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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50)화 (150/154)

150.

“플로라 님, 정말 공작가로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럼 이제 더 이상 근위대에서 뵐 수 없는 건가요?”

어느덧 그녀가 공작가로 들어가는 날이 되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루가르가 플로라의 방으로 방문해 조심스레 물어왔다. 플로라는 짐 정리를 하던 것을 멈추고 그렇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플로라 님께서 리비에르 공작님의 잃어버린 수양딸이었다고 하니, 근위대가 발칵 뒤집혔지 뭐예요.”

“……다들 많이 놀라시던가요?”

“그럼요!”

이해하는 바였다.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이레나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마도 이젠 그 이름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 듯했다. 리비에르에게 듣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듣는 건 아직 제 이름 같지 않고 어색했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가르가 이름을 곱씹듯 ‘이레나 님’하고 여러 번 반복해서 그녀를 불렀다.

“저, 그럼 자주 뵙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플로라가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건 루가르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동료를, 친구를 자주 보지 못한다는 게 슬플 뿐이었다. 플로라도 루가르가 그렇게 눈치만 보고 있지 않아 주어 고마웠다.

“자주 놀러 올게요. 루가르 님도 자주 놀러 오세요.”

“……아, 초대, 초대해 주시는 건가요?”

루가르가 눈을 반짝였다.

“물론이죠. 루가르 님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신다면요.”

“전, 너무 좋아요!”

“자주 초대하더라도 질려 하시면 안 돼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말동무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가르의 도움을 받아 짐 정리를 마치고, 숙소를 빠져나오자 뭔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영영 하네칸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뭔가 허전하고 마음 한구석이 침울해지는 것 같았다.

숙소 밖에 공작가에서 준비해 준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플로라가 짐을 들고나오자, 마부가 익숙한 듯 플로라의 짐을 받아 들어 챙겼다. 마차 앞에 서 있던 리비에르가 플로라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가까이 왔다.

“이레나.”

“……아버지.”

“같이 가려고 오늘은 일찍 나왔어.”

리비에르는 사람 좋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다가, 마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 잔소리를 해 대던 소피를 떠올렸다.

‘이런 놈팡이 같으니라고. 당신이 또 이럴 줄 알았어.’

되찾은 딸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날이라고 했어도, 소피의 마음을 풀긴 어려웠다. 이미 잃어버린 딸을 찾겠다고 마탑을 떠나길 수십 년이었다. 그동안 과도한 업무에 치여 소피는 고통받았다. 더 이상 리비에르가 놈팡이 짓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이를 갈았다. 

물론 진심은 아니란 걸 알았다. 이곳에 처음 돌아왔을 때도 소피는 리비에르를 ‘놈팡이’라 부르며 자신의 일까지 모두 다 하라고 했는데, 일을 몰아준 것은 고작 며칠 되지 않았으니까.

“가자꾸나.”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가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뭔가 이렇게 떠나 버린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다신 오지 못할 곳이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허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에르네 단장님도, 에반 부단장님도, 이젤 경도, 또 자신을 도와주던 선배들도 보고 싶었다.

“조만간 또 들를게요. 모두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럴게요.”

루가르와 인사를 마치고, 플로라는 마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또 누군가 작별인사를 나눌 사람은 없는지 살폈지만 낯이 익은 사람은 없었다. 플로라가 아쉽다는 듯한 얼굴을 하자, 그녀를 물끄러미 살펴보던 리비에르가 말했다.

“페하께서는 오늘도 재판이 있다고 하시더군.”

“네? 아, 네…….”

꼭 낯이 익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시몬이 아니어도 됐다. 네이라여도 됐고, 카신이어도, 이든이어도 모두 반갑게 맞았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괜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황제 폐하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아…… 그, 네. 맞아요.”

어쩔 줄 몰라 하긴 했지만 마음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폐하도 같은 마음이신가?”

“네, 아마도요…….”

플로라의 대답에 리비에르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마음에 확신이 없다면, 네 감정은 접는 게 좋을 거야.”

