아침에 다 처리해놨으니 이제 한 일주일간은 여유롭겠지. 어제는 밤을 거의 새다시피 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일어난 시간은 조금 늦었다. 네리아가 가져다 준 아침식사를 대충 하고 목욕을 한 후 간만에 여유로운 티 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맞는 상쾌한 아침이다. 거의 한달만인가? 즉위하고 자그마치 처음으로 가지게 된 여유였다. 대부분의 일처리는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새로운 공작이 되었다는 것을 황실에 알리러 가야만 했다.
일단 일주일정도만 쉬고, 황도로 향할 준비를 하라고 집사에게 일러둬야겠다.
공작의 방,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방의 창문으로 보면 정원에 심겨진 샤리나무가 보인다. 이 나무는 스피아 나무와 꽃은 비슷하게 생겼는데 잎 모양이 다르고 키가 훨씬 작다. 스피아 나무만큼이나 정원에 자주 심는 나무였다. 보통은 집의 뒷뜰에 심는데, 그 집안을 수호해준다는 의미를 가진 나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귀족 가문의 정원에는 꼭 한그루씩 있다. 특이한 것은 뒷뜰 한가운데, 그러니까 영주의 방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보이는 곳에 심는다는 거였다. 창가에 앉아 정원에서 분주히 잎을 틔우고 있는 샤리나무와 그 옆의 키큰 스피아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내 대답을 듣고 문을 연 네리아의 뒤에는 낯선 시종이 있었다.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본관이 아닌 곳에 근무하는 시종인 듯 했다. 자신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의 얼굴은 전부 외워둬야 했기에 나는 그 시종에 대한 데이터를 겨우 머릿속에서 찾아냈다. 아마도, 4관에서 잡일을 하는 시종이었던가?
그리고, 그 시종이 전한 소식은, 지난 한달간 잊고 있었던 '그 사람'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부드럽게 웨이브져 있는 크림빛 머리카락은 깃털처럼 가볍게 그의 이마를 덮었다. 유렌은 굵고 거칠지만 매우 고아한 느낌을 주는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천천히 쓸었다. 시렌느 공작저의 제 4관. 이곳 건물은 화려하고 선정적인 장식들이 유렌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여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도 시원하다는 것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빈정거리는 형제들이 없다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그래. 나쁠 것 없잖아? 그는 다시 앞머리를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책의 글씨에 시선을 주었다.
밝은 색의 머리카락이 묘하게 어우러져 섹시한 대조를 이루는 그의 피부색은 이곳 중부인과 다른 톤의 옅은 갈색이었다. 마치 태양에 잘 그을린 듯이 남자다운 구릿빛의 피부는, 보기보다 굉장히 결이 고왔다. 관절이 굵고 힘줄이 선명히 눈에 띄는 큰 손이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소매부터는 마치 그의 성격을 드러내주듯 철저히 단추가 잠긴 셔츠차림이었다. 하얀 색의 깃이 넓은 셔츠 위로 선명하게 굴곡진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각도에 따라 짙은 녹색으로도 보이고, 에메랄드같은 옅은 청록빛을 비추기도 하는 예쁜 눈동자에 걸맞게 유렌의 외모는 한번 보면 시선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큰 키와 완벽하게 잡힌 근육들은 거의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금빛의 긴 속눈썹은 그가 시선을 향하는 대로 눈동자를 살짝 덮고 있었고, 턱선은 날카롭고 콧대가 조금 높은 편이었는데, 유려하게 뻗은 코 아래에 굳게 다물린 입술이 매력적이면서도 남자다워 보였다.
그는 노예로 인간에게 잡혀온 엘프의 어머니와, 남부인 인간 귀족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엘프였다. 귀는 인간의 것과 똑같았지만 엘프 특유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겉도는 타입이었다. 겉보기로 보이는 나이는 스무 살 내외. 실제로도 딱 스물 두 살로 그와 비슷했다. 하프엘프이기에 수명은 인간보다 길겠지만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는 그 인간 귀족의 열두 번째 첩이었고, 그는 스무번째 아들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인간 여자 공작에게 정략적인 남첩으로 팔려와 있는 신세였다.
