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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38)화 (138/154)

138.

“설마 플로라 경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벌이신 건 아니겠죠. 폐하.”

“…….”

“아, 설마 제 예상이 맞는 건가요? 플로라 경이 인기가 많네요?”

파르베가 계속해서 비아냥거리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파르베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리고 싶었지만 시몬은 자신을 도발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성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플로라와 관련된 이야기라 그런지 쉽게 마음이 안정되지는 않았다. 파르베의 검은 동공은 희번뜩거리며 시몬의 동태를 살피는 듯했다.

불시에 공격을 해 오는 적군을 베어 낸 에르네가 시몬의 곁으로 돌아왔다. 웃고 있는 파르베의 눈이 잠시 에르네에게로 향했다.

“당신, 전에 나를 쫓아온 적 있죠?”

시몬은 파르베의 저 당당함이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 때문이리란 걸 알았다. 고약한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아이든이란 작자는 도대체 무얼 만들어 낸 것일까. 어떤 욕심일까. 도대체 이렇게까지 비정상적으로 마력을 선망하는 이유가…….

에르네는 늘 그렇듯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의 대화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파르베에게 어마어마한 살기를 내비쳤다.

흉흉한 기세에 파르베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기는 그에게 허락된 땅이었다. 하네칸의 황제든, 근위대장이든. 위대한 마법사든.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죽일 수만 있다면 잔혹하게 도륙 내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파르베는 웃었다.

지난 과거가 떠올랐다. 자신을 죽일 듯 쫓아오던, 힘의 차이를 역력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하네칸의 마스터가. 이 모두를 이긴다면 그도 죽일 수 있겠지. 갑자기 기분이 한껏 고양되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네. 플로라 경을 찾아.”

시몬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 저를 보내려 하는 것에 에르네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마주한 시몬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조금도 설득당해 줄 것 같지 않은 기세였다. 이건 명령과 다름없었다. 에르네는 하는 수 없이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폐하. 다녀오겠습니다.>

시몬의 실력은 에르네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설 수 있는 일이었다.

저런 놈 따위에게 질 만한 능력이 아니었다. 마수와의 전쟁에서도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견고해진 능력이었다. 에르네는 시몬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

“뭡니까? 황제를 버리고 근위대장이 도망이라도 치는 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파르베가 제 턱을 쓸어내리며 비아냥댔다. 시몬은 더 이상 그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의 원천은 아직 파악할 수 없었으나, 실제로 파르베와의 전투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이곳에 오면서 모두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고, 자신 또한 있었다. 마냥 사랑하는 사람 하나만으로 눈이 돌아 자신의 사람들을 사지에 밀어 넣는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 쳐도 정통으로 내려오는 마력과 검술은 만들어진 것만 못할 터였다. 시몬은 파르베를 향해 칼을 겨눴다. 파르베도 생긋 웃으며 시몬을 향해 금방이라도 돌진할 듯 상체를 낮췄다.

“폐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리비에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르베가 먼저 돌진했다. 시몬은 칼날에 자신의 마력을 품었다. 많이들 우려하고, 적 또한 이리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니 전력을 다해 대응해 줄 수밖에 없었다. 시몬의 칼날에 빛이 일었다. 그 모습에 잠시 주춤한 파르베도, 질 수 없다는 듯 동시에 마력을 분출했다.

이만큼이나 구현할 수 있는 건가.

시몬은 하네칸 제국의 마스터처럼 마력을 사용하고 있는 파르베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유능한 마법사가 곁에 붙어 있었다고 한들, 노력 없이는 단시간에 이루어 낼 수 없는 결과임에는 분명했다. 그 점은 높이 살 만했다.

플로라가 그와 전투하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가 다칠까, 죽을까 노심초사했던 그 감정이 파르베를 보니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파르베는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고, 시몬은 그 공격을 방어하며 틈틈이 일격을 가할 순간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문양이 있는 어깨가 타들어 갈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시몬이 미간을 좁혔다.

“벌써 지치셨습니까? 폐하.”

때를 놓치지 않고 파르베가 빈정거렸다.

그런 것에 일일이 대답해 줄 때가 아니었다. 몸 상태가 정말 이상했다.

