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6화 (16/226)

<-- 3. 젊은 여공작과 첩 -->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파티라는 걸 한번 하고 나면 생활밸런스가 와장창 깨지는구나.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란이야? 밖의 시끄러운 소리들 때문에 3시간은 더 잘 수 있었는데 깨버린 것이다. 보통의 소리들이라면 방음장치 덕분에 전부 차단될텐데, 나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내 방은 2층이었지만, 풀밭에서 무언가를 상의하듯 옹기종기 모여앉아있는 꽃의 정령들은 아주 잘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거야?

보라색 옷을 입은 제비꽃 정령은 들뜬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봤어, 봤어? 서쪽에서 새로운 사람이 왔어! 여왕님이랑 그 파란 인간 말고 다른 거 말야.〉

노란 꽃을 피운 카렌듈라도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잎을 흔들었다.

〈응응응! 우리한테도 말을 걸어줄까?〉

옆에 있던 장미 봉오리마저 그들의 얘기에 끼어들었다.

〈하프인데도 우리가 보이는 것 같았어.〉

……얘네들도 어제 파티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건가.

풀꽃의 정령들은 바람이나 물의 정령과 달리 한 곳에 쭉 붙박혀서 일생을 다 보내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에 민감했다. 하지만 그들이 인식하는 것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보통 인간들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정령은 인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그 '정령친화력'이란 게 없어서가 아닐까. 그들이 인식하는 사람은 우리 저택에서 단 세명, 나, 세리안, 아젤이었다.

그 이유는 나로서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세리안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미묘한 특유의 기운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진 기운은 정령인 나에게 조금 이질감을 주었다. 하지만 세리안은 그런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라서 그런지 그 기운이 남들보다 강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완벽히 자연과 융합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젤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기운이 매우 맑았다. 마치, 나무의 정령과 비슷한느낌. 물론 정령은 훨씬 더 순수한 것 같지만.

나는 '서쪽에서 온 사람'이 대체 누군지 그들을 불러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어제 파티가 열렸으니, 그런 사람이 한 명쯤 방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이왕 일어났으니, 더 자는 건 포기하고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이대로 광합성이나 하러 나가볼까, 아니면 밥 먹으러 갈까? 내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가족들끼리 다 모인 식사시간에, 아버지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세리안과 꼭 닮은 붉은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 빛났다.

"그렇지, 시아야. 일단은 서쪽 거처에 그를 머물게 했단다. 서쪽의 제4건물 말이다."

"……넹?"

"이제부터 인수인계를 하느라 바빠질 테니 다음 주부터 그 쪽에 찾아가 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별로 피곤하지 않다면 오늘 곧장 가봐도 되지만."

'그'라니, 아버지가 '그'라고 지칭할 만한 인물이 누가 있더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쪽의 제 4건물이라면 이곳 저택 본관에서 조금 북서쪽에 있는 큰 건물이었다. 호화롭게 꾸며진 편이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는데, 전에 한번 들러서 본 바로는 마치 사람 사는 집이라는 것 보단 별장이나 호텔같은 분위기였다. 우리 집안에서 그런 시설을 갖추는 것은 별로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겠지만 그 화려한 느낌이 본관의 우아한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세리안이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그 정도 거리라면 적당합니다. 본저택과 너무 가까운 감도 있지만, 아직 시아는 결혼하려면 한참 멀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샐러드를 씹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들이래? 식사가 끝나면 오빠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식사를 마치자마자 디저트를 들 시간도 없이 세리안과 아버지는 나를 끌고 나갔다. 집안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 새 주인에 대해 알리려는 것이다.

네리아는 다소곳하게 나를 졸졸 따라와 내 뒤에 섰다. 집안의 시녀들과 시종들, 가문 소속 기사들 등을 모조리 모아놓고는 새 주인을 발표했다. 나는 뻘쭘했지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거만하게 등을 펴고 서서 그들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내가 앞으로 그들을 책임져야 하고, 그들은 이제부터 나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크흑. 왠지 서글퍼졌다. 이곳에 와서 귀족이니 하는 갖가지 일을 겪는 와중에도 내심으론 여전히 내가 평범한 정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

방금 아주 자연스레 정령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았는데?

나는 스스로가 느낀 위화감을 깨닫지 못했다. 어느새, 내가 정령이라는 자각이 몸에 깃들어 버린 것이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네리아 이후로 내 직속이 될 시녀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세리안이 나를 호출했다. 나는 마침 쉴 생각이었기에 그대로 세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는데, 나는 여전히 어지러운 그의 방을 보니 피곤함이 가중되는 것 같아 멋대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라, 거긴 내 침대라구."

그 정돈 알아. 베게에 뺨을 부비자 세리안이 웃음기어린 말투로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오빠랑 같이 자고싶어? 자장가 불러 줄까?"

그대로 피곤한 몸을 축 늘어뜨리고 베게를 껴안으며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 땜에 내가 이 꼴이 됐는데? 이럴바엔 그 ○자라는 엘릭 레이몬드와 결혼하는 게 나을 뻔 했다. 남편이 고○라도 꼭 남편하고만 밤을 보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작위가 없는 귀족가의 여자가 결혼을 해 다른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기본적으로 당사자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그 집의 재산권의 일부에 대한 소유자격이 생기게 된다. 어느정도냐 하면, 대략 절반 정도. 과도한 권한의 악용을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제한이 있긴 하지만, 그 돈으로 충분히 여자도 남첩이나 정부를 두거나 집안의 자기 세력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첩을 둘 수 있는 것은 '귀족'이라는 제한이 있었으므로 평민이 귀족과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그 평민은 남편이나 아내 이외의 첩을 둘 수 없다.

