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하지만 꼭 나눠야 할 이야기였다.
플로라도 앞으로 센칸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했으니까.
“마음은 괜찮아?”
시몬은 플로라를 걱정했다. 플로라와 아이든의 오랜 악연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아이든을 공격했을 때 그녀가 짓고 있던 표정이 마음에 남아 신경이 쓰였다. 플로라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냥 너무 쉽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억울해요. 이리 쉽게 끝날 걸, 난 그동안 왜 고통받으며 살아온 건지 모르겠어요.”
“센칸에서 자라 온 이들이 그렇듯, 세뇌를 당했기 때문이겠지.”
“네. 맞아요.”
“……하네칸으로 함께 가는 이들은 상태가 괜찮은 건가?”
“아, 네. 방에서 나오지 않아 자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순 없었지만 그들도 조금 얼떨떨해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든 나라를 잃은 것이니 마음이 복잡할 거예요.”
“플로라가 잘 보살펴 줘.”
“그럴게요. 그래도 하네칸으로 가는 건 다들 기대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적응하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하네칸으로 간다는 소식에 눈이 초롱초롱 거리던 알렉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렉샤는 특히나 정식 기사로 이름을 부여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라, 다른 대륙을 가 본 적이 없어 더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플로라도 처음 임무를 부여받고, 타 대륙으로 떠나던 때를 기억한다. 얼마나 설레고 앞으로의 기사 생활을 기대했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기다리는 앞날이 시궁창일 줄도 모르고.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
“이미 우리 제국은 오랜 전쟁으로 각국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 정식으로 시험을 보고 인정받는다면 문제없을 거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한데 걱정되지 않으세요? 그들은 센칸의 출신이에요. 혹시라도 배신을 하게 된다면…….”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런 대화를 나누니 처음 널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 그때 내게 그랬지. 국가 기밀을 빼돌리는 첩자면 어떻게 할 거냐고. 마음은 그때와 비슷해. 그리고 플로라의 편을 들어 주고, 뜻을 함께 맞췄던 사람이니 그건 내 편이란 소리와도 같아.”
“저도 그들의 마음까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믿어 주신 만큼, 잘 적응할 수 있게 저도 관리에 힘써 볼게요.”
“그들이 거취할 곳은 마련하겠다. 그리고 네가 혹여 너무 마음 쓸 것 같아 그러는데, 그들과 하네칸 사이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플로라 네 책임이 아니야.”
“……제 책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처음엔 뜻이 맞았을지 몰라도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혹여 우리와 다른 길을 걷는다면 하네칸 제국과 뜻이 맞는 것뿐이겠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몬은 플로라가 느끼고 있을 압박감을 풀어 주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괜찮다고 타일렀다. 무거운 마음이 단번에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시몬이 걱정하고 있기에 플로라는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센칸은 어떻게 처리하실 예정이세요?”
“돌아가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처리할 예정이야. 우리의 잘못도 있겠지. 마음대로 타국으로 들어갔으니 전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래, 차라리 전쟁으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해. 그럼 완전히 뿌리 뽑을 자신이 있으니.”
플로라가 아는 시몬은 전쟁은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지난 선대의 황제들이 얼마나 전쟁에 미쳐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다. 생소하면서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제국민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황제가 전쟁을 치르고, 알게 모르게 자괴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팠다. 플로라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시몬을 바라보자, 그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근데 그렇게 못 할 거야.”
“…….”
“그렇게 대놓고 뭔가 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면 진작 했겠지. 게다가 우리에게 증거 자료가 많은걸.”
메린성을 정리하고 얻은 연구 자료들은 모두 배에 실었다. 거기에는 플로라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뜻밖의 자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타 국가로 심어 둔 첩자라든지, 각국의 고위 인사들과 거래한 장부라든지. 아이든은 자신이 죽고, 센칸의 모든 죄가 드러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겠지.
“그건 다행이에요.”
