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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12화 (12/226)

<-- 2. 하지만 꼭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요새 유행이 어떻고, 어떤 색은 한물 갔기때문에 쓰면 안되고, 그런 내용들은 사교계 출전경험이 없는 나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세리안과 네리아와 휴이든 남작부인은 차가 식을 정도로 열중해서 자기네들끼리만 대화하며 드레스를 골랐다. 간간히 세리안은 나에게 어떤 스타일이 마음에 드느냐, 물어보기도 했지만 내가 뭘 알아야 대답을 할 것 아닌가.

나는 세리안의 옆에 앉아 남작부인이 내미는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고, 아젤은 티타임에 초대받아 놓고는 멀찍이 떨어져 앉은 후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옷을 다 챙겨입기는 했지만 그 후엔 할 일이 없어서 아젤과 수다나 떨기 위해 그를 안으로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저러고 있어서야 먼저 말을 걸기 뻘쭘하다.

나는 할 수 없이 차만 두 잔째 들이켰다. 싱싱한 홍차잎으로 만든 레몬 홍차였다. 아젤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세리안은 바빠 보이니 혼자서 할 짓이 홍차와 대화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없던 능력이 생기기도 하고 있던 능력이 더 심화되기도 했는데, 식물에 관한 능력은 상세한 부분까지 알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예를 들면 길에서 보는 저 풀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식에 무슨 식물이 들어갔는지 하는 것이나, 이 차는 무슨 식물의 무슨 부위를 우려냈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보통은 손만 대도 알 수 있긴 한데 마시면서는 더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제일 흔히 쓰이는 능력이라 익숙해져서 어디 좋은 곳에 쓸 수 있을 법도 한데, 사실 별 쓸모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기준과 전혀 무관한, 식물 자체의 기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아무리 유용한 식물이라도 식물은 식물일 뿐이며, 인간에게 독인 식물이라도 결국 식물은 식물이다.

그래도 일단 이름을 알 수 있다는 게 어디냐. 하지만 그 식물의 이름도, 인간이 붙인 이름과 식물 고유의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더욱 쓸모없을 때가 많았다.

***

결국 내가 데뷔식과 생일파티날 입을 드레스는 그들 멋대로 정해졌다. 스케치로만 봐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세리안이 어울리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나중에 드레스 가봉을 하게 되면 제대로 알 수 있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남작부인이 돌아가고 나서는 대기하고 있던 장신구 상인을 불렀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과정은 위와 똑같았다.

핑크 다이아몬드와 루비 중에 무엇이 더 좋을까 하는 문제를 둘이서 의논하고 있는 세리안과 네리아를 보며 대체 둘이 언제 저렇게 친했는지 궁금해졌다. 사이 나쁘지 않았던가? 내 일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여전히 수줍어하는 것 같은 아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마치 처음으로 여자의 알몸을 본 사람처럼-아니, 나 알몸이 아니고 속옷 입고 있었는데?-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젤의 커다란 눈동자를 가까이서 응시했다.

"저기, 아젤 님?"

힛, 하며 아젤이 화들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연히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목덜미로, 원피스의 네크라인 사이로 옮겨갔다. 무슨 상상을 한 건지 힘차게 고개를 젓고는 내 눈만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며 아젤이 대답했다.

"네, 네? 무슨 일이세요, 세이시아 님?"

우와, 진짜 귀엽잖아! 머리색도, 눈색도 청량한 푸른색인데다가 언제나 만들어진 듯한 성숙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좀 차가운 느낌의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 뺨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은 표정관리에 실패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어서 정말로 열세 살의 어린아이같았다.

"얼굴이 빨개졌어요. 열이 나는 거 아니에요?"

"!"

나는 반 장난으로 그의 보드라워 보이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사실은 그 눈부시도록 흰 우윳빛 살결에 손을 대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 순간, 탁 하며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챘다. 내 손목을 아프도록 꽈악 쥐어 자신의 몸에서 떼낸 사람은, 아젤 본인이었다.

"……?"

아젤은 방금 전까지의 순수한 표정은 어디 가고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의 것임에도 또박또박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깨끗하고 순수해 보였던 파란 눈동자가 지금은 더없이 냉랭해보이기만 했다.

"함부로 손대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어리다고 해도 상대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시죠."

헉.