공작의 첩으로 공작가의 아들, 어찌 보면 과한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위스피닌 공작의 본처가 낳은 아이들과 첩이 낳은 아이들을 남녀 불문하고 모두 합해서 따진다면, 스무번째로 태어난 아들인 그의 계승서열은 거의 30위정도 된다. 물론 유렌은 스물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검으로만 치면 모든 형제들의 질투를 받을 정도의 실력자였지만 그의 출신은 다른 형제자매들에 비해, 인간의 기준으로 더 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렌의 친모는 유렌을 낳고 죽어버린 타국의 노예 출신 엘프였기 때문이다. 하르아이나 제국은 노예 제도가 없는데다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는 국가답게 이종족에게 너그러웠지만 타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예제도가 없는 제국의 공작 아들로서 법적으로는 차별받지 않고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온 그는 약간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에 타인에게 매우 냉정했다. 유렌이 말 그대로 고고한 엘프의 피를 물려받아 성격마저 엘프같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의 엘프 혼혈답지 않은 근육질의 그을린 몸매와 수려한 얼굴, 공작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남성적인 매력에 홀려 자진해서 몸을 바지는 여자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는 마치 무언가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자신에게 안기기를 원하는 여자들에게 그녀들의 소원대로 밤새 함께 보내주었다. 하지만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뛰어난 테크닉을 경험한 뜨거운 하룻밤 이후에 유렌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하게 버림받았다. 개중에는 아이를 가졌다고 매달리는 여자도 있었으나 그는 냉정하게 코웃음치며 그 여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신보다 훨씬 낮은 계급의 여자들만을 주로 상대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성격 더러운 걸로 소문난 유렌이었기에, 만만한 평민 여자들을 있는대로 괴롭히는 그 잔인한 유희의 원인이 자살하지 않고 자신을 낳은 무력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슬픔, 더러운 인간 아버지에 대한 강한 혐오감, 그리고 그딴 쓰레기의 피를 이어받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으로 생겨난 복수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위스피닌 공작은 아들의 망나니 짓을 돈으로 대충 해결하고 근본적인 원인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은 채 내버려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평민 몇 명의 죽음을 덮어버리는 데 쓰는 돈은 별로 신경쓸 정도의 금액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아들 중 하나가 집안에서 난리치는 것보다는 밖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다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겉으로도 그렇게 보이듯, 그는 단련된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유렌의 능력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었다. 스물 두 살에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기사단의 수많은 스카웃 제의와 심지어 황궁 기사단 제의도 받아보았지만 전부 거절했다. 사실, 그의 숨겨두고 있던 정령술 실력과 실제 검술 실력만 밝혔다면 첩으로 팔려오기는커녕 공작보다도 높은 지위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작위 대신에 공작의 첩이라는 치욕스러운 자리에 끌려앉게 된 이유는 형제들의 질투와 공작의 야망 때문이었다.
그의 친부는, 미래도 불확실한 한낱 기사 나부랭이와, 공작 중에서는 최고의 권력가인 시렌느 공작과의 연줄을 비교해 보고, 후자 쪽이 자신에게 좋다고 판단했다. 군계일학의 이종족 혼혈을 경멸하면서도 늘 비교당해오던 그의 형제들도 그를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신경쓰지 않고, 순순히 이 곳으로 팔려왔다.
그것은, 일종의 체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략적으로 팔려온, 물건이나 다름없는 신세. 그렇게나 자존심이 고고했던 유렌은 현재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최하로 전락해 있었다. 플로렌스 국제 아카데미에서의 톱 클래스 졸업증도, 지금까지 검술에 바친 노력들도, 천재라고 칭송받아오던 좋은 두뇌도 한순간에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유렌은 고요한 녹보석안을 무심하게 깜박이며, 아쉬움이나 억울함 따위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마치 인형같은 무표정함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마음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거처가 변한 것 외에는 별로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검술과 정령술을 수련한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머리와 자신의 검실력을 썩히는 것이 아깝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바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것이 인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더구나 이 곳에 온지 한 달째. 유렌은 이곳에 머물며 적당히 자신의 주인이 된 여공작을 상대해 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까탈스러운 여자라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까탈스러워봤자 유렌의 성격을 당해낼 리는 없겠지만.
하지만 공작이란 여자는 이제 보니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그를 찾는 횟수가 적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자신의 첩으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한달간이나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귀찮게 상대할 필요가 없어서 유렌은 오히려 편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끝까지 보고 표지를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방금 그걸로 이 저택에서 자신에게 허용되는 책은 전부 읽었다. 비록 첩실이 머무는 건물이라도 따로 서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별 것도 아닌 책들이 대부분이고, 공작의 서재나 도서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렌은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놓았다. 십수년 만에 사람의 손을 탄 책들은 오랜만에 각각 세 번씩이나 골고루 읽혀졌다. 유렌은 이 이상 같은 책을 또 읽으면 싫증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종을 호출했다. 마침 유렌의 방문 앞을 지나던 시종이 그의 부름에 응했다.
