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플로라. 이미 라비우 전하께는 보고가 되었어.”
“그래?”
“뭐가 이렇게 태연해?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야. 정신 차려.”
“…….”
“지금 네 멍청한 동료들이 손수 이곳을 쳐들어와 준 덕분에 네 하네칸은 약점을 잡히게 될 거라고.”
“과연 그렇게 될까?”
플로라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아이든을 노려보았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여서 그냥 대꾸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질 지경이었다.
“이 메린 섬 말이야. 대외적으로는 센칸의 땅이 아니지 않아? 라비우 그는 인정하지 않을 거야. 널 꼬리 잘라 내듯 잘라 낸다면 몰라도. 아직도 모르겠어?”
“전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용서하지 않을 거야.”
플로라가 아이든을 향해 칼을 겨누자, 다시 바짝 긴장한 주변의 기사들이 칼끝을 그녀에게 고정시킨 채 몸을 움찔거렸다.
“지금은 네 동료들이 왔다는 생각에 기고만장해진 모양인데.”
“…….”
“그들에게 파르베 경을 보냈어. 모두를 자비 없이 죽일 거야.”
파르베? 플로라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파르베라는 변수를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리비에르와 함께 누가 왔을까. 마법사들? 아니면……? 플로라는 리비에르 외에 이곳에 누가 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파르베는 솔직히 플로라도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어디까지 향상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불안한 티를 내어서는 안 된다. 알았지만 자꾸만 소중한 이들이 다치고 그들을 잃게 되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든의 세 치 혀에 당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불안한 감정 때문에 찰나 표정이 흐트러졌다. 작은 것조차 놓치지 않고 간파한 아이든이 혀를 둘러 제 입술을 핥아내었다.
“이제야 좀 걱정이 되는 모양이지?”
플로라가 몸을 틀어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수많은 칼날에 의해 저지당했다.
아이든은 불쌍한 어린 양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 마음대로 나가? 네 동료들이 죽어가는 꼴은 나 혼자 구경할게. 넌 여기서 쉬고 있어. 플로라. 처벌은 그 이후에 하겠다.”
아이든이 새침하게 뒤를 돌며 플로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뒷모습조차 이리 얄밉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플로라가 그를 따라나서려 하자, 그녀의 앞을 기사들과 루엘이 가로막았다.
“비켜.”
“…….”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가 죽이고 싶은 것은 오직 아이든이었으니까.
그러나 재차 비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플로라를 경계하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든의 한 마디에 그들은 모두 플로라를 금방이라도 찔러 버릴 것처럼 독기를 품은 눈빛을 했다.
“다신 못 걷게 하든, 검을 못 들게 하든 해. 죽이지는 말고.”
살짝 뒤를 돌아보며 이죽거리는 얼굴이 꼭 악마 같았다.
플로라는 자신을 금방이라도 벨 것처럼 공격태세를 갖춘 기사들과 루엘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든을 쫓아가야 한다는, 그리고 리비에르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일었으나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분노했다.
하는 수 없었다.
이곳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 버리는 수밖에.
* * *
몰려드는 기사들을 차례로 베고, 싸우며 시몬과 그의 기사들은 앞으로 전진했다. 화살을 막는 것은 리비에르와 마법사들의 담당이었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끔찍한 전투였다. 전쟁 같은 건 몸서리 칠 정도로 혐오했던 시몬이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오로지 한 사람을 보기 위해서.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거대한 성이 눈에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플로라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헛걸음을 한 거면 어쩌지. 불현듯 불안감이 들 때마다 그럴 리 없다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폐하.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그런 그가 지쳤다고 생각한 것인지, 전투 중에도 시몬을 살피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던 에르네가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시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 주기 위해 더 큰 동작으로 빠르게 적군을 베었다. 비릿한 피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플로라를 찾아. 이곳을 섬멸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네겐 무리한 부탁이겠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폐하.>
“다치지 않도록 해 볼게.”