갑자기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느낌이 들었다. 평소의 얌전한 소년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얼음장같은 아젤의 반응에 나는 그만 당황해서 손을 빼냈다. 기가 죽어서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내렸다. 너무 주제넘었던 것 같다. 일단 그는 백작 이상의 작위와 동일한 취급을 받고 있는 현자 칸스티어였고, 내 스승이기도 했으니까.

"아, 죄, 죄송해요. 아젤 님."

여리고 조그만 손이라서 아기 같다는 생각이 드는 손이었지만 아젤도 당황해서 너무 힘을 줬는지 내 팔을 잡는 순간적인 악력이 상당했기에, 빼낸 내 손목에는 붉게 자국이 남아버렸다. 그에 오히려 아젤이 더 놀라서는 나에게 소리를 높여 사과했다. 아까의 그 차가운 목소리는 정말로 한순간이었던 것이다.

"아니, 저, 저야말로 너무 반응이 과했던 것 같네요. 사과드립니다. ……타인이 제 몸에 손대는 걸 원래 좋아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방금은 그가 완벽히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인간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스스로의 감정을 완전히 제어하고 있던 소년이었는데, 방금 전에는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당황했던 걸까?

"……."

"……."

아젤은 이제 어쩔 줄 몰라하며 초조한 시선으로 문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그럴 명분이 없어 앉아만 있을 뿐이다. 나도 괜히 장난친답시고 만지려 들다가 처음으로 저택에 초대된 아젤과의 티타임이 애매해지자 뒤늦게 후회했다. 좀 더 친해지고 만질걸. 급 어색해진 둘 사이의 분위기에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시아♡ 이리 와 봐."

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달콤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연한 붉은 색의 보석이 달린 반지를 한 번 착용해 보라고 부른 것이었다. 다행히 방금 전의 차가운 분위기는 깨져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세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세리안은 내 왼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듯이 잡고 중지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나도 보고 싶은데, 한동안 내 손을 붙들고 장신구 상인과 네리아와 얘기를 주고받더니, 다시 빼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디자인의 반지로 시착하기를 여러 번.

결국 악세서리 세트를 골랐는지, 상인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돌아가고 나와 아젤, 세리안만이 남았다.

나는 아까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 이전에 아젤이 먼저 말해버렸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저, 저는 괜찮으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나는 빠르게 사과하고 지나쳐가려는 아젤을 붙잡으려다가, 긴 소맷자락을 잡아버렸다. 만지는 게 싫다면 옷은 상관없겠지. 아젤은 갑자기 옷자락을 붙들려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매력있게 웃어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아젤님도 제 생일파티에 와주시는 거죠?"

아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춤하더니, 금세 내 미소를 보고는 환하게 웃음지어주었다.

"네, 물론이지요."

***

"애는 애군."

별관, 도서관 윗층이자 현자 아젤 칸스티어의 거처 방문 앞에서 세리안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서 말했다. 푸른 머리를 짧게 잘라 가지런히 빗은 어린 소년, 아젤은 그 말에 그다지 울컥하지는 않았다. 현자의 직위에 걸맞게, 빙그레 웃으며 능숙하게 대처할 뿐이었다.

"그 말을 하시고 싶어서 여기까지 따라오신 겁니까?"

"그럴 리가. 그저 네가 새삼 열 세살짜리 꼬마라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 열 세살이었습니다."

놀림에도 전혀 반응이 없는 꼬마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세리안은 은빛의 장발을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 아까 전 시아가 조금 장난쳤을 때에는 그렇게나 당황하더니 내 말에는 역시 꿈쩍도 않는군.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벽에 기댄 등을 떼었다. 그리고 갑자기 화제를 전환했다.

"위스피닌 공작가의 그 망나니 혼혈 말일세."

"위스피닌 공작가의 혼혈이라면……."

'혼혈'이라는 말보다 '망나니'라는 단어를 통해 아젤은 위스피닌 공작가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한 명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결코 세리안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갑자기 그 사람은 왜……?

의아해하는 아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세리안은 싱긋 웃으며 선언했다.

"즉위식 때 시아의 첩실로 넣어 주려고."

"……제정신이십니까?"

아젤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세리안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해도 그 남자를 자기 여동생의 남편도 아니고 남첩으로 삼겠다니. 아젤은 그가 자기 여동생의 의사는 물어보고 하는 말인지 궁금해졌다. 그럴 리가 없겠지. 기억을 잃은 세이시아는 바깥에서 들리는 소문들에도 무지한 것 같았으니 그 남자가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이미 위스피닌 공작의 의사도 물어봤어. 문제아를 이쪽에서 도맡아 준다고 하니 기뻐 죽을 정도로 좋아하더군. 어차피 첩의 아들이니 첩으로 준다고 하면 딱 걸맞는 대우라고까지 말했다니까? 게다가 자신의 친아들을 결혼시킴으로서 이 쪽과의 연줄도 생기는 거니 공작 입장에서는 대환영이지. 지참금까지 얹어줄 기세였어."

