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51)화 (151/154)

151.

이제 이곳이 자신이 머물 공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플로라는 앞으로 함께할 하녀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자신의 사람이 될 엘라와 마리네드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을 건네고 나니, 자연스레 이 하네칸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났다.

사실은 사람이 그리웠던 그때, 성의 하녀인 줄로만 알았던 루가르에게 많이 의지했었다. 그녀와의 추억들이 떠오르자, 루가르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못 본 사이인 것처럼 애틋하게 느껴졌다.

“나와 잠시 티타임을 가지자꾸나.”

“네. 아버지.”

“먼저 내려가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내려오거라.”

리비에르와 집사 데인이 사라지자, 플로라의 하녀들이 눈을 반짝이며 채비를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그 대답을 후회했다.

“이레나 아가씨는 어떤 드레스가 마음에 드세요?”

“헤어는 어떻게 치장해드릴까요?”

“헤어핀을 꽂을 건데 이게 예쁠까요? 이건 어떠세요?”

“구두는 이 색상이 어울릴 것 같은데, 아가씨 생각은 어떠세요?”

“아가씨는 머리칼이 너무 아름다우세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차별 화살 공격을 받을 때에도 이 정도로 정신없진 않았다. 머리를 치장하는 동안에도 내일은 이 드레스, 오후에는 이 옷, 저 옷을 입히겠다며 열정 가득한 모습을 보여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엘라. 마리네드.”

“네? 아가씨.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말씀만 해 주세요!”

“아니야. 불편한 곳 없어. 예쁘게 치장해 줘서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너무 마음에 들어.”

“어쩜 우리 아가씨는, 마음씨도 고우시지!”

하지만 그들에게 무어라 더 말할 순 없었다. 얼마나 공들여 자신을 도와준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열정에 며칠 장단을 맞춰 주다 슬슬 지쳐갈 무렵 나중에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 보아야겠다 마음먹었다.

채비를 마치고 응접실로 향했을 때는 이미 티를 마실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화려한 꽃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찻잔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리비에르가 직접 차를 우리겠다고 하인과 하녀들을 모두 물렸으므로 응접실 안에는 단둘만 남게 되었다.

“이레나. 그렇게 입고 있으니…… 아름답구나.”

리비에르가 옅게 웃으며 플로라를 보았다. 옆 머리에는 큐빅이 박힌 일자 핀이 꽂혀 있었고 긴 머리는 하나로 묶어 깔끔하게 정리했다. 연하늘 빛이 살짝 감도는 실크 드레스는 화려하지 않아 더 깔끔해 보였고, 플로라의 하얗고 매끈한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작은 아이에서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아쉬움이 문득 생겨났으나, 그것만큼은 과한 욕심이란 걸 잘 알았다.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려 보면 지금은 무척 행복했다. 

“아직 적응은 잘 되지 않네요…….”

플로라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첩자 생활을 할 때 종종 입어 보긴 했지만, 그때도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이란 걸 잘 알아서 언제나 불편하게만 느껴졌었다. 평상시에는 거의 훈련복 또는 단복을 입고 생활했으니 적응이 되긴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플로라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와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머리로는 빠르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어떤 불평도 없었다.

“천천히 하자꾸나.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따뜻하게 말해 주는 아버지에게 고마웠다.

“저는…… 근위대로 복귀할 수는 없겠죠?”

“그것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구나.”

“네.”

“나는 더 이상 칼을 들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게 네가 진정하고 싶은 일이라면 말릴 수 없겠지.”

“…….”

“다만 지금 이 생활을 익숙하게 여길 필요가 있어. 너를 위해서도, 또 폐하를 위해서도 말이야. 서로의 마음에 확신이 있고, 서로 혼기도 꽉 찼으니 가벼운 연애 감정은 아닐 테지?”

“아버지, 아직 거기까지는…….”

“그래.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말은 섣부르다는 거 안다. 그래도 넌 이제 탈란 공작가의 장녀로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될 거야. 사실도 아닌 억측으로 널 깎아내리려는 세력들도 분명 생길 테고. 네 스스로가 떳떳해지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한단다.”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 공작가의 힘이 중요하다는 걸 플로라도 알았다.

