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하지만 꼭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파티장은 내가 지금까지 본것 중에서 가장 화려했다. 파티래봤자 천정에 알록달록한 풍선붙이고 종이끈 고리 걸어놓고 하는 홈파티 이런걸 상상했던 나로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정말 성대한 파티란 이런거구나.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고, 운동장만한 크기의 홀은 그만한 사람들이 있어도 전혀 좁아 보이지 않을만큼이나 넓었다.
가운데에는 댄싱플로어가 있고, 군데군데 있는 기둥에도 벨벳 장식이 가득했다. 화려하고 커다란 하프와 피아노가 악단에 의해 연주되는 중이고 해가 진 밤하늘이 채광창 너머로 보였지만 실내는 마법구가 붙은 샹들리에 때문에 대낮처럼 밝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음식들이었다. 오늘은 광합성과 양분섭취를 못했으니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치 과일나무처럼 큰 접시 위에 온갖 과일들이 가득 쌓여진 테이블로 가서 보이는대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리치도 있었고, 바나나와 멜론, 그리고 달콤한 사과, 수박, 설탕에 절인 체리도 맛있었다.
마음에 드는 과일들만으로 어느정도 배가 차자, 도수 없는 칵테일 위에 놓여진 오렌지 조각을 입에 물며 파티장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든 순간 나를 지금껏 지켜보고 있었던 듯한 세리안과 마주쳐버렸다. 세리안은 옆에 체격이 큰 웬 남자와 같이 서 있었는데 그는 끈적한 눈길로 나를 평가하듯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의 피부색에 놀랐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까무잡잡한 갈색 피부였기 때문이다. 흑인까지는 아니고, 중동지방의 그을린 짙은 구릿빛의 피부는, 이곳의 복숭아색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너무나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남부인……이라고 했던가.'
내가 아는 복숭아빛 피부의 사람들은 중부인이고, 카덴 대륙의 인간 중 90%가 중부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껏 접해본 사람들도 전부 중부인이었던 것이다. 중부인은 눈 색과 머리색이 다양하지만 붉은색이나 갈색, 금발이 전체 머리색의 절반 이상으로 흔한 편, 아젤님의 파란색과 세리안의 은색, 그리고 나의 펄핑크색의 머리카락 색은 드문 편에 속한다. 새카만 흑발이나 보석같은 맑고 선명한 컬러도 매우 드문 색이라고 한다.
남부인은 저 멀리 남쪽의 더운 사막지역 출신인데, 카덴 대륙에는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이 없기 때문에 하르아이나 제국에도 중부인과 남부인이 섞여있다. 지역적 위치가 위치인만큼 남부인의 수가 많지는 않다. 남부인은 대체로 코 끝이 둥글고 투박한 외모에 피부색이 짙고 살결이 중부인보다 고운 편이며 키가 작은 편이니 손과 발도 중부인보다 작다. 머리색은, 중부인에게 드문 은발이나 중부인에게 매우 드문 짙은 흑발이 많다고 한다.
그 말대로, 눈앞의 이 남자는 키와 몸집은 큰 편이었지만 머리는 금속성 있는 은빛 머리였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은발은 중부인 중에서는 드문 편이다. 세리안의 크리스탈 빛의 은발과는 달리 회색 느낌이 강했지만, 머리색 자체는 어두운 피부색과 어울렸다.
"시아, 소개하지."
세리안의 말에 멍하니 있는데, 흰 예복을 입은 그 남자가 내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큰 입을 히죽거리는 모습이 뭔가 기쁜 일을 애써 감추려는 것 같았다.
"위스피닌 공작이라고 합니다, 시렌느 공작 각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공작인데도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나에게 깍듯이 대하는 걸로도 모자라 날더러 시렌느 공작영애가 아니고 공작 각하라니, 나는 당황해서 인사에 답할 생각도 못하고 세리안을 바라보았다. 연장자의 인사를 무시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사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시선을 세리안에게로 옮기는 내 모습이 도도한 귀족 여성처럼 보였는지 아무 말 않고 있었다.
내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설명해보란 듯 세리안을 바라보았지만 세리안은 내 대신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
"아시다시피 내 여동생인 세이시아 시렌느라고 합니다. 위스피닌 공작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다음 대 공작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쪽이야말로 그런 요구를 들어주셔서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겠군요."