독이 완전히 해독되지 않은 걸까? 이곳에 떠나기 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전투 훈련에 투자했다. 에르네가 무리하지 말라고 할 때까지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몸이 약해 함께 오지 않고, 배에 머물러 있을 이든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상을 감지한 리비에르가 급히 시몬의 곁에 멈춰 서며 주변의 공격을 차단했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어깨가…….”

정확히 말하면 문양이 생살을 찢고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인지 머리를 굴리던 시몬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때였다. 곧 멀리서 화살촉이 날아와 시몬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화살촉이 낸 생채기보다, 여전히 문양이 더 타들어 갈 듯 아팠다.

“에르네 경을 다시 불러와야겠습니다.”

“괜찮아.”

시몬이 리비에르를 저지했다. 고개를 들자, 멀리서 짐승처럼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짐승처럼 빨리 달리던 남자…….

하네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보고 받을 때 들었던 증언이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가 ‘아이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 놈이라는 거지. 플로라에게 청혼을 했다는 게.

이 와중에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청혼이란 단어였다.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하지? 파르베 경. 빨리 죽이지 않고.”

아이든은 금세 파르베의 곁에 서 있었다.

비상식적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에 리비에르도 적잖게 당황을 한 모양이었다. 파르베를 볼 때보다 더 경이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곧 아이든이 다시 활시위를 당겨 시몬에게 고정하자, 이내 현실을 직시하고 바짝 긴장했다.

파르베가 다시 검을 들고, 아이든이 활시위를 당겼다.

“비켜. 리비에르.”

“……예?”

“날 지키지 말고 옆으로 좀만 비켜 있어.”

“폐하!”

“부탁이네. 날 믿어.”

리비에르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시몬을 바라보았다. 앞을 가로막지 말라니! 지키지 말라니!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을 거역한 채 서 있자, 시몬이 살짝 리비에르를 밀쳐내었다.

동시에 아이든이 기다렸다는 듯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흠.”

리비에르의 마법보다 빠르게 시몬의 앞으로 검은 연기와 함께 불투명한 방어막이 생겼다. 화살은 퉁, 하고 그 방어막을 뚫지 못한 채 땅으로 떨어졌다.

시몬은 연기가 사라지고, 어느새 나타난 것을 바라보았다. 몸은 가뿐해지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네 놈이었구나.”

시몬은 눈앞에 있는 검은 짐승을 보았다.

그동안 전설처럼 취급당했기에, 실존하는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데. 이렇게 실체를 마주하게 되다니.

“폐하…… 괜찮으십니까? 이 짐승은…….”

“짐승이라고 부르지 마.”

검고, 또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짐승이 인간처럼 말을 내뱉었다. 마치 에르네처럼 머릿속으로 그 대화를 전하는 것만 같았다. 리비에르는 정체 모를 짐승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자,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또한 아이든도, 파르베도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것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건 시몬밖에 없었다.

신 아르제카가 지상에 강림했을 때,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던 마수를 물리치고 올바른 균형을 위해 인간에게 힘을 나눠 주었다. 제국의 기둥이 될 태양에게는 마족의 신이었던 ‘페이몬’을 봉인해 사역마로 심었고, 세 명의 인간에게는 더 강한 마력을, 신전의 아이들에게는 신의 힘 일부를 주었다.

시몬의 짐작대로라면 이것은…….

“……페이몬?”

페이몬. 한때 마족의 신이었던 자이리라.

“그 이름…… 누군가가 내뱉는 것을 듣는 건 실로 오랜만이구나. 그래. 내 이름이 페이몬이었어.”

“…….”

“웬만해선 지켜만 보려고 했는데 말이지. 수 세기를 살았어도 느껴보지 못한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서 말이야.”

페이몬이 순간 짜증 난다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며 파르베와 아이든 쪽을 바라보았다.

“저건 대체 뭐냐? 나의 일족도 아닌 것이…… 일족의 힘을 가지고 있어.”

“…….”

“불안정하고, 끔찍해.”

페이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밖에 나왔는데 피 냄새와 불길한 기운밖에 느껴지지 않는다며 혀를 끌끌 찼다.

“아이든의 역작이라는군. 마수의 마력석을 분해해 인간에게 심은 모양이야.”

“제정신이 아니군.”

시몬은 페이몬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파르베 때문이리란 걸 알았다.

“저건 죽여야 해. 내 일족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불편하지만 무엇보다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릴 거야.”

시몬이 의외라는 듯 페이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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