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40)화 (140/154)

140.

플로라는 어쩐지 발버둥 치는 아이든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겁에 질린 하얀 얼굴이 오늘따라 더 불쌍해 보였다. 아이든 역시 화살을 쏜 사람을 확인해야겠다는 듯 두리번거리다 플로라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 마주친 눈빛에서도 그녀를 원망하고, 분노한 듯한 감정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네가 어떻게 감히, 나를.’

아이든의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제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분을 망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플로라가 활시위를 당기자 아이든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허벅지를 관통한 화살을 부러뜨리고, 그가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헐레벌떡 움직였다.

살고 싶다면 전력을 다해 도망치겠지. 관통한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하지만 플로라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탕.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멀리서 짐짝처럼 철푸덕 엎어지는 모습이 종이 인형 같았다. 역시나 명중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미동이 없는 아이든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묘해졌다.

‘이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었던가. 그런데 왜 나는 여태…….’

지긋지긋하게만 여겨졌던 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후련하다가도, 힘들었던 지난 과거가 떠올라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어떤 이유인들 잠시라도 더 아이든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조롱하며 목숨을 가지고 구걸하고, 애원하도록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플로라는 아이든에게 작은 연민을 느끼던 때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합적으로 밀려드는 감정 중에는 약간의 슬픔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들에 대한 회한이리라.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이 허탈했다.

활시위만 놓았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늘 그러지 못했다.

이제야. 이번에서야 그 모든 것이 끝났다.

“……플로라.”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플로라는 자신을 부르는 고요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언뜻 흐릿해졌던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언제나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던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했었는데.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사람의 모습인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잊지 않기 위해 곱씹고 또 곱씹었으면서도, 왜곡된 기억일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플로라는 감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냥 넋을 놓았다. 항상 주홍빛으로 물든 해 질 녘이 될 때면 그가 당연한 수순처럼 떠올랐다.

흑발의 머리칼,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자신을 향해 있는 아름다운 미소까지.

아, 정말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불현듯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건국제의 참사가 떠오른 탓이었다.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질 거야. 반가운 건 둘째치고, 그런 생각부터 들다니.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플로라는 그래서 차오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처음엔 아이든과의 끈질긴 악연이 끝났다는 기쁨과 허탈함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이 벅찬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길이 없어 눈물이 났다. 자신을 바라볼 때 보여 주던 한없이 다정한 눈빛은 여전했다.

“반가워서 그런 거야?”

플로라는 자신의 뺨으로 와 닿는 시몬의 손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설핏 깨물었다.

온몸에 전율이 돋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네칸의 태양을…….”

플로라는 아직도 그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간질거리는 감정을 모면하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황급히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곧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자신을 포근하게 끌어안아 주는 품이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된 것처럼 머리칼을 만지작거려 주는 손길이 좋았다.

“……폐하.”

“보고 싶었어. 플로라.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살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이 플로라의 감정을 더욱 흔들리게 했다. 좀체 이 울컥 치미는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플로라도 결국 시몬을 끌어안았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폐하께서 직접…….”

“널 되찾는 일인데 어떻게 빠질 수가 있겠어.”

“…….”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미쳐 버렸을 거야.”

자신을 위하는 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시몬은 한 제국의 황제였고, 플로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플로라는 살짝 상체를 떼어 시몬을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컨디션도 멀쩡해 보였다. 꼼꼼히 눈을 굴려 살피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지만 트라우마처럼 남은 그날의 일이 기억나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건국제에서 시몬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걱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했던 얼굴은 여전히 플로라를 괴롭히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다시금 그렇게 되어 버릴까 두려웠다.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야속했다. 플로라가 살짝 째려보듯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시몬은 그 말이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큼큼…… 이레나.”

그때 두 사람의 대화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중후한 목소리에 플로라는 눈을 크게 떴다. 아차. 시몬을 보느라 이 모든 상황을 잠시 깜빡 잊고 있었다.

이곳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리비에르 또한 있었다는 사실을.

아아, 사람이 참 간사하다. 이렇게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여기까지 온 데에는, 아버지를 지키겠다는 마음도 있던 것을.

플로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리비에르를 바라보았다. 이레나라고 불러 주는 저 따뜻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그를 다시 본다면 꼭 사과드리고 싶었다.

다시 그에게 같은 상처를 안겨 주게 된 것을.

리비에르는 플로라의 어깨를 살짝 그러 쥐었다가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묵혀 두었던 감정들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괜찮다…….”

다시는 플로라를 보고 싶지 않다고 모질게 말한다고 해도 사실 할 말 없었다. 그가 한순간 사라져 버린 자신 때문에 어떤 인생을 살아 왔는지 알면서도, 다시금 그 곁을 떠나는 선택을 했으니.

“괜찮아. 네가 선택한 길이니 다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

“이리 무사히 돌아와 주었으니 다 괜찮아.”

하지만 리비에르는 플로라를 위해 주었다.

그녀는 곧 자신을 향한 다른 시선들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네칸에 발을 들이기 전의 플로라는 인생을 찬미하기보다는 한탄하기만 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악재는 왜 내게만 찾아오는 걸까. 난 왜 이렇게 불행한 걸까.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플로라는 행복했다.

지금, 눈앞에는 하네칸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들이 자신을 되찾기 위해 이곳까지 와 주었다는 사실이, 벅찼다.

자신만큼 성공한 삶도 없으며 행복한 삶도 없을 거라고,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 *

“……레이디께서는 정말.”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으나 상처를 살피는 손길만큼은 부드럽고 섬세했다. 플로라는 옅게 웃으며 이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든.”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게 여러 번인데요.”

“칼을 쥐는 사람은 그게 쉽지 않아요.”

“알아요. 속상해서 그럽니다.”

“……항상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누군 잔소리로 듣는데, 걱정으로 받아들여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역시 레이디께서는 마음이 깊어요.”

이든이 웃었다. 그 ‘누군’는 시몬이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이 배를 타고 온 거예요? 되게 크네요.”

“네. 이제 돌아갈 길도 한참이네요. 평생 이런 여행은 처음이에요. 레이디와 함께하니 더 색다르고 좋네요.”

이든이 눈을 접어 웃었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만 같다.

“레이디. 다신 이런 식으로 떠나지 마세요. 레이디께서 하네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잠도 잘 수가 없었답니다.”

“…….”

“참,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끊임없이 채찍과 당근을 던지던 이든이 불현듯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무슨 심각한 소문인가 싶어 플로라가 무어냐는 듯 이든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디께 정혼자가 있다는 소문이었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