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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41)화 (141/154)

141.

플로라는 잠시 질색을 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든을 보았다. 반은 진지한 듯 보였으나 또 반은 장난기가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플로라는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참이었다. 시몬도 그 허무맹랑한 이야길 듣고 단단히 이골이 난 듯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든 님이 플로라 경에게 반쯤 미쳐 있긴 했죠. 저는 두 분이 정말 혼인을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살짝 떠보는 말에 하필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알렉샤가 줄줄이 떠들어 대는 바람에 더욱 곤란해졌다. 그게 이든을 만나기 바로 전의 일이었다. 지금도 시몬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가 지었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플로라가 기억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에요.”

“그래요? 경들과 함께했던 사람들 말로는, 단순한 소문이 아닌 것 같던데요. 센칸에서 인기가 엄청 많았다고.”

이 사람들이 대체 무어라 수군거리고 다닌 거야…….

플로라는 다시금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것 같던데.”

이든은 이제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플로라에게 중얼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레이디께서 아니라고 하니 믿겠습니다. 하마터면 상심이 클 뻔했어요.”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초리라 더 찝찝했다. 청혼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걸지도 모르겠으나 아이든과 엮이고 싶지 않아 말도 꺼내기 싫었다. 그나저나 이든은 대체 어디서 상심이 크다는 걸까. 플로라가 이든의 말을 가늠하듯, 눈을 흘기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든은 금세 말간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리를 굽혀 플로라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장난은 없었다.

“아무렴 상관없습니다. 레이디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사실이면 돼요. 모두가 그럴 거예요.”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묵었던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막기가 어려웠다. 이런 편안하고 따뜻함도 그리웠던가. 제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꼭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원래 자신의 것들이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저도, 다시 보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이든.”

꼭 해야 할 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든이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쥐며 살짝 흔들어 깨웠을 때가 되어서야, 플로라는 자신이 잠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품을 짧게 하며 뻑뻑한 눈을 깜빡거리자 이만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이든. 덕분에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요.”

욱신거리던 통증들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플로라의 인사에 이든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 * *

“이레나.”

“……네, 아버지.”

벌써 센칸을 떠난 지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플로라는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에 집중했다. 모두가 배려해 준 덕분에 어느 정도 기력이 돌아온 참이었다.

플로라는 리비에르와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비록 배에서 먹는 음식이 그리 호화로울 리 없었지만,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에 의미가 크게 느껴졌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바랐고, 이 모든 것이 꿈처럼만 느껴졌다.

다시 하네칸으로 돌아가는 걸까? 리비에르가 자신을 찾아 이곳에 왔다고 했을 때도, 또 시몬을 만났을 때도, 아이든의 숨통을 끊어놓았을 때도. 지금도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이 모든 것이 플로라가 간절히 염원해 왔던 것이다 보니 더욱 그런 듯했다. 모든 행복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만 같았다.

“하네칸으로 돌아가면 전처럼 플로라의 이름으로 살지는 못할 수도 있어.”

플로라는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깜빡였다. 리비에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널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어. 귀족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폐하께서 직접 힘을 쓰셨으니…… 돌아가면 그들을 이해시켜야만 해.”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센칸의 악행을 눈치채고 그것을 막기 위해 직접 손을 쓴 거라고 해도 될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 내가 그렇게 하기도 싫고. 다른 이들이 널 함부로 대하는 것이 싫다.”

“…….”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니?”

암암리에 그녀가 리비에르의 수양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것을 소문으로 치부했다. 리비에르와 플로라가 어떤 접점도 없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플로라는 리비에르의 말을 이해했다.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기적이라면 그동안의 자신이 이기적이었음을 플로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비에르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하네칸에 돌아가게 된다면, 플로라는 꼭 리비에르와 함께 살고 싶었다. 아버지가 외롭지 않도록.

“저 아버지와 함께 살게요. 그렇게 하게 허락해 주세요.”

“……이레나.”

리비에르는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리비에르에겐 그 말이 꿈만 같았다. 잠깐 숨을 멈췄다가 눈을 깜빡였지만 여전히 현실이었다.

“고맙다…….”

그녀의 마음에 큰 짐을 안겨 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리비에르는 뒷일은 걱정하지 않기로 다시금 마음을 고쳤다. 생각이 많은 것도 독이다. 이레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억지로 자신과 함께 살겠다고 말할 만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겠다고 다짐했다. 리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식당의 문이 예고 없이 열리며 부녀의 오붓한 오찬에 균열이 일었다. 배에서 귀족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식사 공간이라, 예의가 없다고 지적할 겨를도 없이 플로라와 리비에르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식사 중에 내가 방해를 했군.”

“……폐하.”

“좀 늦은 시각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문을 연 채로 잠시 멈칫한 이는 시몬이었다. 플로라와 리비에르가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폐하. 이제 오찬을 드시는 건가요?”

“응. 조금 늦었어.”

그나저나 시몬은 따로 식당을 이용하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는 어쩐 일일까.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기사들은…….”

플로라가 가까이 다가가 그를 도우려 하자, 시몬이 손사래를 쳤다.

“아, 괜찮아. 플로라 경.”

“…….”

“기사들은 지난 전투가 무척 고되었을 테니 쉬도록 했어. 리비에르, 플로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앉아서 마저 식사해.”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 아닌, 전투 목적이라 요리사 등의 인력은 배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것 역시 보관했다 먹을 수 있는 음식들뿐이었다.

시몬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폐하.”

두 사람은 쭈뼛거리는 자세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리비에르가 먼저 자리를 권유하자 시몬이 민망한 듯 웃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난 방으로 가서 먹을게.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저녁엔 꼭 참석하겠네.”

시몬은 빈말이 아니라는 듯 정말 제 몫의 음식만 챙겨 식당을 빠져나갔다.

다시 고요해진 뒤에야 플로라와 리비에르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시몬 때문에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고, 이전까지 리비에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었는지 완전히 잊고 말았다.

‘항상 달고 다니는 이름 모를 짐승도 곁에 없이 왜 혼자 다니는 걸까, 마음 쓰이게. 식사는 왜 또 이리 늦게 먹는 거야?’

시몬을 보니 시몬의 생각으로 온통 머릿속이 가득 채워져서, 다른 생각 같은 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이레나?”

리비에르가 그녀를 두 번 부를 때까지, 플로라는 시몬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 네?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식사는 다 한 거니?”

“……네. 다 먹었어요.”

시몬과도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하는데…… 그 역시 많이 피곤해 보여 감히 먼저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배 안에서 이렇게라도 마주치니 보고 싶던 마음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 나중에 더 얘기하자꾸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나도 일이 있어서.”

“……네. 그런데요, 아버지. 하네칸은 언제쯤 도착하나요?”

“글쎄……. 앞으로 한 삼 일은 더 가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얼른 돌아가고 싶어서요.”

플로라는 기대된다는 듯 생긋 웃었다. 하네칸을 떠날 땐 다신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각오를 했는데, 막상 이리 다시 돌아가게 된다니 심장이 떨려 죽을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 리비에르의 수양딸인 것이 발표된다면 예전과는 삶이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하네칸에서 맞이할 새로운 삶이 무척이나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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