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그걸 이제야 생각하다니. 플로라가 천진난만한 알렉샤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이 머무를 숙소는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기로 하셨다.”
“……정말입니까?”
알렉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선두에 서 있는 시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네칸의 폐하께서는 정말 멋있으신 분이세요.”
“경의 거처를 마련해 주어서?”
“아니요! 그런 것만은 아니고요…….”
플로라의 농담에 알렉샤가 펄쩍 뛰며 두 손을 방방 휘저었다.
“플로라 경을 구하기 위해 직접 오신 일만 봐도 그래요. 제가 세상 경험이 아직 부족해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신하를 구하기 위해 직접 전장으로 뛰어들 왕이 몇이나 있을까 싶어요.”
그래, 그렇지. 라비우만 봐도 그런 건 기대할 수 없었다. 플로라가 알렉샤의 말에 동조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네칸으로 돌아오는 동안, 폐하께서 전쟁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을 대하시는 모습을 봤어요. 자신을 챙기기보다 남을 챙기시는 것에 익숙하신 분 같았어요. 제게 건네는 말 한마디만 봐도 알겠어요.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지셨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완전히 홀려 놓았구나. 플로라는 시몬의 뒷모습을 흘낏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샤가 하는 말들이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폐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도 이곳에서 남은 여생을 폐하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졌어요.”
“…….”
“혹시 폐하께 너무 쉬운 사람으로 보일까요?”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도 쉬워지게 하시는 분이긴 하지.”
플로라는 걱정 말라는 듯 맑게 웃으며 알렉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어디 갔다 이제 오신 겁니까!”
성에 도착해 감동을 느끼기도 전에, 플로라는 눈앞에서 엉엉 우는 루가르를 달래느라 난처한 상황이었다. 부둥켜안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숙소에 들어가기는커녕, 입구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분명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녀를 다독이기만 하던 플로라도 겨우 꼭 루가르의 작은 몸을 안아 주었다.
문득 하네칸으로 돌아오는 길에 에르네 대장과 나눴던 말들이 떠올랐다.
“루가르 경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잠시 바람을 쐬던 중 우연찮게 대장을 만나 루가르의 안부를 물었더니, 그가 잡아먹을 듯이 굴었던 일이.
<누군가 말도 없이 떠났다고,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
“아, 죄송합니다.”
<경도 그랬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 탓을 하려는 건 아니야. 잘 지내느냐고 물으니 솔직하게 대답해 준 것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심드렁하니 대답하면서도 살기는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여전한가 싶으면서도, 여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잠깐 나눴던 말처럼, 루가르는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돌아왔습니다. 루가르 경.”
돌아오는 내내 치료를 받았음에도 아직 더 받아야 할 정도로 성한 구석이 없기는 했지만, 루가르가 안심했으면 해서 플로라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울먹거리며 전혀 믿지 않는 눈초리로 플로라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던 루가르가 다시 흐어엉, 울음을 터트렸다.
우는 사람은 달래 본 적이 없는데…….
플로라가 목각 인형처럼 쭈뼛거리다 루가르의 등을 천천히 다독였다.
“말도 없이 떠나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겨우 안정을 되찾은 루가르가 코를 훌쩍거리며 플로라를 향해 중얼거렸다.
“매일 플로라 경을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요!”
루가르는 껌딱지처럼 플로라의 곁에 붙어 있었다. 급기야 플로라의 방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한눈에 보기에도 루가르의 모습이 많이 수척해져 있어 플로라는 고맙기도 하고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루가르 경, 누워서 주무세요.”
“아니, 아니에요. 여기는 플로라 경의 방인데…….”
“괜찮아요. 아직 정리해야 할 짐이 많이 남았어요. 정리 다 하면 깨울게요.”
플로라가 루가르에게 재차 권유했다. 졸음을 이기기가 어렵다는 듯 하품을 쩍 하던 루가르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디 가시면 안 돼요.”
“네, 알겠어요.”