에르네는 표정을 살짝 굳힌 채 시몬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못 본 척했다. 지금만큼은 에르네의 조언이나 잔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럴 경우도 아니었고.
그리고 갑자기 성문이 활짝 열리며 더 많은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상황에는 맞지 않지만 생각보다 덤벼드는 기사들의 전투 능력들이 좋아 감탄하던 참이었다.
센칸에서 어떻게 이 많은 기사들을 훈련하고 독하게 키우는지 플로라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기 때문에 애초에 만만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실력자들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시몬은 에르네의 말에 정면을 노려보았다. 우르르 나오는 성문의 끝으로 기괴한 행색을 한 이가 보였다. 언젠가 플로라와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자였다. 그녀를 지속적으로 죽이려 했고, 그의 기사들을 죽이려 들었다. 나아가 제국민까지도 건드렸으니 잊힐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곳에서 했던 실험의 결과물이라 했던가.
시몬은 일순 심장이 폭풍처럼 요동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내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를 죽여야겠다는 마음과는 사뭇 달랐다. 시몬은 쿵쿵, 거칠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가 곧 미간을 좁혔다. 아직 파르베와의 거리는 멀었고, 단순히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던 것뿐인데 힘에 짓눌리는 것처럼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그와 눈이 마주쳤다.
파르베.
괴기한 보랏빛 피부에 검은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수 토벌을 위해 원정을 직접 떠난 적도 있는 그였지만, 한때는 인간이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 끔찍하고 기이하게만 보였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자, 파르베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꼭 죽여야 할 상대를 찾은 것 같은 살기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그가 뚜벅뚜벅 기사들을 헤치고 걸어왔다. 정말 놀랍게도 마력의 흐름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폐하. 저것은…….”
“보았나? 저자가 이곳의 실험작이라는군. 아이든이라는 미친 연금술사가 마력을 탐내서 마력석에 담긴 마력을 추출해 심은 모양이야. 꽤 오랫동안 개미 새끼처럼 이런 외딴 섬에 숨어 우리에게 복종했던 척한 이유지.”
시몬이 매섭게 말하자 리비에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처음 들었을 때는 마냥 허무맹랑한 얘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실험에 성공했으니 한껏 기세등등해져 있을 거야. 그러니 겁도 없이…….”
시몬은 이들이 건국제를 망친 일과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 플로라를 잃었을 때의 그 상실감이 다시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파르베를 보고 느끼는 중압감보다 플로라를 향한 절절한 마음이 더 커졌다. 저자를 죽이는 것은 천천히 해도 되나, 플로라를 찾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나 위안이 되는 부분은 파르베가 이곳에 있으니, 플로라 역시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란 점이었다. 시몬은 자신을 향해 성큼 다가오고 있는 이를 바라보며 칼을 쥐었다. 한 손으로 무거운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든 채로, 거침없이 휘두르며 다가온 파르베가 시몬을 향해 칼을 겨눴다. 리비에르와 에르네가 그런 시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폐하.”
말투는 정중했으나 표정이나 행동이 시몬을 가소롭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직도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시몬은 그저 파르베를 딱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실험의 도구로 평생을 자라, 마력을 얻는 것만이 인생이 목표인 양 세뇌당해 왔을 인생이다. 그리고 결국 갈망하던 것을 손에 쥐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제 모습이 저리 끔찍하게 변한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런 파르베를 바라보는 시몬은,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플로라는 어디에 있지?”
“아, 플로라 경이요. 폐하께서도 선배를 마음에 품고 계시는 겁니까, 설마?”
“…….”
“오, 이런. 플로라 경은 곧 아이든 님과 혼인을 하게 되실 텐데요.”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한 제국의 황제에게 무례하게 구는 행동거지는 뒷전이 되었다. 시몬이 얼굴을 굳힌 채 되묻자, 파르베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이든 님께서 플로라 경에게 청혼하셨습니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누구와 결혼을 한다고? 누구 마음대로.
파르베의 그 말 덕분일까. 시몬의 이성이 완전히 돌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