칸나 영애를 보며 부러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떨까 헛된 망상을 했었다. 단순히 시몬의 옆에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었지 황제의 곁에 선다는 게 어떤 무게를 지니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진정으로 그와 마음을 나누고 보니, 그 이외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폐하의 짝은 당연히 칸나 영애 아니겠어?’하고 읊어 댔던 것처럼, 칸나 영애를 떠올려 보면 자신은 시몬에게 아직 한참이나 부족한 사람인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공작가의 장녀가 된 지금이라면. 노력하면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동안은 나와 데인이 집안의 모든 일들을 관리해 왔지만, 앞으로는 이레나 네게 조금씩 권한을 넘겨주려 한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플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제가요?”

“그래.”

막상 길이 열리니 망설이게 된다. 검을 쥐는 일, 상대를 꾀어내어 정보를 빼내는 일 외에는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플로라가 선뜻 하겠다고 대답하지 못하자, 리비에르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실수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말했잖니. 천천히 하자고. 교육부터 천천히 시작하마.”

플로라는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새로운 출발점 위에 놓인 기분이었다.

* * *

플로라가 시몬을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 후였다.

“이레나 영애. 어서 와요.”

“……아, 하네칸의 태양을 뵙습니다.”

플로라를 마중 나와 에스코트까지 해주는 시몬의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다. 온화한 말투와 다정한 눈빛, 정중한 태도에 넋을 놓을 뻔했으나 플로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주일이나마 배웠던 얕은 예법으로 시몬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시몬이 여유롭게 웃으며 플로라의 손을 잡았다.

“보고 싶었어.”

그가 살짝 상체를 굽혀 플로라에게 말했다. 작게 속살거리는 소리에 지금까지 격식을 차린 것은 제게 장난을 쳤던 것임을 깨달았다. 플로라가 시몬을 살짝 올려다보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오늘 참 예쁘다는 말을 건넸다.

플로라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이런 모습으로, 또 탈란 공작가의 장녀 이레나 탈란으로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던 터라 시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일주일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크게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만나고 나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마음이 떠오르며 감정이 더 깊어져 가는 것 같았다.

“……저도요, 시몬.”

일주일 동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던 집의 구조에 익숙해졌고, 교육을 받는 것도 생각보다 즐거웠다. 공작가에서 지불해야 할 큰 금액은 데인 또는 리비에르와 상의를 했지만 작은 일들은 플로라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일을 도맡았다. 그것마저도 종종 데인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 스스로도 열의를 가지고 공부하려고 하다 보니 나름의 재미를 느꼈다.

“너무 보고 싶었는데, 한창 정신 없을까 봐 참았어.”

시몬은 시종일관 플로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플로라가 눈을 깜빡이다가 주변에 서 있는 근위대 기사들과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더 참아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고.”

두 사람의 뒤에는 이젤과 루가르, 그리고 선배 기사들이 있었고, 앞으로는 에르네가 듬직하게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이들이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위치라 하더라도 아직 플로라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플로라 자신이 근위대에 있을 때에도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던 터라, 지금 이들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합리화해 보다가도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이들이니 좀 다르게 받아들일지도 모를 것 같다고 또다시 수줍어했다.

실제로 이들을 뒤따르고 있던 루가르와 이젤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자신들이 연애를 하는 것마냥 괜히 간질거려 했다.

플로라가 괜스레 아랫입술을 꾹 물며 시몬과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싣자, 그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났다. 응접실에 도착해 모두가 물러갔을 때가 되어서야 플로라는 숨통이 조금 트였다. 준비해 준 차를 호로록 마시며 마음을 진정하고 있자,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시몬이 말했다.

“플로라, 공작가에서는 무얼 하며 지냈어? 리비에르에게 물어봤더니, 통 대답을 안 해 주더라고.”

시몬이 불편한 듯 미간을 좁혔다. 플로라는 그동안 자신이 공부하고,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시몬과 나눴다. 그의 곁에 서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알려 주고 싶어서. 한참 이어지는 말을 차분히 들어 주던 시몬은 눈을 접어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