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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2화 (2/226)

<-- 1. 곤충은 아니라서 다행인듯. -->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직도 손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하하, 그렇지. 말도 안 되지. 몸이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세상에 그런 악몽도 악몽이 없을 거다.

어느 날 내가 칼에 찔려 죽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남자가 나타나 '넌 정령왕임ㅎㅎ', 이러면서 내 영혼을 끌고가 벌레 몸 속에 집어넣는다는 그런 끔찍한 악몽이라니. 요즘 내가 스토커한테 신경을 덜 써서 하느님이 생의 소중함을 알려주시려고 하셨나 보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름한 낡은 벽지와 얇은 이불이 아니라 단정하고 깨끗한 하얀 벽지와 붉은 캐노피가 달린 푹신한 실크 침대가 보였다.

"……."

아직 꿈인가?

나는 멍한 머리를 뒤흔들며 빨리 현실로의 귀환을 스스로에게 명했다.

깨어나라. 빨리 깨야 학교 가야지. 아니지, 전의 학교에선 성추행 사건으로 퇴학당했던가? 그럼 다른 학교를 또 알아봐야 하나……. 서둘러야 하는데. 왼손으로 뺨을 짝짝 때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꿈 한번 완전 리얼하네. 간지러울 정도로 푹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라니. 이런 이불은 생전의 나로서는 책에서 본 것 이외엔 구경도 못 해봤다.

너무 신기해서 이불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왕 호화로운 꿈을 꾸는거 조금 더 구경하고 깨자는 생각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마치 시체처럼 창백한 발이 보였다. 나는 조금 의아했다. 잘 손질된 발톱에 진주같은 희고 투명한 피부라니. 꿈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하지만 인형처럼 생긴 그 발은 역시 인형처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침대 밑의 붉은 융단에 발이 닿자마자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침대에서 떨어지자 온 몸에 격통이 느껴졌다.

아앍!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꿈인데 왜 이렇게 아파? 신음을 흘리던 도중 나는 내 목에서 나는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의 목소리와 달리 미묘하게 톤이 높고 맑은 목소리였다.

설마, 그 꿈…….

나는 너무나 현실감이 강렬한 방 안 풍경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마치 중세의 귀족의 방이 이랬을까. 붉은 색과 자주색 계열의 호화로운 장식이 침대와 가구들에 가득 달려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거울. 침대 옆에도 거울. 벽에도 전신 거울. 비스듬하게 세워진 전신 거울. 이동용 반신 거울. 아름다운 금테와 보석으로 장식된 유리거울이 방 안에 다섯 개는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머릿속에 곤충이 된 내 모습이 떠올랐다.

"고, 곤충만은 안돼……. 제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방 한켠에 놓여있던 전신 거울을 본 나는 환호했다. 곤충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야 할 몸, 그러니까 이젠 내 몸이 된 사람은 다행히도 내 나이 또래의 여자였다. 바닥에 거의 엎드려 있는 여자는 살랑거리는 흰 실크 원피스 잠옷 차림이었는데 이전까지의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가장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비단실과 같은 웨이브진 풍성한 머리카락이다. 은빛을 띠고 있는 그 머리타래의 색은 은 같기도 하고, 백금 같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붉은 기를 살짝 띠고 있는 은이랄까, 전체적으로 실버에 발그스름한 기가 물들어 있어 반사광이 없었다면 밝은 핑크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염색으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색이다. 초승달 같은 가지런한 눈썹이라던가 길게 늘어져 있는 속눈썹, 허벅지까지 닿는 머리카락과 똑같은 붉은빛 도는 은색이었다.

겨우 설 수 있을 만큼의 감각이 다리에 되돌아오자 그대로 전신거울 앞에서 일어서 보았다. 머리카락은 허리 아래까지 닿았다. 조금씩 구불거리며 부드럽게 말려 있는 머리였기에 스트레이트로 펴면 더 길게 나올 것이다.