시렌느 여공작이 자신의 첩 따위에게 그녀의 개인 서재를 공개해줄 리가 없으나 그는 어차피 책이 없으면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일단 요청은 해 볼 예정이었다. 별 계획은 없고, 그냥 이곳 시렌느 공작가의 도서관에 출입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곳 도서관은 공작 소유였기 때문에 공작의 허락이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시렌느 공작 각하를 좀 뵈어야겠습니다만."
'뵙고 싶다'도 아니고 그래야겠다고 통보하는 듯한 말투에 시종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공작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첩은 하인보다도 못한 지위가 된다. 세이시아가 단 한번도 유렌을 찾아온 적이 없다는 것은 이 저택의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한갓 평민인 시종이 공작의 아들에게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는 유렌을 세이시아의 거처로 안내했다. 그곳에 가서 다시 쫓겨나오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지.
건물을 빠져나온 후부터 내내, 유렌은 지나가던 사용인들의 눈길을 받아야만 했다. 한 달간 자신에게 주어진 건물에서 나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저 사람 누구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제일 많았다.
"서쪽 건물에 사는 공작 각하의 남첩이래."
유렌이 거주하는 서관에서 일하는 시녀가 최소한 스무 명이 넘으니, 소문은 금세 퍼져나갈 것이다. 자신에 대해 알았으니 곧 버림받은 공작의 성노리개라는 것도 알려졌다. 시종과 시녀들은 동정의 눈빛으로 유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를 이루는 것은, 의문의 눈초리였다.
"나, 저 사람의 소문 들어본 적 있어. 공작가의 아들인데, 평민이나 하급 귀족의 여자들을 꼬드겨서 하룻밤만 자고 버린대. 성격도 엄청 나쁘다는거야."
"에, 넘어가는 여자가 바보인 거 아냐?"
"그치만 엄청 잘생겼잖아. 나도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저런 근사한 남자랑 자보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데 각하께선 뭐하러 저런 남자를 첩으로 들이셨을까?"
"그 정략결혼이란 거 아냐? 게다가 넘 잘생겼으니 첫눈에 반했다던가. 물론 공작각하께서 더 아름다우시지만."
마지막은 꺄르륵 웃으며 그 시녀들은 복도 모퉁이로 넘어갔다. 유렌은, 듣지 못한 척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불편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공작저 본관의 인테리어는 꽤 마음에 드는군, 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방금 들은 말을 잊으려고 했다.
***
"각하의 첩이신 유렌 위스피닌 경이 공작 각하를 알현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라니. 그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시종이었지만, 정작 들려온 소식은 시종급이 아니었다. 나는 쇼크에 빠졌다. 아니, 왜 나랑 만나자는 거지? 시비 걸러 왔나? '친정에 3천골드의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아버지께 일러바치겠다'라고 협박하려는 건가? 설마 첩을 위장한 스파이? 첩의 알현신청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시종이 대답을 요구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네리아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한 마디 충고해주었다.
"만나고 싶지 않으시면 그냥 거절하시면 되잖아요, 세이시아님. 그는 첩일 뿐이니까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 언젠가는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첩인데 평생 얼굴 안 보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왕 만날 거라면 내가 직접 찾아가려고 했어, 그래, 내가 그 사람의 존재를 잊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가 내 방문 앞까지 직접 찾아와줬으니, 이대로 쫓아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그에게 제 1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말하라며 시종에게 전했다. 기분 상하지 않게 그의 취향대로 차와 다과를 대접하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급하게 잠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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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복잡하게 써야하는뎅ㅠㅠ 2년전에 써놨던거랑 지금 추가한거랑 막 섞여서 설명이 너무 기네요; 유렌은 성격이 조낸 더럽습니다. 초반에 애가 좀 그래여. 여러분들의 반발도 많을듯 하지만 자존심 센 애를 길들여서 개처럼 만드는게 제취향이므로 그대로 나갑니다. 애초에도 선작수 천 넘으면 성공일듯ㅎㅎ 하고 쓴 소설이니까여ㅇㅅㅇ.
전편의 세리안 사진을 보고 나으 세리안은 저렇치않아!!! 하고 외치신분들 계신가여?
제 옆모습 그림체가 원래저래여ㅋㅋ 그냥 대충 머리모양과 색깔이 저렇구나 하고 그것만 생각해주세요. 그나마 원본은 조금 나은편이었는데 컴으로 편집하니 분위기가 너무 많이 달라졌네요ㅠ
유렌에게 낚이신분들 많은가요? '이름만'등장한다고 말해놨는뎈ㅋㅋㅋㅋ
진짜 전편에선 '이름만' 등장했습니다. 이거뭐임 게렌드립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