“…….”

“널 위해 하는 말이다. 이레나.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짝을 찾아야만 해.”

플로라는 단번에 리비에르의 걱정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시몬과 함께 했던 산책을 떠올렸다.

‘나에게도 널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

‘…….’

‘우린 서로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잖아.’

그가 보여 주었던 마음은 분명 착각은 아니었다.

‘플로라가 끝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내가 찾아갈게.’

시몬을 떠올리자, 그때의 설렘이 다시 가슴 속에 찾아드는 것 같았다. 혼자만의 감정은 결코 아니리라. 시몬에게 직접적으로 물은 적은 없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가벼운 감정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라고, 플로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폐하께서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아버지. 폐하께서 직접적으로 제게 말씀하시진 않았어도 나누는 대화, 제게 보여 주시는 행동과 눈빛 전부…… 저와 같은 마음이란 것을 느끼게 해 주고 계세요. 저, 행복해요.”

“…….”

“만약 제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아버지.”

시몬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건 맞지만, 그저 가벼운 연애로 생각하고 있다면?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금껏 보여 준 시몬의 행동은 그런 생각을 아예 차치해 버리게끔 했으니까. 그래서 리비에르의 질문에 플로라는 허를 찔린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하기야, 나도 오래 폐하를 알아 왔으니…… 그런 분이 아니란 건 안다.”

“…….”

“그래도 그분이 애정 관계에는 어떨지 확인한 적이 없어서, 노파심에 해 본 말이란다. 아무리 폐하여도 내 새끼 눈에 눈물 나게 하는 건 못 참을 것 같거든.”

리비에르가 코를 찡긋거렸다. 갑자기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카신이 자신의 저택에 자주 놀러 오던 시절, 리비에르는 분명 그 어린 카신 공작을 싫어했다. 플로라가 그를 좋아했었으니까. 예전에는 왜 카신에게만 그토록 엄격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크고 보니 이제 알겠다. 분명 아버지로서의 질투였다.

그랬던 아버지와 남녀의 애정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약간은 서먹하게 남아 있던 감정이 조금 더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든든한 내 편이 한 명 더 생겼다는 기분은 이루 설명할 수가 없었다.

* * *

탈란 공작가의 저택은 언제 보아도 완벽했다. 리비에르가 오기 전에는 음침하고 어둡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외관도 어느 정도 깨끗하게 정리된 채였고 정원도 아름답게 가꿔져 있어 싱그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대저택의 모든 고용인들이 리비에르와 이레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레나 아가씨.”

이제는 이레나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마주해야 했다. 플로라는 줄지어 선 채 자신에게 인사하는 고용인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눈인사를 했다. 모두가 자신을 갑작스레 나타난 불청객 취급하지 않고, 정말로 반갑고 기쁘다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저택에 들어선 리비에르, 그리고 저택의 집사와 함께 자신이 앞으로 사용할 방을 소개받았다. 그녀의 방은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차근차근 네가 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시 이 저택에서 널 볼 수 있다니 감격스럽구나.”

“저도 이곳에 오게 되어 행복해요. 아버지.”

“혹시라도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꾸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요청하거라. 앞으로 이 저택에서 이레나, 내 딸이 하지 못할 일은 없어.”

아버지의 당부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타이밍 좋게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플로라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방 크기에 한 번 놀랐고, 정말 공들여 꾸몄다 싶은 모습에 두 번 놀랐다.

“리비에르 공작님께서 매일 확인하시고 저희에게 직접 지시를 내려 주셨습니다. 부디 아가씨의 마음에 드셨길 바랍니다.”

“그럼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의 말에 플로라는 방 안에서 눈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밋밋하지 않도록 화려한 문양으로 몰딩이 되어 있는 벽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온통 하얗게 꾸며졌음에도 곳곳에 알록달록한 꽃과 레이스로 장식이 되어 있다 보니, 단조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직접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는 사실이 가슴 한구석을 찡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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