놀란 듯이 크게 떠진 눈동자 역시 순수 한국인에게선 나올 수 없는 적색이었다. 장미꽃 색깔같기도 하고 루비 같기도 한 투명한 붉은색. 그런 거울 속의 여자는 특이한 색소와는 전혀 상관없이 희고 깨끗한 피부의 미소녀였다. 아까 보았던 작은 발처럼, 완벽히 다듬어진 외모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160cm가량 되는 여자로서 적당한 키에 조금 큰 듯한 가슴, 가녀리고 나긋나긋한 허리.

이게, 나……?

아니, 벌레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이건 뭐랄까 그 좀 야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이봐, 백발 남자 당신.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런 몸에 집어넣은 거야!

평범한 얼굴로도 남자가 왕창 꼬였는데, 이 외모면 더 심할지도 모른다.

일단 그 남자의 말대로 내가 다른 세계에 온 것은 확실해보였다. 그리고 인간처럼 생긴 생물의 몸에 들어온 것도 맞다. 문제는 내가 들어있는 몸의 원래 주인이 여기서 뭐였냐는 거지. 분명 그는 '다른 생물의 몸에 넣는다'라고 했었다. 갓난아기가 아닌 걸로 보아 환생한 것은 아닌듯한데, 그럼 결론은 한 가지. 살아있던 인간의 육체에 들어온 것이다.

멍하니 거울 앞에서 넋을 놓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그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긴장해서 기다리는 나에게 보인 첫 번째 사람은 여자였다. 그녀는 일명 메이드복이라 불리는 남색 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입고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내가 처음 보는 복장에 당황하기도 전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쟁반을 떨어뜨려 버렸다. 그 바람에 나도 놀라버렸다.

"세, 세이시아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세이시아, 라니. 그게 내 이름인가? 내 한국이름 채시아와 비슷한 어감이었다. 같은 것은 뒤의 두 글자뿐이지만. 뒤이어 그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한 말이 한국어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떻게 내가 듣도보도 못한 외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지?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방에 또 다른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닮은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서양인 같기도 하고 혼혈 같기도 한, 처음 보는 인종. 검은 머리가 눈에 익은 나에게 약간은 어색하게 다가오는 그의 은발은, 내가 죽기 전에 봤던 남자의 백발과 비슷한 밝은 색이었기에 나는 순간 그를 그 남자로 착각할 뻔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목소리가 확연히 달랐으니까.

"시아, 시아! 깨어났구나! 어디 몸은 괜찮은 거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자리에 눕거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잘생긴 얼굴에 태양처럼 환한 미소를 띠고 자신을 반기는 남자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하지만 곧장 그 남자가 부르는 것은 내 몸의 주인 세이시아의 애칭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름이 비슷하니까, 내 이름을 격하게 불러주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름은 분명 나를 뜻하는 이름이 아닐텐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특이한 복식에 큰 키를 가지고 있는 40대 남자였는데,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양 팔을 활짝 벌리고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흐걱, 하고 강한 팔힘에 숨을 삼키며, 나는 그런 남자의 행동에 한 가지밖에 할 말이 없었다.

"누, 누구세요?"

일단,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하는 계획이고 자시고 당신 정체부터 좀 알자.

***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기억이……, 없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거든요. 내 기억은 멀쩡한데 댁 누구냐고.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 남자는 내 한마디로 나를 기억상실증이라고 완전히 착각해 버렸다. 하지만 그다지 절망하는 표정은 아닌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실 이 몸의 원주인은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수분간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더라. 원인은 낙마. 잠깐, 그럼 얜 진짜 죽은 거잖아?