세리안의 표정은, 수많은 첩의 아들 중에서 하나를 내준다고 흔쾌히 말한 그 위스피닌 공작을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과 모르고 있는 사실을 세리안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위스피닌 공작의 의사 따위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사자인 세이시아 님도 알고 계신 사실인가요?"

"이건 정략 결혼이기도 해. 정실로 맞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첩이야 어차피 수백을 둘 수도 있으니 세이시아라면 신경쓸 필요가 없겠지. 사내새끼가 첩으로서의 대우가 좋지 않다고 친정에 하소연을 할 리도 없겠고, 시아가 필요치 않다면 그냥 내버려 두면 돼."

"하지만 그 남자는……!"

"뭐가 그렇게 신경쓰이는 건가?"

세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햇다. 마치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별 문제도 없는 사소한 내용인 것처럼.

"……."

아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세리안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런 그를 보고 웃었다.

"걱정 마. 세이시아는 결코 경솔하지 않고, 그 남자도 네 생각만큼 앞뒤 못 가리는 망나니가 아니니까."

"……하나만 묻겠습니다. 세리안, 그 남자를 세이시아 님의 첩으로 선택하신 기준은 뭐죠?"

아젤의 진중한 물음에 세리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력과 테크닉."

"……."

정말이지 당신이란 남자는……. 아젤은 어이가 없어져서 한숨에 가까운 신음성을 흘렸다. 세리안이 너에게만 말해준다는 듯이 웃으며 설명했다.

"시아는 내 친여동생이라구? ……그러니까 일단은 지켜만 볼 생각이야. 게다가 시아는 지금 숫처녀이니까, 첫경험을 한다면 그 상대는 조금이라도 실력이 뛰어난 쪽이 좋겠지. 안 그래?"

열 세 살짜리 아이에게 노골적으로 할 소리는 아닐 텐데. 하지만 아젤은 대충 알아듣고 한숨을 쉬었다. ……현자는 그냥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남자가, 아니, 이 종족이 제국의 방탕한 이십 대의 사내들보다도 훨씬 더 개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귀여운 여동생한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 남자라니!

게다가 그 선물을 주는 이유는……. 아젤은 미칠 것 같았다. 저 은발의 사내는 지금 내가 열 세살이라는 걸 잊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 얘기를 서슴없이 내 앞에서 말하다니.

사실은 생물학적으로도 친여동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지만, 세리안이 가짜의 삶을 진짜처럼 여기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녀가 그의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친동생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리안은 방금 아젤 앞에서 적나라하게 밝힌 것이다. 원래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세이시아가 기억상실에 걸리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것이 좋은 결과를 불러올 지, 나쁜 결과를 불러올 지 아직 그는 모른다.

아젤은 괜히 눈치만 빨라서는 이상한 일에 관여되어 버린 자신을 자책했다. 5년 전의 그 날, 세리안의 정체만 알아버리게 되지 않았어도……. 아젤은 세리안의 정체를 알게 된 그 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휴, 머리 좋은 게 죄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여러가지가 섞여있는 복잡한 한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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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타의 전유물 앙탈 스킬 발동.

너무 만만하면 재미 없겠죠?

세리안의 비밀도 드디어 드러났군요. 요거 숨기려고 그렇게 뻘짓을 해댔다는;;

현재 이 시점까지 설정되어 있는 주요 남캐 3인입니다.

백금발 : 청순하고 남자답고 순종적인 타입.

적발 : 섹시 다이나마이트.

흑발 : 약간 반항적인 츤데레.

기타 등등 : 세리안이라던가 아젤이라던가.

위에 살짝 나오신 위스피닌 가의 망나니는 첫번째 남편이 되실 분입니다. 이제서야 드디어 안 익히고 곧바로 먹을 수 있는 남주가 등장했군요! (아직 이름도 안 나왔지만.)

근데 댓글로 캐릭 이름에 오타내는거 일부러 그러시는건가옄ㅋㅋㅋ

아젤→아벨, 세리안→세이안ㅋㅋㅋㅋ. 왠지 웃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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