그 대답에 안심이 되었는지 루가르는 새근새근 잠들었다. 플로라는 혹여 그녀가 깰까 조심조심 짐을 정리했다. 사실 정리해야 할 짐이 많은 건 아니었다. 이곳에는 잠시 머무르는 것이고, 곧 리비에르의 수양딸인 것이 밝혀지면 공작가로 들어갈 절차를 밟게 될 테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돌아온 방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이곳저곳을 쓸고 닦느라 바빴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플로라는 방 정리에 집중했다.
똑똑,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플로라는 루가르를 먼저 보았다. 혹여 그녀가 깰까 살금살금 문을 열고 고개만 쏙 내밀자, 에르네 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아, 대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폐하께서 찾으신다. 센칸에서 함께 돌아온 이들과 함께 만찬을 들자 하셨다.>
“……아, 네. 준비하겠습니다.”
에르네는 준비 말고, 지금 당장 가자는 듯한 눈으로 플로라를 빤히 보았다. 플로라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방에 손님이 와계셔서요.”
<혹, 그 손님이 루가르 경인가?>
“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르네의 눈동자가 방 안을 향했다. 그러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루가르의 모습이 보일 리는 없었다.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살기 어린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서야 플로라가 살짝 몸을 비켰다.
“근데 보시다시피…… 손님께서 주무시고 계셔서.”
그제야 좀 더 열린 문 너머로 루가르가 방주인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르네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그동안 통 잠을 주무시지 못한 모양이에요.”
<들어가도 되겠나?>
“……네.”
플로라는 완전히 몸을 비켜 주었다. 혹시라도 루가르를 깨워 버릴까 걱정했지만, 대장이니 그렇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겉은 차가워도 누구보다도 루가르를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온 에르네가 잠든 루가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준비하고 있어. 루가르를 데려다주고 올 테니.>
“네. 기다리겠습니다.”
방을 나서는 에르네의 우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얼른 시몬을 만날 채비를 시작했다.
* * *
모두가 함께 모인 만찬은 성황리에 끝났다. 그동안 마른 빵에 부실한 수프나 티 정도만 먹으며 간신히 연명했던 동료들은 호화롭게 차려진 음식에 정신을 못 차렸다. 게다가 센칸에서 식사시간마다 내주는 음식과는 견줄 바가 못 될 정도로 맛이나 재료의 퀄리티에 차이가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알렉샤는 플로라가 만난 이후 가장 많이 음식을 먹었다.
시몬은 식사를 하면서 플로라를 그동안 챙겨 주고 도와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분위기가 묘해져서,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시몬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것은 좋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까지 받는 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다.
만찬이 끝나고, 시몬은 플로라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플로라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 역시도 시몬과 단둘이 있을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으니까.
당직을 서야 하는 기사들만이 석상처럼 고요히 어둠을 지키는 밤이었다. 시몬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희비가 교차하던 혼란스러운 낮에 비하면 너무 고요해서 세상이 멸망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시몬은 설령 세상이 멸망했다고 해도 제 곁을 지켜 주는 이만 있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과 맞닿은 부드러운 손을 더 꽉 잡고는 그녀에게 보폭을 맞춰 걸었다.
혼자 이 밤을 거닐 때는 온갖 서러운 감정들이 밀려들었었다. 황족으로 태어난 기구한 운명부터 시작해서, 난생처음으로 깊게 마음을 주고받은 연인을 잃어야만 했던 처지까지, 신께 큰 잘못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우러러보고,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지만 시몬은 사실 그다지 이 자리가 좋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나약하고 배부른 소리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겪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인 것이다.
늘 제 그릇에 비해 감당해야 할 몫이 벅차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하루 커지는 고통을 참고 견뎠다. 그러던 중에 플로라가 찾아왔다. 따뜻한 봄바람처럼 스며든 그녀는 처음으로 시몬의 마음에 평화와 안정을 심어 주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느꼈을 때는 평화는커녕 매일이 불안하고 절망적이었지만…….
플로라만 있다면 세상의 멸망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니, 모든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녀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제 곁을 떠난 사이 매일 아르제카 신께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플로라를 되찾아왔으니 정말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대신 시몬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바람을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날 제게 와 세상이 되어 준 그녀를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