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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39)화 (139/154)

139.

“뭐지, 그 눈빛은? 기분 나쁜데?”

그는 한때 인간 위에 군림하기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무자비한 자였다. 그런 그가 세계의 혼란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수 세기 동안 사역마로 갇혀 살며 깨달은 게 많은 모양이었다.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은 없어 말을 아꼈으나, 페이몬은 찰떡같이 알아먹은 것 같았다.

“일단 저것들부터 처리하지.”

페이몬은 크르릉 거리는 사나운 소리를 내며 어린아이가 기지개를 피듯, 몸을 쭉 폈다.

“오랜만에 땅을 밟고 섰더니 벌써 삭신이 다 쑤시는 기분이야. 근데…… 재미있어.”

페이몬이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 나갈 것 같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

아이든과 파르베는 난데없이 나타난 짐승에 적잖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앞발로만 맞아도 최소 골절을 당할 것 같은 우람한 덩치에 날카로운 이빨이 상당히 위협적인 짐승이니 그런 기분을 느낄 이유는 충분했다.

‘대마법사가 불러낸 마법인가?’

파르베는 짐승에게서 흘러나오는 강한 마력에 두려움도 여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대마법사 리비에르의 마력을 보고도 그리 위협적으로 느끼지 못했던 그가, 고작 짐승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에 오금이 저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짐승에게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짐승의 눈이 자신을 향한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먹이사슬의 가장 하위 단계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저 짐승은 제 위에 군림하는 왕인 것만 같았다. 깔보고 있는 것 같은 그 태도가 수치스러웠다. 자존심이 상했다. 파르베는 오기로 이 위압감을 풀어내며 미간을 좁혔다.

곁을 슬쩍 보니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든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차피 아이든에게는 도움을 기대할 것도 없었다. 그는 딱 겉모습만큼 병약했고, 검조차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활시위를 당기는 것조차도 근육에 무리가 갈 것이 분명했다.

파르베는 검을 쥐었다. 하는 수 없었다. 다른 기사들과 부딪치는 수밖에. 그는 자신을 압박하고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겠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순 없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센칸의 전력이 지원을 오고 있을 테니, 그동안 질기게 버티고 버티리라. 그래서 라비우 전하에게 더 큰 공로를 인정받고 플로라의 다음이 아닌. 진정한 센칸의 영웅이 되고 싶었다. 영웅으로 칭송받을 제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사라지는 듯하던 자신감이 솟구쳤다.

* * *

비릿한 피 내음이 플로라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개인과 붙으면 금방 해치울 수 있었겠지만, 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은 체력 소모가 심한 일이었다. 몸을 피할 곳이 한정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많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찌 되었건 이들은 센칸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 사람들이었다. 자칫 방심하면 수가 틀릴 수 있었기에 플로라는 조금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플로라는 절대 리비에르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 온갖 불안하고 음습한 것들이 들러붙는 듯했다. 불안한 기억들이 현실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은 그녀가 꼭 넘어야 할 산이었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플로라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잇새 사이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들이마시길 반복하며 전투에 집중했다.

셀 수도 없이 칼을 휘두르고, 몸을 피했지만 전투는 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자잘하게 베인 곳도 많아 온몸이 바늘에 찔린 듯 욱신거리고 있었다.

리비에르에게 가야 하는데…… 그가 무사해야 하는데. 길어지는 전투에 희망이 사라지고 다시 불안한 감정들이 마음에 들어찰 무렵이었다.

멀리서 이상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플로라의 공격에 쓰러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플로라는 무언가 다른 기류를 느끼고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덩달아 눈앞의 루엘과 기사들도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어수선해졌다.

<……플로라. 거기 있나?>

그리고 그때였다.

머릿속으로 딱딱하고 차가운 어조의 말이 들려온 것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치기 시작했다.

“……에르네 님?”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작게 불러서 에르네의 귀에 들렸을지는 모르겠지만. 플로라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리비에르만 온 것이 아니야?

