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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47)화 (147/154)

147.

플로라는 시몬이 그 악독한 자들을 알아서 잘 처리하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리비에르와 플로라는 나란히 집무실을 나섰다. 조금 더 시몬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분주해 보였다.

깊게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시몬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라비우와 연락이 닿았고, 그가 시몬의 부름에 따라 곧 제국으로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마 그 전에 마르웰 공작의 편에 섰던 측근 귀족들까지 전부 색출해 낼 생각인 듯했다.

라비우가 지금쯤 얼마나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일생을 쏟아부었던 메린섬을 잃었고, 아이든을 잃었다.

“정말 괜찮은 거니?”

시몬이 리비에르까지 함께 부른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상태를 얼마나 염려했는지 알 것 같았다. 리비에르도 마찬가지라는 듯 걱정 어린 눈을 했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아, 솔직히 완전히 괜찮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요.”

리비에르의 말에 희미한 기억 속에 자리한 스벤타 남작의 얼굴을 떠올리자 심장 한편이 두근거렸다. 아주 어릴 때 느꼈던 그 두려움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네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단다.”

“제 일이니, 알아야 할 일이었어요. 염려 마세요.”

하지만 플로라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충분히 극복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껏 스벤타 남작보다 더한 인간 밑에서도 잘 버티고 살았다.

리비에르와 짧게 산책을 한 뒤 플로라는 숙소가 아닌 다른 곳으로 걸음 했다. 꼭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였다.

넓디넓은 성만큼이나 너르게 트인 길들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어디로 가야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됐다. 플로라가 자주 산책을 즐겼던 길, 종종 앉아 시몬을 떠올리던 숲, 성의 대장간과 신전으로 가는 길 등 모두 익숙했다.

플로라가 도착한 곳은 이브니에가 치유를 받았던 성전이었다. 플로라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이브니에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사히 깨어났구나. 플로라는 문득 이곳으로 돌아오며 배에서 카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브니에 경은 어떤가요? 깨어났어요?’

‘깨어났지.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서, 종종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온다고 한다.’

‘다행이네요.’

‘왜 그녀를 걱정하지? 널 죽이려고 했는데.’

‘안타까워서요.’

카신은 그런 플로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한 번 방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하며, 그녀 역시 과거를 반성하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이브니에의 이야기를 하며 걱정 어린 얼굴을 한 카신을 의미심장한 얼굴로 바라보자, 감싸려고 하는 말은 아니니 절대 오해하지 말라고 단호한 척하던 것도 떠올랐다.

“이브니에 경.”

플로라는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과거를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브니에는 제게 큰 도움을 줬다. 시몬이 자신을 구하러 센칸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된 것도 이브니에가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죄를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빨리 오지 못했을 수 있었다.

이브니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떨더니, 천천히 뒤를 돌았다.

붉은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시도 때도 없이 관리하던 예전만큼 생기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하얀 피부와 무척 잘 어울렸다.

“……무사히 돌아왔군요.”

이브니에의 음성은 차분했다. 늘 플로라를 향해 적대심을 드러냈기 때문에 이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아마 이게 그녀의 진짜 목소리일 테지. 차분한 목소리만큼 눈빛도 담담해 보였고 말투도 정중했다. 대놓고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속에 언뜻 미안한 기색도 담겨 있는 듯했다.

“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이브니에 경을 만나고 싶었어요.”

이브니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체념한 듯 말했다.

“저를 질책하고 싶으신 건가요?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으려고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요?”

“무사히 깨어나셨다는 소식 듣고 병문안을 온 거예요. 병문안 온 손님을 이렇게 두실 건가요?”

플로라가 새초롬하게 말하자, 이브니에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가 기가 찬 듯 옅게 웃었다.

“좋아요. 이쪽에 앉으시지요. 차를 준비해드릴게요. 마침 제게 선물 받은 차가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플로라가 뻔뻔하게 묵례하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게 진심인가 하는 얼굴로 한참 플로라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이브니에가, 플로라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플로라 경을 알 수가 없네요.”

“뭐가요?”

“제가 밉지 않으신가요? 당신을 죽이려는 데에 가담했어요.”

“하지만 후회하셨잖아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아요.”

이브니에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제가 센칸의 협박을 받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플로라 경을 싫어했던 건 진심이었어요.”

“……와. 너무 직설적이신데요.”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요.”

이브니에는 그동안 말수가 적어졌다고 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고, 때로는 식사도 거른다고 들었다.

플로라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길 바라진 않았으나 그래도 전처럼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단 마음이었다. 자신을 적시하더라도 생기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센칸 때문에 망가진 삶을 살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플로라 경이 죽길 바란 것까진 아니었어요. 그 정도까지는…….”

이브니에가 침묵을 견디기 힘든 모양인지 금세 정정했다.

“그 정도만 아니면 됐어요. 너무 놀라서 입천장 다 델 뻔했네요.”

“홍차는 멀쩡해요. 안심하세요.”

이브니에도 적당히 장난스럽게 말을 골라 받아쳤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층 풀어져서 플로라도 마음을 놓았다.

“플로라 경이 절 미워할 줄 알았어요.”

이브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잡한 모양인지 웃지도,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퍼부었으면 속이 더 시원했을 거예요.”

“지나간 일이에요. 이브니에 경도 한 명의 피해자일 뿐입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저는 이브니에 경께는 아무런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사실 별로 위안은 되지 않습니다. 제 잘못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제가 벌인 일에 죄책감은 가지고 살겠습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제국법을 어긴 것도 명백히 사실이고요.”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예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브니에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고, 그중 가장 탐나는 것을 선택했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다고 검을 놓고 살기엔 그녀의 재능이 아까웠다. 그녀는 무려 실력만으로 정예에 속해 있던 기사였다.

하지만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플로라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절 싫어했던 건, 단장님 때문이죠?”

이브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치였다.

아무리 사랑에 무지한 자라도, 눈치가 없더라도 알 것이었다. 플로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눈치가 좀 빨라요.”

“그, 그렇다고, 그런 걸 서슴없이 말씀하시다니…….”

이브니에의 귀가 머리칼만큼이나 붉어졌다. 갑자기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카신에게 고백했던 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런 생각 따윈 그동안 안중에도 없었는데. 플로라로 인해 상기된 기억에 갑자기 쥐구멍으로 숨고 싶단 기분이었다.

“저를 싫어한다고 하셨던 것처럼, 제게 이브니에 경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

“저는 이브니에 경께서 굉장히 솔직하고 당찬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제게 직설적으로 말했더라도 무례하다 생각하진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부러워했겠죠.”

“뭐가 부러워요?”

“감정에 솔직하신 거요.”

“저는 맞다고 한 적 없는데요!”

플로라가 정말 그렇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브니에를 바라보며 차를 호로록 마셨다.

“근데, 감, 감정에 솔직한 게 왜 부러워요? 누군 숨기지 못해서 창피해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 저도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요. 상대가 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숨길 수밖에 없었고요.”

“그 상대가 카신 단장님이 아니었다고요?”

“네.”

이브니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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