플로라는 여유롭게 웃었다. 안 그래도 아이든이 행했던 비인간적인 연구와 그 결과에 대해 적어 둔 자료를 빼돌려놨었는데, 그 외에도 유용한 자료들을 회수했다니. 확실히 하네칸이 센칸을 휘두르는 데 힘이 되어 줄 거라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이 정보가 대륙으로 퍼져 나가면 큰 파장이 일 것이었다. 그 점을 알고 있으니, 라비우도 하네칸에 정식으로 항의를 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센칸은 여러모로 자기 꾀에 빠진 셈이 될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여러 협상을 해 봐야 하겠지만, 센칸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플로라. 앞으로는 센칸에 대한 걱정은 그만했으면 좋겠어. 내가 단단히 뿌리를 뽑아 놓을 테니까.”
플로라는 든든하게 느껴지는 시몬의 말과 눈빛에 위안을 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시몬.”
내내 짐처럼 안고 있던 걱정이 조금은 해소되어서일까. 이 순간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찬란하게만 느껴졌다.
“자, 이제 다음 이야기를 해 볼까. 식사를 다 했으면 내 방에서 티라도 마시면서 얘기하는 건 어때?”
“좋아요.”
플로라가 동의한 뒤에야 식사 자리를 마무리했다. 자리를 정돈하고 난 뒤, 플로라와 시몬은 나란히 식당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복도에 이든과 카신이 있었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장정 둘이 선실의 좁은 복도에 서 있으니 기둥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놀래라. 두 사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시몬도 그들을 발견하고 눈살을 찡그리며 물었다. 카신과 이든이 시몬을 향해 인사했다.
“폐하,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이든의 말에 시몬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게 먹긴 했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그런 눈빛으로 물끄러미 이든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온화하게 답했다.
“폐하께서 중요한 약속이 있으신 것 같아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플로라는 힐끗 카신과 이든을 번갈아 바라 보았다. 플로라가 생각하기에 이 만찬에 그런 의미심장한 의도는 없었는데, 두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
“그럼 식사들 해.”
시몬이 뻔뻔하게 칭찬하고는 플로라에게 가자고 말했다. 플로라도 어쩐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라 카신과 이든에게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시몬을 뒤쫓아 갔다.
* * *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서 벗어나 계단을 오르자,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바다의 밤은 아주 어둡다. 이것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흐르는 물결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질 것이다. 플로라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이렇게 어두워졌군.”
“그렇네요.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오늘은 밤이 늦은 것 같으니,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럴까요?”
플로라는 아쉽지만, 시몬의 뜻을 존중했다.
“그럼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폐하.”
“그래. 플로라, 푹 쉬고 잘 자.”
시몬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람에 흩날려 헝클어진 머리칼이 정돈되었다. 플로라는 마음이 가는 대로, 그의 품에 조심스레 안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 시몬의 몸이 움찔거렸으나 이내 따뜻하게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이러면 더더욱, 내 방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네, 저도 그럴 것 같아요. 하지만 아쉬워서…….”
플로라는 반짝 거리는 눈으로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도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 * *
“와아…….”
배에서 내리자마자 알렉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했다. 난생처음 보는 대제국 수도의 풍경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황제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미리 전달받은 것인지, 근위대의 에반 부단장과 근위대 소속 기사들이 사복을 입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기가 하네칸이군요. 기사님들이 꼭 한 번 가봐야 한다고 했던 말을 이제 알 것 같아요! 정말 멋있는 곳이잖아요!”
“맞아. 멋있는 곳이지. 그리고 이 광장에는 맛집도 굉장히 많아, 알렉샤 경.”
알렉샤와 보낸 시간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그는 맛있는 음식을 꽤나 좋아했다. 또한 달콤한 디저트도. 플로라는 그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곳이 많았다. 역시나 솔깃한 모양인지 알렉샤가 화색했다.
“정말요? 그런데 전…… 하네칸에서 사용하는 금화는 가지고 있지 않은걸요. 그러고 보니 홀린 듯이 플로라 경을 따라오긴 했는데요, 막상 와 보니까 앞길이 막막하네요. 되게.”
알렉샤는 자신의 처지를 이제야 깨달았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