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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4화 (4/226)

<-- 1. 곤충은 아니라서 다행인듯. -->

나는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에 조금 걱정하면서도 그 오빠란 사람이 내 방에 들어오길 기다렸다. 긴 여행을 떠났다가 귀환했으면 적어도 다쳐 누워있다는 여동생에게 인사 정도는 하러 올 것 아닌가. 하지만 아침에 잠시 부모님이 문안을 온 것 빼고는, 점심때가 다 지나도록 아무도 내 방에는 발걸음도 않는 것이다. 오빠를 맞이한다고 해서 내 방의 시녀들까지 전부 불려나갔는데 나만 혼자 방에서 왕따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가고 싶지만 아직은 몸이 덜 회복되어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말라고 아버지가 단단히 일러 두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밖의 상황을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

그래서 점심을 가지러 온 시녀들을 다그쳐서 바깥 상황을 캐물어보았지만, 그 시녀는 굉장히 당황하면서 우물쭈물했다.

"저, 저기, 그게……."

"말해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나갈거야."

나한테만 말 안해주고 자기네들끼리 밖에서 무얼 그렇게 하는 건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그 시녀는 정색을 하며 날 뜯어말렸다.

"안됩니다! 주인어르신께서 아가씨를 절대 침대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숨기려는 건데? 지금 밖에 내 오빠라는 사람이 와 있는 거 맞지? 자꾸 그러면 나도 나가고 싶어지잖아."

빨리 말해주셈. 그러나 자꾸 뭔가를 숨기려는 듯한 시녀의 행동에 의아함이 들어 반 장난으로 위협하듯 말했지만 의외로 시녀에게는 그 협박효과가 컸나 보다. 그녀는 매우 곤란하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속으로 조금 찔린 내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내게 말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아가씨와 세리안 님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으셨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세리안 님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어요. 세리안 님께서는 아가씨와 거의 말도 하지 않는 사이셨구요."

헐, 역시 세이시아와 그녀의 오빠는 사이가 나빴구나. 그래서 오빠는 여동생이 뻗어있다는데 병문안도 오지 않고, 집안 사람들도 여동생 앞에선 오빠 얘기를 꺼내지 않나 보다.

"……근데 왜?"

왜 사이가 그렇게 나쁜 거지? 둘 중 한 명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지 않는 한은 남매사이에 그 정도로 사이가 나쁠 일은 별로 없는데. 후계자 싸움을 하는 형제도 아니고, 성격차가 많이 나는 자매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둘이 그렇게 적대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일개 시녀가 남의 집안 속사정을 꿰고 있을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내 전속 시녀도 아닌데 이전 세이시아의 심리를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나는 내 전속 시녀라는 네리아에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의문에 답을 한 것은, 노크도 없이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자였다.

"그건 공작위 때문이지."

"읭?"

"세리안 님!"

숙녀의 방 난입자에 시녀가 당황해서 외친 이름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반짝임을 자랑하는 긴 은발을 하나로 묶은 그 젊은 남자는 세이시아의 모친과, 그리고 세이시아와도 이목구비가 굉장히 닮아 있었던 것이다.

세이시아의 아버지는 남자다운 외모를 가지고 계셨다. 잘생긴 축에는 들었지만 여성스럽다거나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리안-내 오빠라는 남자-와 세이시아-지금의 나-는 굉장한 미녀인 어머니와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세이시아는 친모를 꼭 닮은 미소녀였고, 세리안은 시녀가 아까 말했던 대로, 정말로 아름다운 미청년이었다. 웬만한 연예인 실사보다 훨씬 잘생긴 꽃미남이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 세이시아의 오빠…….

시리도록 차가운 느낌을 주는 은발과 대조되게 부드러운 눈매와 다정한 붉은 빛 눈동자를 가진 세리안은 신사적으로 보이는 외모와 정반대로 약간 쌀쌀맞게 내게 말했다.

"네가 공작위를 물려받고 싶어하는 만큼, 나도 작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립하고 있는 거지. 새삼 그런 당연한 일을 묻다니, 네가 낙마로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사실이었군. 나는 또 네가 다친 걸 핑계로 날 음해할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지 뭐냐. 안 그래, 세이시아?"

마지막 말을 할 때에 세리안은 대사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그것이 비웃음이라는 점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오늘 처음 본 이 남자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불편해졌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이불을 끌어당겨 잠옷 차림을 가렸다. 그는 어디 외출하려는 것처럼 단정한 정식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침대 위에 반쯤 걸터앉아 그저 속옷 위에 하늘하늘한 실크 슬립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이런 야한 잠옷차림으로 몸을 보여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수치스러워하며,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온 세리안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런데 내가 공작 작위를 받고 싶어했다니, 그런 얘긴 아무도 나한테 해주지 않았잖아."

괜히 내가 몰랐던 사실에 대해 애꿎은 시녀에게 불평했다. 기본적으로 그 정도만 말해 줬어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진작에 알았을 텐데.

"그, 그치만 세이시아님께서 당연히 알고 계시는 줄 알고……. 작위를 둔 형제자매끼리의 경쟁이나 대립은 귀족가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라서요."

그치만 난 여잔데. 아까 말했던 시녀의 칭송으로만 봐도 세리안이라는 이 남자는 공작 자질이 충분했고, 거기다가 장남이다. 대체 이전의 세이시아는 무슨 생각으로 작위를 가지려고 했을까? 여자이고 2인자인데도 그게 가능하단 말야?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세리안은 이불을 뒤집어쓴 날 보고 매력적으로 빙그레 웃었다.