"아니,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오히려 제 쪽에서 감사하지요. 이제는 사돈관계인데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둘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게다가 저 사람은 왜 나한테 데려와서까지 소개시킨 거지. 내가 미심쩍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세리안이 위스피닌 공작에게 예의상 웃음을 지어주며 나에게 속삭였다.
"이제 인사는 끝났으니까 저 쪽으로 가서 아젤과 놀고 있어."
나는 그제서야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세리안이 이해 못할 행동을 하는 일이 한두번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아젤 쪽으로 다가갔다. 세리안은 바빠 보였고,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아젤이라면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가까이 가면서 점차 보이기 시작하는 아젤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평소의 흰색이나 회색 계열의 단정하고 헐렁한 로브가 아니라 금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복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그맣고 귀여워 보였던 이전과는 달리, 역시 작긴 하지만 엄연히 고귀한 혈통을 지닌 소공자로 보였다. 나이는 열 일곱이 아니지만 초대장을 받을 권리는 있다. 아무리 어릴지라도 백작급의 작위를 가진 현자였으니까, 작위를 받는 순간 이미 성인으로서 모든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다.
영애들은 유일하게 이 중에서 가장 어리고 귀여워 보이는 아젤에게 접근해서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현자님께선 요즘 어떠신가요? 5년 전 공개 현자 임명식때 뵙고 처음이네요. 어머나, 절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시렌느 공작가에 머무르시고 계신다면서요,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인 것 같네요."
"칸스티어님은 언제나 파티에 초대는 많이 받으시지만 전부 거절하신다고 알고 있어요. 오늘 나오신 게 처음이시죠?"
"다음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에서도 꼭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희 집안에서 보내신 초대장을 전부 거절하셔서 마음이 아팠답니다. 이제부터는 초대를 받아들여주시는 거죠?"
그들은 모두 아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듯 했지만 귀엽다는 말을 하거나 함부로 만지지는 않았다. 정말로 예절은 철저히 지키는구나. 그걸 보니 예전에 마음대로 만졌던 나에게 아젤님이 화를 내셨던 게 당연한 것 같았다.
아젤은 그들의 관심이 곤란한 듯이 애매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억지로라도 대답해 주었다.
물론 나머지 질문은 다 씹고. 아젤은 저래보여도 은근히 완고하고 냉정한 면이 있다. 스승님에게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세리안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성깔도 꽤 있는 것 같고.
"네. 제 가르침을 받고 계시는 시렌느 공작영애께서 초대하셨으니, 일단은 선생 된 입장에서 당연히 응해 줘야겠지요."
"어머나, 제자가 있으셨어요? 칸스티어님은 절대로 귀족 자제의 가정교사는 맡지 않는다는 주의셨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 혹시 저도 제자로 받아들여주시면 안될까요, 시렌느 공작영애가 된다면 저도 안될 것 없잖아요?"
처음으로 도를 넘어선 것 같은 질문에 아젤은 당혹스러워했다. 다짜고짜 제자로 받아들여달라니. 하지만 그의 반응을 보아 이런 일은 예전에도 종종 있었던 것 같았다. 젊은(어린,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만)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하는 귀족소녀들은 많았고, 그들의 부모 입장에서도 딸이 현자와 잘 엮여서 손해볼 일은 없으니까 아젤을 필수적으로 스카웃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아무리 소속 국가가 없는 현자라 할지라도 어느정도의 친분을 갖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이득이 되는 것이다.
쩔쩔매고 있는 아젤을 보니 원래 그는 이런 일이 생길까봐 파티고 뭐고 안 오려고 했음이 분명했다. 괜히 내가 울며(?) 초대해서 그를 곤란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그 보답으로 나는 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그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젤 님, 여기 계셨군요. 계속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아젤의 옆에 서서, 너넨 뭔데 내 스승님한테 작업이냐는 듯 몰려있던 여자들을 아래위로 쭉 훑어봐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우아해 보이려고 노력하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렌느 공작 영애입니다. 아젤 님, 아시는 분들이세요,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뒤의 말은 아젤을 애교있게 바라보며 상냥하게 말했지만, 그녀들은 여우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젤은 마침 너무 잘 됐다는 듯 냉정하게 그 여자들을 내쳐버렸다.
"아닙니다. 오늘 처음 본 사이니 잠시 인사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세이시아 님."
