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곤충은 아니라서 다행인듯. -->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기억은 조금 늦게 돌아와도 괜찮으니까, 지금은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게 좋다."
상냥하게 나에게 일러두는 아버지란 사람의 작위는 공작이라고 했다. 아버지, 공작. 묘한 느낌이었다. ……전생의 나에게 부친 따위는 없었다.
"약을 가져오라고 해 두었으니 일단 약을 마시고 푹 쉬렴."
어머니도 좋은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귀족간의 일부 일처에 남녀 구분 없는 장자 상속을 바탕으로 한 하르아이나 제국의 귀족 집안들은 대체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라고 하는데, 우리 집도 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했다. 아버지는 카센이라는 이름과 시렌느라는 성을 가진 현 공작으로 나이는 42살, 반듯한 이목구비에 상당히 호탕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남자였다. 반면에 어머니인 에리시 공작부인은 붉은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단아해 보이는 미녀였는데 처녀적 성은 라르시에라고 한다. 딸인 나에게는 상냥한 태도였지만 집안의 최강자로 군림하며 아버지를 쥐고 흔드는 것 하며, 의외로 그 이면에 격렬하면서도 냉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짐작된다. 예전의 세이시아는 아버지의 은발과 어머니의 푸른 눈을 닮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는 정반대로 아버지의 눈동자와 어머니의 머리카락 색을 비슷하게 따르게 되었으니, 색깔이 조금 바뀌었더라도 그들 입장에서 내가 딸로서 크게 어색하지는 않는 듯 했다.
간단한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나는 침대 양쪽의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버 레드의 머리카락에 로즈 빛깔의 보석같은 눈동자를 가진 가녀린 허리의 소녀는 척 봐도 장미꽃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꽃같아 보였다. (무슨 의미지?) 난 정말 꽃인가. 죽고 나서 하루 후이자, 새 몸을 얻고 몇 시간 후, 정체성의 고민에 딱 부딪친 나는 혼란스러워했다.
이런 게 바로 꽃으로서의 인생, 이라는 걸까? 그냥 머리색이 꽃색인 것 뿐이잖아. 대체 어딜 봐서 내가 꽃의 정령여왕이라는 거야? 내가 인간인 줄 알았을 때와 다른 게 없는걸.
그 때,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 밖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세이시아님의 약입니다."
세이시아의 약? 세이시아라면 난데. 내가 열어줘야 하는 건가.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다가 일어서야 하나 고민하며 그 쪽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지만, 어머니는 자연스레 명령어투로 말했다.
"들어와."
그, 그런 거로구나. 들어오라고 말해야 하는 거구나. 아무래도 지배계층에 익숙하지 않은 게 자꾸 헷갈리네. 하긴, 오늘 갑자기 몸이 바뀐 거니까.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온 사람은 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올린 내 나이 또래의 소녀였는데 아까 보았던 흰 블라우스와 남색 치마, 에이프런을 하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이 여자애도 메이드인 것 같았는데 처음에 보았던 젊은 메이드보다 더 어려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쟁반을 들고 내 침대 옆 탁상에 내려놓으며 공손하게 손을 모아 섰다. 나는 단정하고 절도 있는 그 메이드의 행동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세이시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그녀가 가져온 컵에 담긴 액체를 들어 나에게 권했다.
"치료사의 말에 따르면 외상은 다 나았다고 하지만 아직 일주일간은 더 침대에 누워 요양해야 한단다. 이건 회복을 좀 더 빠르게 해 주는 약이니까 매일 마시렴."
나는 아버지인 시렌느 공작의 말에 멍하니 컵을 들고 들이켰다. 연녹색 액체는 무슨 풀 우린 떫은맛에 약간 달달한 맛이 섞여 있었다.
"다이란……?"
생각없이 마시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 단어를 스스로 중얼거리고는 내가 한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하지만 아버지는 뭔가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래, 피로회복제에 쓰는 다이란 차란다. 이제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하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벌써부터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건 무리인가, 조금 실망스럽게 아버지는 중얼거리고 오늘은 이만 쉬라면서 어머니와 함께 방에서 나갔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다이란이라고 말했던가?
***
다음 날, 잠에서 깨자마자 왠지 집안이 시끄러웠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아침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가 올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새로운 세계의 신비로움을 체험해야 하는 사명을 타고 다시 태어났으나 또다시 침대에 누워 요양해야 할 처지의 나에게 어제 보았던 시녀가 살짝 다가와서 가만히 그 내용을 전해주었다.
내 오빠가 온다더라.
"오빠라니?"
깨어난 지 이틀째라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시녀에게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는 반말-처음에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존댓말을 썼더니 시녀 쪽에서 기겁하더라-로 물어 보았다.
왜 오빠란 사람은 여동생인 세이시아가 깨어나자마자 오지 않았을까? 저택이 얼마나 넓길래……. 그런 의문을 가진 나에게 시녀는 내 질문에 상세히 답해 주었다.
"네, 세이시아님보다는 여섯 살 위이니 지금은 23살이시지요. 세리안 님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빠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여행을 떠나 있었다고 한다. 아래에 동생이 나밖에 없고, 위에 형이나 누나가 없으니 지금은 세리안이 장자였다. 분명 그가 나중에 이 집안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후계자로서 충분한 카리스마와 명석한 두뇌에 능력까지 출중하고, 집안에서는 거의 내 오빠가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시녀는 아직 공식적인 후계 발표는 없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어째서지?
"그런데 그런 거 말고, 내 오빠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예를 들면 나에게 대하는 태도라던지, 외모라던지, 성격 같은 것을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었지만 시녀가 마치 위인이나 정치인에 대해 설명하듯 영 딴소리만 해대자 의아함을 느낀 내가 콕 집어서 물어보았다. 그 시녀는 약간 당황하는 듯 싶더니 무언가를 숨기는 표정으로 어설프게 말했다.
"아, 세, 세리안 님께서는 주인마님을 닮으셔서 매우 선이 곱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으세요. 하지만 얼굴 이외에는 모두 주인어른을 닮아서 은빛 머리에 보석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계시답니다. 키도 크시고, 남자답고 믿음직스럽고, 굉장히 잘생기셨어요."
은발은 이집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유전인듯 하다. 지금은 은발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붉은 은빛이지만 일단 나도 은발이고, 내 오빠라는 사람도 은발이니까.
"그리고 성격은 어때? 나랑 친했어?"
전생에 오빠가 없었던 나로서는 그 점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세이시아와 친한가 친하지 않은가 묻고싶었지만 그 시녀가 상당히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돌리려는 노력이 눈에 훤히 보였기에,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말았다.
이거 곤란한데. 내가 세이시아가 아니니 전의 일을 알 리가 있나. 하지만 오빠와 사이가 나쁘다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 세이시아의 부모님은 친절하고 좋은 사람 같아 보였는데…….
===
앞부분을 조금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전 리메이크가 되어있었습니다;;;
댓글과 추천을 지우기가 너무 아까웠지만ㅠㅠ 편수조정을 위해 세 편 삭제.
일단 앞부분은 다 고쳐놨고 달라진 부분 투성이니 프롥부터 다시 읽으시는거 추천.
고친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시아의 과거는 평범했다→불행했다.
시아의 오빠는 처음부터 친절했다→처음부터 친절하면 재미없징.
시아가 꽃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진다→그냥 처음부터 말해두기.
능력도 천천히 나온다→초반부터 능력 등장.
시아는 평범한 여고생 성격→평범해 보이진 않는데;;
아이스 젤리 먹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