폐하를 호위해야 할 근위대의 단장까지 이곳에 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상한 일투성이라, 이 모든 일이 꿈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에르네 님은 근위대의 수장이라고. 폐하를 두고 왜…….

플로라는 기습적으로 자신에게 들이치는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내며 습관처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매섭게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몰아쳤다.

<여기 있었군.>

그리고 정말 단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루엘들을 처치하고 코너를 돌아 온 대장의 모습은 정말 현실처럼 생생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보니,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며 이곳까지 내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늘 그렇듯, 반가운 기색 없이 플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기가 들어찬 눈빛인 것 같기도 하고, 또 귀찮다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플로라는 잠시 다리에 힘이 풀려 벽을 짚고 섰다. 그제야 에르네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그녀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다쳤나?>

플로라가 에르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다쳤어?>

“네. 괜찮습니다. 근데…… 너무 놀라서요. 대장이 왜 이곳에 계십니까?”

<나가면서 얘기하지. 빨리 합류해야 한다.>

플로라는 다시 상황을 금방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꿈은 아니리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를 보고 놀란 것은 둘째 치고, 리비에르가 무사한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아이든의 편에 선 루엘들을 처치하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애초에 오랫동안 주인 없이 비워진 성이었던 것처럼,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처음 이 성에 왔을 때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지. 플로라는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환하게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왔다는, 정말 꿈이 현실로 찾아왔다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플로라는 에르네를 따라 거대한 성문을 나섰다. 밖은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뒤에서는 화살을 쏘고, 함성과 비명이 곳곳을 메우고 있었다. 리비에르를 찾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플로라의 시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흐트러진 흑색의 머리칼과 하얀 피부, 그리고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의 아름다운 주홍빛 눈동자까지. 시몬이 분명했다. 온몸이 경직되며 소름이 쫙 끼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대장, 이거 꿈 아니죠?”

<그래.>

“말도 안 돼.”

<꿈 아니니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무섭게 읊조리는 에르네의 말에도 다시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만 같았다. 욱신거리던 몸의 통증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처음 보는 낯선 생물이 시몬의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저 검은 짐승은 대체 뭘까. 마수는 아닌 것 같은데……. 플로라는 잠시 낯선 짐승에게로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시몬을 공격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시몬의 주변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그중 리비에르도 섞여 있었기에 플로라는 제 허벅지를 꽉 꼬집으면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찾았고,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감정이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또한 다시 전투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주변에 쓰러진 기사들에게 주어진 활과 화살을 챙겨 들어, 파르베를 향해 겨눴다. 망설임 없이 화살을 쏘았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재빨리 공격을 피해냈다. 적중하진 못했어도 방해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영향이 있었다는 듯, 파르베는 검은 짐승에게 곧 덮쳐졌다.

“……대장, 저건 뭐죠?”

마수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파르베를 몸집이 큰 짐승이라고 한들 이길 순 없을 텐데…….

플로라가 시몬을 향해 다가가며 묻자, 에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대장도 잘 모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파르베는 여러 번 짐승을 공격하는 듯했으나, 짐승은 꼼짝 않고 덩달아 파르베를 공격했다. 파르베는 금세 만신창이가 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아이든은 이내 위험을 직감했는지 강화된 다리를 이용해 빠르게 달렸다. 비겁한 자식. 플로라는 그를 놓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를 놓친다면 아이든은 이 섬을 완전히 떠나 버릴 것이 분명했다. 또 이대로 아이든을 죽이지 못한 채 보낼 순 없었다.

플로라는 챙겨왔던 활시위를 당겨 집중했다. 원거리에서는 아무리 달리기가 빨라도 자신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일까. 불어오는 바람결을 타고 화살이 날아갔다. 곧 플로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명중이었다. 곧 다리에 화살을 맞은 아이든이 넘어지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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