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이브니에는 단단히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카신 단장님은…… 그래, 카신은 달랐다.
이브니에는 카신을 떠올리며 괜스레 떨리는 마음을 억눌렀다.
인간이 참 웃기다. 어차피 플로라와 카신 단장님이 이루어질 관계가 아니란 걸 알았어도, 그 자리가 제 것이 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떨려 하고, 수줍어했지?
‘플로라는 네가 말한 대로 센칸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야. 첩자가 아니라고. 쫓기며 사는 약자를 보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다 알면서도…… 경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첩자가 아니라면 그 애가 싫을 이유는 없잖아.’
이브니에는 카신이 플로라를 어떻게 감쌌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장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걔가 싫었어요.’
‘…….’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요? 대장이 플로라 경을 그렇게 보니까. 사랑스러운 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싫었다고요.’
카신이 플로라를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알고 있다. 차라리 그 기억이라도 잃었으면 좋으련만.
결정적으로 아직 카신은 한 번도 이브니에를 찾아온 적 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이 자꾸 혼자 설레발을 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상처는 상처대로 다 받고 체념할 대로 체념해 놓고 또. 이 어리석은……!
이브니에는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직 김이 나고 있는 홍차를 마셨다.
플로라는 그런 이브니에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듯한 이브니에의 모습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플로라 경의 마음은 잘 알았어요.”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브니에가 중얼거렸다. 금세 절망이 깃든 얼굴로 돌아와서 플로라는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요. 카신 단장님은 달랐거든요.”
달라질 건 없다, 라는 말에 플로라는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이브니에에게는 눈치가 빠르다고 자만하긴 했지만, 플로라는 누구보다도 눈치가 없었다. 그런 플로라도 아주 가끔은 카신의 눈빛이 미묘하다고 느꼈으니, 곁에서 늘 그만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던 이브니에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이미 이브니에는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절망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어떻게든 다시 용기를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찢어지게 만드는지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상처를 딛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또다시 같은 사람에게 매혹당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플로라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말고,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차를 마셨다.
“앞으로 이브니에 경은 무얼 하실 생각인가요?”
“기사단에선 당연히 퇴출당할 테니, 검은 더 이상 들지 않을까 해요.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내려고요.”
“검을 놓으시겠다고요? 아직 처벌에 대해 제대로 정해진 것은 없잖아요. 그저 감봉 수준에 그칠 수도…….”
“플로라 경, 하네칸은 언제나 제게 그리 친절한 곳이 아니었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
“그리고 솔직히 이제 좀 지치네요. 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브니에는 이미 어떤 설득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듯했다. 플로라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 * *
이브니에는 그녀가 예상한 대로 기사단에서 퇴출당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번 센칸을 섬멸하는 일에 어느 정도 공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 대외적으로는 스스로 잠시 보직을 내려놓는 것으로 처리가 되었다.
성 내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이브니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사정을 빤히 알았지만, 적어도 성 밖의 사람들, 특히 이브니에가 살았다던 먼 시골 마을에서는 그녀를 영웅으로 취급할 터였다.
플로라는 솔직히 좀 지쳤다는, 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브니에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했다. 그녀의 삶이 센칸으로 인해 망가진 것이 아니라, 검을 놓게 되더라도 앞으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브니에 경이 내일 떠나요.”
대신, 플로라는 카신을 찾아가 다짜고짜 말했다. 처음 이브니에에게 방문한 이후로도 플로라는 종종 다시 이브니에를 찾아갔고,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카신이 하네칸에 돌아온 이후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괜한 오지랖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바쁘니 그럴 수도 있겠지 생각하던 것이, 이브니에가 곧 떠날 예정인데도 불구하고 감감무소식이니 괜히 제 마음이 다 조급해졌다.
“그래서 내가 찾아가기라도 해야 하나? 누가 보면 명예퇴직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카신은 갑작스레 찾아온 것도 모자라, 심지어 이브니에 얘기까지 하는 플로라를 올려다보며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이 웃긴 모양인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서슴없이 찾아오는 걸 보니,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카신 단장님의 기억 속 저는 어땠죠?”
“제멋대로에 사고뭉치였지.”
“말도 안 돼!”
카신이 펜을 내려놓으며 쿡쿡 웃었다. 플로라는 잠시 카신을 흘겨보았다가,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다시금 상기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마세요. 그 얘기를 하려고 왔어요.”
그가 이브니에를 끔찍하게 혐오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면 이렇게 찾아올 일도 없었다. 카신의 눈빛은 분명 이브니에를 안타까워하고 있었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까지는 알지 못하나, 이대로 그녀를 보지 않고 보낸다면 후회할 것은 분명히 알았다.
“네 충고 새겨듣고 생각해 보지.”
대답과는 달리 카신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 * *
황제가 바쁜 만큼 제국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시몬은 착실하게 주변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배를 타고 떠나려는 마르웰 공작을 체포해 지하 감옥에 구금했고, 스벤타 남작과 그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로 가뒀다.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으니 일은 일사천리로 척척 진행되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협력한 귀족들까지도 모두 시몬이 직접 심문하고 처벌을 내렸다.
스벤타 남작은 플로라가 자신이 욕망에 눈이 멀어 팔아넘긴 그 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벌게져서는, 그런 적 없다며 죄를 부인했다. 법정에서 직접 플로라와 대면할 때까지도, 그 뻔뻔한 연기는 완벽했다. 정말 억울하다는 듯한 그 얼굴이 무너졌던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악과 공포가 깃든 그의 얼굴은 플로라를 만족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플로라가 가장 기다렸던 것은 이 순간이었다.
“하네칸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황제의 아래로 주저앉은, 짙은 갈색의 피부를 가진 이 남자. 꽤나 마음고생을 한 모양인지 가뜩이나 험상궂었던 얼굴은 더 맹수처럼 보였다. 여전히 그를 보니 온몸에 족쇄가 걸린 듯 갑갑한 느낌이 났지만 그럴수록 플로라는 몸에 힘을 주어 그 위압감을 견뎌 내었다.
시몬은 왕좌에 비스듬히 앉아, 제 발치에 꿇어앉은 라비우를 지루한 표정으로 내려 보았다.
“건강이라…… 누구 덕분에 꽤 건강했지요.”
시몬이 픽 웃으며 라비우가 예의상 건넨 말을 조롱했다. 고개는 숙여져 있었지만,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을 굉장히 분해하고 있는 게 뻔했다.
“이만 일어나세요.”
라비우는 말을 잘 듣는 사람처럼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 공손하게 섰다. 그리고 힐끗 시몬의 옆에 서 있던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시몬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비우와 플로라가 대면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좋지 못한 일이었다. 한데 플로라는 자신이 꼭 가야겠다고, 라비우를 마지막으로 보고 모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시몬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라비우가 방문한 뒤로 성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차라리 제 옆에 두는 게 낫겠다 싶어 결국 허락했다. 막상 눈앞에서 이 꼴을 보니 후회가 들기도 한다. 라비우의 타오르는 눈빛이 플로라에게 닿을 적마다, 저 눈을 멀게 해 버리고 싶다는 잔인한 생각이 들었다.
시몬이 플로라의 팔을 잡아끌어 손을 잡았다. 오늘 그녀는 기사로써 시몬의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닌, 공작가의 영애로, 그리고 시몬의 정인으로 이곳에 참여했다. 그게 시몬이 내건 조건이었기 때문에 플로라는 짙은 보랏빛의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시몬은 지금 누굴 건드린 것인지, 그리고 누굴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똑똑히 보라는 듯한 눈빛을 했다. 라비우의 턱 근육은 여전히 힘이 잔뜩 들어가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