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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45)화 (145/154)

145.

“풀 냄새를 맡으면 처음 시몬을 만났던 때가 생각나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플로라가 사색에서 깨어나 중얼거렸다. 시몬의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동안에도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시몬에게 그런 제 마음을 들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들키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말해 주어야 했다.

“……그때 시몬이 저를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요.”

“플로라,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널 구했을 거야. 그럴 만한 사람이었어.”

“저는 또 시몬을 죽일 것처럼 달려들겠지요.”

“참, 그랬지.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그땐 워낙 차갑고 뾰족해서 야생에서 자란 토끼 같긴 했어.”

시몬이 과거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의심은 또 얼마나 많던지. 아무리 농담을 던져도 먹히지도 않고…… 그래서 오히려 진심을 다해 널 대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그게 아니었다면 내 마음을 깨닫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겠어.”

플로라는 과거를 떠올리며 툴툴거리는 듯한 시몬의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 당시엔 정말로 시몬의 호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바라고 베풀지 않는 호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 황제의 호의가 퍽 부담스러웠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이나 다름없기는 하다. 생각할 때마다 새롭고, 플로라의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시점 중 하나였기에 잊을 수 없었다. 매일같이 떠올린대도 여전히 새로울 것 같았다.

“전 늘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살아왔다 보니, 이런 행복은 벅차요. 과한 행복이 가끔은 불안으로 다가올 때도 있어요.”

“…….”

“가장 큰 행복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시몬을 만난 일이라고 대답할 거예요. 시몬의 곁을 떠나 있는 동안, 시몬이 제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느꼈어요.”

“플로라, 그런데도 같은 일이 반복되면 나를 떠날 거라고?”

하네칸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눴던 대화가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탓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기쁘고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통이 어려 있는 것 같아 플로라는 잠시 침묵했다. 용기 낸 고백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플로라는 이내 걸음을 멈췄다.

기다렸다는 듯 시몬도 걸음을 맞추고 플로라에게로 몸을 틀었다.

“제게는 저보다 시몬이 더 소중해요. 제가 사라져야 시몬을 지킬 수 있다면, 저는 다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 부디 없었으면 해요.”

“그건 이기적이야, 플로라.”

“어떤 점이요?”

플로라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시몬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에게도 널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

“…….”

“우린 서로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잖아.”

시몬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플로라는 시몬과 나눴던 그때의 약속을 떠올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약속은 시몬이 예의상 한 말인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려면 또 상처받으려나.

플로라는 웃지도,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럼 다치지 마세요. 시몬이 다치면, 제가 판단력이 흐려져요.”

“노력해 볼게.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은 언제든 일어나는 법이잖아. 혹여 내가 다치더라도 떠나지 마. 몸이 아픈 것보다 널 보지 못하는 게 더 고통스러워. 플로라.”

그러나 이번에도 플로라는 차마 그러겠노라 대답하지 못했다. 시몬의 기분을 생각해, 거짓으로 대답할 만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여전한 플로라의 모습에 시몬은 코를 찡긋거리며 졌다는 듯 말했다.

“고집.”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무사히 쾌차하셔서 지금처럼 저를 찾아오시면 되잖아요.”

“……그래. 플로라가 끝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내가 찾아갈게.”

시몬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플로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맙소사. 어슴푸레한 달빛이 내려앉은 플로라의 환한 피부가 지금 유독 그의 눈에 고와 보였다. 검은 눈동자는 가장 최상급 흑요석보다 더욱 까맣고 반짝인다. 입술은 왜 저리 도톰하고 과일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인지……!

타들어 가는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로라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여유롭게 웃었다. 시몬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든 듯한 얼굴이었다.

시몬은 당장이라도 닿고 싶다는 충동을 꾹 참아내며 그런 플로라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접어 두는 것이 좋겠다. 이리 사랑스러운 여인을 눈앞에 두고, 그녀가 언제 저를 떠나 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그저 복에 겨운 사치가 분명했다.

“공작가에는 언제 들어갈지 정했어?”

“아니요. 아직입니다.”

하지만 아마 공작저가 정리되는 대로 빠른 시일 내에 들어가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자연스레 귀족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돌 테고, 플로라의 과거가 밝혀질 테니까.

시몬의 눈빛이 가을밤 하늘처럼 쓸쓸해졌다.

“들어가게 된다면 이렇게 고요한 밤에 산책을 함께할 순 없겠군.”

“아…… 그냥 공작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할까요?”

“이 산책 때문에?”

시몬이 설핏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를 비난하거나 비웃는 태도는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녀가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제게는 시몬과 함께 이렇게 걷는 일이 큰 행복 중 하나인걸요.”

플로라는 조심스레 대답하며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는데, 시몬의 입을 통해 들으니 자못 진지한 고민으로 변했다. 아버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내겐 희소식이지만, 리비에르 공작은 듣기라도 한다면 가슴이 미어지겠어.”

시몬에게 장담할 수 없다고 답하긴 했지만, 플로라도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지금 쥐고 있는 행복만큼은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플로라가 무슨 대답을 하려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녀보다 시몬의 말이 빨랐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에게 미움을 사고 싶진 않아.”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시몬의 손을 꽉 쥐었다.

미래. 미래라고 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었다. 플로라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앞날만큼은 어둡고 컴컴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한데 그 미래에 시몬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그리 절망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시몬, 그녀에게 시몬은 없던 용기도 주는 사람이었다.

플로라가 아무 말 하지 않고, 혼자 수줍어하며 마른 침만 삼키고 있자 시몬이 다시 말했다.

“성으로 자주 초대할게. 그럼 못 이기는 척, 머물다가 가. 산책은 그때 하지.”

시몬도 그녀가 이 성을 떠나, 공작가로 들어간 뒤의 일은 막막했지만 티 내지 않고 성숙한 어른인 척했다.

“네, 좋아요!”

그래도 플로라가 웃으니 아무렴 좋았다. 은근히 섭섭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어느덧 두 사람은 정원을 한 바퀴 다 돌아, 다시 황제의 성 앞에 멈춰 있었다. 두 사람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손을 놓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눈을 맞췄다. 이따금 수줍음이 올라오긴 했지만 플로라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몬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도저히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었다.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여기까지는 안 되는 건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플로라의 양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플로라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버벅거리자, 시몬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밤이라고는 하나, 보는 눈들도 있고…… 또 아직 저는 공작가의 신분도 아닌 기사일 뿐이고, 그래서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시, 시몬에게 안 좋은 추문이…….”

“지금 이곳은 나의 성이고, 이 밤에는 나를 지키는 기사들뿐이다. 나의 기사들에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그런지 어색하고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심해도 돼. 그리고 네가 공작가의 신분이든, 기사이든, 귀족이 아니든 상관없어. 애초에 네가 공작가의 여식이라 마음에 품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추문으로는 내게 흠집도 나지 않아. 이미 많은 추문을 달고 살았는걸.”

플로라의 바보 같은 말들을 시몬은 하나하나 해명해 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플로라는 결국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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