이 제도는 첩을 들이는 걸 권장하는 케이스도 될 수 있지만 오히려 그걸 막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만일 부부가 둘 다 귀족일 경우에, 한 명이 첩을 만든다면 자기도 배우자가 둔 첩의 수만큼 첩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일부 일처였다. 평민과 귀족의 결혼이면 모를까, 귀족끼리의 결혼이라면 정말 막장부부가 아니고서야 서로 첩을 두지는 않는 것이다. 대신 공식적으로 첩의 자리에 앉히는 것 말고 몰래 애인이나 정부와 밀회를 갖는 방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긴 하다. 부부가 알고 있더라도 서로 눈감아주는 방식이기도 하고. 일단 첩과 단순한 유흥상대의 차이는 크니까 말이다.

하지만 보통 남편도 아니고, 자그마치 성불구자라지 않은가? 후계자는 친척의 아이를 양자로 들여 얻는다고 해도 대체 무슨 재미로 그런 남편을 데리고 살아? 몰래 바람을 피우는 수밖에. 감히 외도를 생각하는 내게, 세리안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제 4관에서 잘거니?"

……내가 내방 놔두고 왜 거길 가서 자? 의아한 듯한 시선에 세리안은 아차 하고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게 말을 안 했구나. 아버지와 상의해서 위스피닌 공작의 아들인 유렌 위스피닌을 네 남첩으로 들이기로 했다. 그 쪽과의 친분이 어느정도 뒷받침해주면 이트리샤 대공의 세력 밑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어제 4관에 거처를 마련해줬으니, 오늘 밤에 만나러 가도 좋을 거야. 아니면 네 쪽에서 시녀를 시켜 불러오던지."

"…………읭?"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방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 것 같았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남첩을 들일 생각따윈…….

"일단은 첩 하나만 들였지만, 네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면 서넛 정도 늘려도 좋아. 우리 집안은 그 정도 재력은 있으니. 첩을 하나만 두고 남편처럼 편애하는 것은 첩을 들인 의미가 없으니까, 측실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지만."

첩이란 건 단순히 욕구해소용으로만 사용하면 돼, 라며 그는 스스로 중얼거렸다. 나는 당황해서 왜 내 의사도 안 묻고 첩을 들였냐고 항의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는 내가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리고 마침 잘 됐다며 주머니에서 분홍색의 액체가 든 둥근 크리스털 병을 건넸다.

"자. 이건 선물이야. 사실은 내가 직접 먹여주고 싶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지?"

그는 농담처럼 말하고는 내 반응을 기대하는 듯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내 정신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

아버지는 은퇴한 공작답게 느긋한 어조로 내게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바쁘게 사는 동안은 내 옆건물에 사는 남첩의 존재에 대해선 잊기로 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당분간은 대거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다. 시녀장이나 시종장, 집사는 이미 집안에서 뼈가 굵어 웬만한 일에는 능숙해졌으니 공작이 바뀌었다고 함부로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직속 시종이나 대리인 같은 경우에는 내가 새로 뽑아야만 했다.

내 직속 시녀는 네리아 하나뿐이었지만 최소 세 명은 더 필요했다. 그리고 잔심부름이나 힘을 쓰는 일을 시킬 시종도 필요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귀족가의 아가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수호를 맡은 가문 기사단장과도 안면을 터야 했고, 기사들을 다루는 법에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생활패턴과 방마저 바뀌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은퇴 후 느긋하게 별장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한다. 최소 며칠간은 이곳 영지의 일을 봐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 방은 아버지가 쓰던, 저택 2층의 가장 넓은 방이 되었다. 큰 서재와도 가깝고 내 방의 두배정도 되는 넓이였다. 하지만 예전 방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베껴와서 갑자기 바뀐 방에 위화감이 들지는 않았다.

여러가지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마침 옆에 있던 세리안을 붙잡아 일단 임시로 대리인 일을 맡겼고, 새로 즉위했으니 영지를 한 차례 둘러보고, 게다가 아버지의 비서와 집사에게 새로운 지시사항을 일러두었다.

집사는 나이가 이미 50으로 조만간 자신의 아들에게 일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비서인 제인은 내가 영지 일이 익숙해진다면 자신은 아버지 옆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다음 집사는 내가 직접 교육시키고, 내 비서는 내가 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정도 여유가 있으니, 일단은 일에 안정을 찾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공작이 하는 일 자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익숙해지면 일의 흐름을 판단하는 것이 빨라져서 단순한 결재만을 처리해도 되지만, 지금 내가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아랫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것이다. 꼼꼼히 일처리를 하고 일일이 다 확인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서재에서만 산지 어느덧 한달이 넘게 지났다.

===

시아야 뭐 잊은거 없니?

으헉. 황태자는 ○자, 게○가 아닙니다!! 제가 전편에 애매하게 써놨다는 건 인정하지만 ㅋㅋㅋㅋ. 그냥 여자한테 관심없는 타입이에여. 지금 밝히자면 검에 영혼을 팔았다고 할수있죠. 여자보다 스포츠가 좋아!! 라는 운동소년.

작품설정에 세리안 그림 올려놨습니다. 뜰에는 세리안 그림과 세리안의 프로필이 있습니다. 가끔 불쌍한 컴을 가지신분들 중에서 작품설정 그림이 안뜨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분들은 제 뜰에서 봐주세여~ 세리안은 이미 나올거 다 나온거같아서 프로필을 올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