"나는, 카센 시렌느. 네 아버지란다, 시아. ……기억나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딸내미-이미 죽었으니 멀쩡한 건 아니겠지만서도-몸에 웬 다른 여자가 들어가 있다는 이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도 내가 죽은 직후의 몸에 들어오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이 남자-내 몸의 아버지라고 했다-야 내가 당연히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났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겠지. 심장이 완전히 멈춰 있던 기간이 꽤 되었기에 완전히 백치가 되거나, 살아나더라도 미치거나. 그런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록 기억은 조금 잃었지만 딸이 제대로 살아났으니 정말 천만다행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딸이 아니라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몸의 원래 주인은 은발의 직모에 푸른 눈을 가진 세이시아라는 17살의 여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귀족. 신분제 사회의 단어를 처음 접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귀족이라구? 랄까 신분 문제는 그렇다 쳐도 분명 내가 아까 본 모습은 곱슬거리는 핑크빛 도는 붉은 은발에 장밋빛의 눈동자였잖아. 이 남자와 닮은 부분은 별로 없었다.

이 방의 구석에 걸려있던, 저택에 단 한장 남아있는 그녀의 초상화를 보자면 이목구비도 좀 어려진 것 같고 머리색과 눈 색도 바뀌었다. 체격과 외모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로 다르다면 혹여나 내가 딸이 아닌 건 아닌지 의심할 만도 한데?

분홍빛 머리에 붉은 눈이라니.

백발 남자의 거울같은 푸른 눈동자에 아련히 비치던 붉은기가 내 영혼의 머리색과 눈 색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의 말, 정말이었잖아?! 나는 한국인으로, 붉은기가 약간 도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영혼은 꽃의 정령왕인 플로라의 모습-그 남자 말로는-이기 때문에 당연히 붉은 계열의 머리색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고 긴 그 남자의 설명 중에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번 대의 꽃의 정령여왕은 붉은 장미구나, 하고.

그 백발 남자의 말로 추정해본 바, 지금 나는 인간의 몸에 정령왕의 영혼이 들어와 있으니 외모에 약간의 변형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은 처음에만 약간 의아해했을 뿐, 심하게 다친 나를 치료할 때 마법을 사용했는데, 그 마법이 과도하거나 뒤틀릴 경우 신체성향을 바꾸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가 10만번중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마법사의 애매한 변명에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내가 떨어진 곳은 중세의 신분제 사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이 어쩌니 운운한 걸로 봤을 때 적어도 여긴 지구와 가까운 곳은 아니다.

다행히 이 여자는 귀족이라고 하니, 그녀의 행세를 하면서 저택에서 놀고먹고 있으면 정령으로서 성장을 끝내고 정령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채시아였을 때의 삶이 바로 어제 일-실제로도 어제 일이다-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어 현실감은 없었다. 하지만 뭐 어때. 내게 남은 건 편한 인생이었다. 어찌보면 행운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그래도 근본적인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 그 꼴로 죽었는데,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곤충의 몸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인생목표를 정했다. 내 몸이 죽기 전에 그 남자를 반드시 찾아서, 혹시나 내 육체가 또다시 죽더라도 곤충의 몸에 다시 집어넣지 않겠다는 약속을 꼭 받아내는 것을 나는 가장 처음 할 일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로 정했다. 다음 일은 그 남자를 다시 만나고 난 후였다. 그는 내게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내 앞에서 곤충의 얘기를 한 이상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도와주러 온다고 했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난 그 남자의 이름을 몰랐다! 분명 가르쳐주는 걸 까먹은 게 틀림없어; 이름을 알아야 그를 부르든 뭐든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일단 그 남자도 이 세계에 있는 것은 맞는 듯 하다. 찾으려면야 못 찾을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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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목표를 세우다. 주인공은 어른스럽고 낙천적인 성격이라는 설정.(바뀔수도 ㄷㄷ)

최대한 안 어색하게 하려고 초반 도입부분은 수정에 수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첨 쓰는거라 잘 안되는군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은 부분은 언제든 지적부탁드려요!

p.s. ㅋㅋㅋㅋ 수정했습니다. 시아의 이전 모습이 직모였거든요 ㄷㄷ;; 군데군데 예전 글의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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