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두 사람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했다. 항상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을 만큼 붙어 있다시피 하다가 이리 떨어져 보니, 서로의 일상을 대화로 공유하는 새로운 재미가 생겼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빠르게 흘러가는 소중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시몬.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해 줄게.”
“제가 제국의 기밀이라도 빼 가려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런 대답을 하십니까.”
“그런 표정으로 물어보면 얼마든지 내줄 것 같은데.”
플로라는 시몬과 처음 성에 와 나눴던 대화들을 상기하며 짧게 웃었다. 시몬도 마찬가지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 어딘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예쁜아.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어느새 플로라의 옆자리로 옮겨 온 시몬이 찰랑거리는 플로라의 은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가까운 거리, 다정한 눈빛에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이걸 대놓고 물어 봐야 할지, 말지 망설이던 플로라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궁금해. 꼭 들어야 널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아.”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 못 가는 건가요?”
플로라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시몬은 ‘그걸 원한다면.’하고 빙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시몬. 정말 별거 아니었어요. 바보 같은 질문을 할 뻔했어요.”
“그래서 끝까지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야? 궁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은데.”
괜히 말을 꺼냈다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시몬의 속마음이 궁금하기도 했다.
‘황제 폐하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아…… 그, 네. 맞아요.’
‘폐하도 같은 마음이신가?’
‘네, 아마도요…….’
‘폐하의 마음에 확신이 없다면, 네 감정은 접는 게 좋을 거야.’
‘…….’
‘널 위해 하는 말이다. 이레나.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짝을 찾아야만 해.’
애정이 담긴 눈빛과 말투, 그리고 배려가 묻어나는 행동 하나하나만 봐도 시몬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뻔히 알면서…… 자꾸 아버지의 말이 은연중에 떠올라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저는 시몬이 좋아요. 진심을 다해 좋아하고 있어요. 어쩌면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용기 내어 한 말에 시몬이 멍한 얼굴을 했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뛰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플로라, 나도 같은 마음이야.”
“…….”
“혹시 내가 무언가 불안하게 했나? 잘못한 거라도 있어? 나쁜 소문을 들었다든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은 그다지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몬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막상 제 곁에 섰을 때 소문에 휩싸여 고통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아주 오래전에 칸나 영애도 그런 추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었으니까. 아무리 계약 관계라 한들 자신이 꼭두각시 취급을 받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던 적이 있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벌써 플로라에게 나쁜 소문이 퍼져 나갔을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몬이 플로라를 유심히 살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그저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여쭤보셨던 적이 있어서요.”
시몬은 일차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방향이 흘러가지 않아 안도했다. 플로라가 불순한 소문에 휘둘려 상처받게 된다면, 자신은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으로 인해 플로라가 아프지 않을 수 있도록, 앞으로는 더더욱 처신을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궁금했던 거야?”
“시몬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이미 아버지께도 확신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직접 듣고 싶어서…….”
“난 플로라를 사랑하고 있어.”
“…….”
“전에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널 옆에 두었다면, 이제는 내가 행복한 것보다 플로라의 행복이 더 중요해졌을 만큼. 플로라가 행복할 일들을 해 주고 싶어. 네가 행복하다면 내가 불행해지는 일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
시몬이 살며시 플로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반사적으로 시몬을 받쳐 마주 안은 플로라가 망설이다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촉이 좋았다.
“저도…… 저도 시몬의 행복이 중요해요. 시몬의 불행 대신 얻을 행복이 있다면 저 역시 기꺼이 포기할 거예요.”
시몬이 살짝 고개를 들어 플로라를 보았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다. 평생 이렇게 붙어 있고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체취를 맡으며 품에 안겨 있으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어서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시몬은 플로라의 앞날을 위해 일단은 한 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곁에 낚아채 두고 싶었다. 혹여라도 플로라가 다른 마음이 생기기 전에.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제국의 황후가 되어도 힘들지 않을 수 있도록. 그녀가 준비될 때까지 자신 또한 이 성과 제국의 일들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저,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 시몬.”
“응?”
“열심히 수업받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시몬에게 걸맞은 짝이 될 거예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플로라는 이리 예쁜 이야기만 골라서 한다. 시몬이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난 뒤 그녀의 얼굴을 살피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것이 보였다.
담담한 척하면서도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의 행복은 우선이지만, 그 행복이 제 옆에서 이루어진다면 좋겠다. 역시 너무 사랑스러워서 놓아주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시몬은 하루라도 빨리 플로라와 리비에르를 꾀어 제 곁에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하지만 시몬의 원대한 계획 같은 건 역시 리비에르 앞에선 통하지 않았다.
“안 됩니다.”
“……뭘?”
애꿎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리비에르의 눈치만 보고 있던 시몬이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화들짝 놀라며 눈을 꿈뻑거렸다. 리비에르는 어린 시몬을 혼낼 때처럼 아주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을 보니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 것 같아서요.”
“그래서 듣지도 않고 안 된다고? 너무하는 것 아닌가. 아니,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아이입니다. 지금 폐하의 곁에선 상처만 받을 거예요.”
리비에르는 시몬이 하고자 했던 말을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시몬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축 처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나도 알아. 그냥…….”
“그렇게 좋으십니까.”
“……응. 그렇게 좋아.”
“아무리 제가 편해도 이레나의 아버지인데.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그런가. 시몬이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뺨을 긁적거리며 리비에르의 눈치를 살피기만 하자, 리비에르가 결국 무뚝뚝했던 표정을 부드러이 풀며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두 사람의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그 마음 변치 않으셔야 할 겁니다.”
“그럴 일은 없어.”
시몬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감정이 단순히 생겨난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까지 하고 플로라를 데려오기 위해 센칸으로 향했다. 이미 플로라를 구하기 위해 센칸으로 떠났을 때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는 거였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 플로라가 곁에 없다는 걸 깨닫고 느낀 상실감은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플로라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많은 마음을 주었는지 깨닫게 된 계기였기에 그는 이제 제 마음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확신을 주지 못했다면 아마 그것 또한 자신의 잘못임이 분명했다.
리비에르에게도 확실히 말하고 싶었다.
그럴 일은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자 리비에르의 눈빛이 살짝 부드럽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럼 다행입니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제 마음이 얼마만큼 크고 넓은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리비에르 경.”
“……안 됩니다.”
“이번에는 그래도 말할래.”
“슬슬 마탑으로 돌아가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리비에르가 귓등으로 들은 체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몬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자, 옅게 웃은 리비에르가 뒤를 돌아 황제를 향해 말했다.
“조만간 식사 자리를 마련할까 하는데…… 폐하,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시몬은 고민할 것도 없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