서로 이름을 부르다니, 어떤 사이냐는 듯한 궁금증과 미소년을 빼앗겼다는 미묘한 질투심이 섞인 눈빛이 이 쪽으로 쏟아졌다. 아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손을 잡고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이시아 님, 잠시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저 쪽으로 같이 가시겠어요?"
나는 갑자기 손을 잡혀서 깜짝 놀라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끌려갔다. 손대는 거, 싫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와 그는 둘 다 장갑을 끼고 있었으니까, 비록 얇은 장갑이라도 아젤의 보드라운 손과 따뜻한 체온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장갑 때문에 내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걸까?
드디어 여자들에게서 벗어난 아젤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세이시아 님, 그런 뻔한 거짓말은 하시는 게 아닙니다."
……뻔한 거짓말이라니? 하지만 나무라는 듯한 말투가 아니라 드물게도 즐겁게 웃는 얼굴을 한 아젤이 한 말이었기에 혼내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저를 쭉 찾아다니셨다니요, 세이시아 님께서는 파티장에 들어오자마자 식사에만 정신이 팔리셔서 제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계셨잖아요?"
윽. 그걸 어떻게…….
역시 현자인가. 예리하군. 어떻게 안 거지.
"이 파티장에 있는 남자들 중 하나라도 세이시아 님께 시선을 주지 않은 남자는 없답니다. 홀에 들어온 순간 모든 남자들은 당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군요. 평소처럼 손에 잡히는 대로 막 드시는 기품없어 보이는 행동은 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그 순간 나는 심각하게 움찔했다. 내, 내가 아젤님 앞에서 과식(果食)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과일만 보이면 끝없이 먹어대는 내 모습을 보고 한때는 오빠가 귀엽다며 더, 더, 더 많이 먹인 적이 있었는데 나는 생각없이 주는대로 먹다 배가 터질뻔 해서 그날 저녁까지 밥은 입에도 못 댄 적이 있다. 그만큼 좋아하는 음식은 앞뒤 안 가리고 주워먹는데, 기품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지.
나는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보다 아젤님, 세리안이 아까 위스피닌 공작이라는 사람을 저한테 소개해줬는데요."
"위스피닌 공작이라면, ……그렇군요."
아젤의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사람이길래?"
"……역시, 세리안이 미리 말씀드려 주시지 않으셨나 봅니다. 위스피닌 공작의 증조부가 남부의 상인이었는데, 큰 상단을 벌여 성공해서 하르아이나 제국에 정착했지요. 그래서 현 공작은 금전적으로 상당히 넉넉한 고위 귀족입니다. 공작은 사업가 기질이 있는 편이라 사람을 대하는 데 익숙하고 상업을 좋아해 가진 재산을 많이 불려놓았지만, 여자를 굉장히 밝히는 인물이지요. 그 때문에 몰락한 남작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첩을 현재 열 일곱명 두고 있다고 합니다."
엑, 열일곱명!? 그게 다 감당이 가능해?
나는 대체 세리안이 왜 그런 공작과 놀고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세리안을 만나러 가보기도 전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청록색와 옅은 녹색의 눈에 띄는 머리카락을 가진, 둘째 황자였다.
그는 매우 여유롭게 이 쪽으로 걸어오더니 내게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심지어 혼자도 아니고 옆에 금발머리의 남자와 체리 빛의 머리카락을 한 여자를 달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쟤는.
"안녕, 우리 구면이지?"
초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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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머리색 사실 별로 희귀한거 아님. 특이하게 생겨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듯 한데 저거 염색입니다. 즉 날라리라는 거죠.
사실 더 길게 올릴수 있었는데 끊기 애매해서;
내일도 올릴테니 덧글좀요ㅠㅠㅠㅠ 요새 덧글이 부족함. 전편덧글은 평소의 절반이구; 왜이러징 재미없나여 ㄷㄷ.
앗 그리고 저기 2황자는 공략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친구할 예정. 그리고 황태자랑 3황자도 나올텐데 걔네도 공략 안해여. 왠지 역할을 정해주다보니 공략하면 곤란해짐. 황실 식구들과는 인연이 없군요. 하지만 다른 나라의 왕족들은 충분히 공략 가능합니다. 아직 미혼인 왕도 있고 왕세자랑 왕자들도 있잖아요.
이제부터 사람들이 많이 나올텐데, 그 중에서 유부남들은 싸잡아서 전부 공략 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