"새삼 부끄럼이라도 타는 건가, 응? 상당히 새로운 반응이로군, 그런 건."

꽤 놀라움을 담은 그의 태도는 정말로 호의와 적의를 분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악의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냥한 미소를 언제나 짓고 있으면서, 어떻게 방금 전 나한테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었을까. 방금 전 일인데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이전의 난 어땠는, ……데?"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보여 존댓말이 저절로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남매 사이에 존댓말은 쓰지 않잖아? 그래서 높아지려는 말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세리안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눈빛만으로도 날 죽일 수 있을 정도였지. 지금 생각해보면 성가신 여자였어.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가지고 나 따위에겐 절대 작위를 뺏기지 않을 거라며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정면에서 경쟁하는 것뿐만 아니라 뒷공작까지 너무 성가셔서 죽여버릴지 상속권을 포기할지 고민하던 차에, 이런 일이 일어났군. 나에게나 너에게나,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헐. 그게 지금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말입니까? 아무래도 이 남매의 감정의 골은 꽤 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세리안의 말에서 한 가지 이질적인 점을 발견했다. 세리안은 마치 내 앞에서 기억을 잃기 전 세이시아-즉, 진짜 세이시아-를 남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워낙 남일 말하듯 해서 그런 걸까.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약간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내 정체를 들켰을 리는 없는데. 나는 틀림없는 세이시아였다. 영혼이 바뀐 것만 제외하면, 내 존재 자체가 의심될 리는 없는 것이다. 세이시아로 행세하기로 막 결정했는데 이런 식으로 남의 정체를 뒤흔들어놓다니, 나 잘하면 쫓겨날수도 있는건가? 아니지, 어쨌든 귀족가랬으니 귀족의 딸을 사칭한 혐의로 잘 하면 사형당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나는 기억을 잃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이 세계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나의 적대 세력인 세리안은 나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날 내치려고 한다면 그런 짓은 언제든 가능할 것이다.

무서운 사람을 적으로 두었구나, 세이시아.

복잡한 표정으로 세리안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그가 다가와서 내 턱을 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커다래진 눈으로 멀뚱히 바라보자 세리안은 빙긋이 웃으며 내 얼굴을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아까의 경멸과는 달리, 이번엔 순수한 흥미였다.

"지금의 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표정에 다 드러나는걸. 귀엽기도 해라."

뭐, 뭐, 뭐야? 5초 전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귀찮은 여자라고 욕했다가, 이번엔 귀엽다니. 흠칫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세리안을 쳐다보았다. 랄까 얼굴 가까이 대지 마, 너무 가깝잖아? 하지만 세리안은 내 턱을 받쳐든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자신의 얼굴로 가까이 잡아당겨, 결국은 뺨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잠깐, 당신 무슨 짓이야!?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부드러운 붉은 입술이 닿은 부분이 왠지모르게 화끈거렸다.

이전에 채시아였을 시절, 나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려는 남자도 몇 명 있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진짜로 당해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설마 그 시점에서 세리안이 내 뺨에 키스하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항을 할 틈도 없이 정말 허무하게 당해버렸던 것이다.

"기억상실증이라, 이렇게까지 귀여운 여동생이 되어 줄 줄 알았다면 진작에 쉬프린이나 겔다를 타서 먹일 걸 그랬나봐. 아까 내가 한 말은 이제 널 죽일 필요가 없게 되어 다행이라는 의미다. 기억을 잃은 꼬마 따위는 내 경쟁상대가 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널 죽일 생각은 없어. ……물론 기억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야."

붉어진 내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죽일거라는 잔인한 소릴 느긋하게 하고 있는 세리안은 무언가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방금 들은 말을 제대로 해석할 생각도 못한 채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뭐, 뭐하는 거야! 여동생한테!! 변태!!"

"오빠가 여동생의 뺨에 키스하는 것도 안 되나?"

방금 건 뭔가 불순했어! 불순했다고!! 억지를 쓰며 세리안을 몰아붙이자 그는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아, 냉혹하게 독설을 퍼붓던 얼음꽃은 어디 가고 귀여운 떼쟁이 어린애가 되어버렸네. 하지만 나는 이 편이 더 마음에 드는걸. 시아, 이제 기억 돌아오지 않는 거지?"

시아, 라고 그는 세이시아의 애칭을 당연하다는 듯이 불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예전의 세이시아는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이었음이 틀림없다. 딱 그녀의 어머니 성격 말이다. 은근히 기억이 안 돌아오길 권유하는 세리안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앞으로도 기억이 돌아오기는커녕 죽은 세이시아가 살아나는 일도 없을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ㅇㅇ. 안 돌아옴."

세리안은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그가 웃는 것은 거의 버릇같았지만, 분명 세이시아에게는 그 웃음조차 잘 보여주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내 방에 들어온 직후의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단지, 날카로운 눈으로 나의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전의 세이시아와 다르다고 확실히 느낀 순간-아마도 전의 세이시아는 잠옷 차림을 남자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성격이 아니었나 보다-, 그는 표정을 풀며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지어 보였다.

뒤늦게서야 그걸 깨달은 나는 세리안이 나에 대해 눈치챘냐 눈치채지 못했냐에 대해 한참 고민하느라 날밤을 샜지만, 뭐, 그건 나중 일이고.

그 사건 후 우리 남매의 적대관계는 완화되는 듯 싶었다. 분명히 기억을 잃은 사람이 공작이 될 만한 능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고, 나는 공작위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있으며, 세리안이 기억을 잃은 세이시아-지금의 나-를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완벽한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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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뭐가 오산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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