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모두 폐하를 위한 일이랍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플로라 경을 다시 만나셔야죠. 레이디께서는 자신 때문에 폐하가 다쳤을 거라고 자책하고 계실 것 같은데.”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몬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그녀가 왜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인지, 시몬도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플로라가 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고,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고 타들어 가는 것처럼 화가 나고 아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거니 싶어졌다.
“마음으로는 아닌 걸 알면서도 머리가 가끔 레이디께서 하네칸을 배신한 건가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으로 치료제가 도착한 뒤로는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지더군요.”
“…….”
“레이디께서는 폐하를 걱정하신 거예요. 또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될까 두렵기도 하셨을 테죠.”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
시몬이 불충하게 대꾸하며 이든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러니 다시 만날 땐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아픈 기색을 보이면 안 되겠지요. 자, 팔을 이리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이든의 말처럼 시몬도 성으로 의문의 약이 도착했을 때 확신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지켜 주기 위해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언젠가 플로라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 가벼운 말 한마디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서운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거든요.’
물론 저를 위해서 제 곁을 떠난 것은 플로라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제 목숨을 잃는 것보다, 어떤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 앞으로 플로라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란 것이 더 무섭고 아팠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나눌 당시에도 그녀에게 분명히 말했다.
‘내가 보여 줄게. 네 곁에 있어도 죽지 않는다는 거.’
죽지 않겠다고 했잖아.
시몬은 체념한 얼굴로 고분고분 이든의 치유력을 받아냈다. 이든의 말대로 플로라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을. 자신은 무사하다는 것을.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오라고 말할 것이다.
* * *
카나락은 약속된 시간에 나타났다. 문은 흠집도 없이 손쉽게 열렸다. 이런 게 진짜 마법이구나. 이런 긴박한 상황에도 문득 이런 실용적인 마법이나 진작 배워 둘 걸 그랬다는 얼빠진 생각이 들었다.
“카나락 님.”
“네, 플로라 경?”
마법을 사용해 플로라의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을 기절시켜 그런 것인지, 카나락의 안색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력을 가진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지 카나락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물불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신뢰할 수 없는 그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일까.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지 않으면…… 전 계속 카나락 님을 불신할 거예요.”
카나락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으나, 이내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밖에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어쩐지 일 층으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플로라를 잡으러 온 기사들이 몇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든이라면 전력을 풀어서라도, 그녀를 잡으러 왔을 터인데.
플로라는 평소보다 훨씬 싸늘해진 성의 온기에 긴장감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나락 님. 뭐가 왔다는 거죠?”
이런 분위기를 생각한 게 아니었다. 지난번처럼 모두가 개미 떼처럼 제게 달려들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플로라는 대답을 원한다는 듯 카나락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듯 허공을 올려다보다 중얼거렸다.
“플로라 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존재랍니다.”
“……그게 무슨.”
그래도 플로라가 못 알아듣자, 카나락이 그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가 나직이 답해 주었다.
“리비에르 님이 오신 겁니다.”
리비에르? 방금 리비에르라고 한 건가. 플로라가 순간 얼빠진 얼굴을 했다. 카나락이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당신이 아버지를 어떻게…….”
“꼬리는 길면 밟히기 마련입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하며 아직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었다니.”
“…….”
“조용히 있을 거라면 조심을 했어야지. 이들은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겁니다. 저는 리비에르 님이 심어 둔 첩자입니다.”
카나락이 매서운 눈을 빛냈다.
“얼른 그들에게 합류하시죠.”
“지금, 여기에…… 아버지가 있다는 거죠?”
“제 예상으론 그래요.”
순간 플로라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리운 마음이 반이고, 또 자신이 없는 새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플로라 경!”
그리고 성을 나가려던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알렉샤의 목소리에 플로라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알렉샤 경!”
“이게 다 무슨 난리에요?”
이미 한바탕 전투가 일어났었다는 듯, 알렉샤는 무기를 손에 쥔 채였다. 이들의 검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플로라도 아직 눈으로 본 것이 없으니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수 없어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카나락 님.”
“예.”
“정말 리비에르 님이 온 것이라면, 만나기로 한 곳이 있었나요?”
“……아니요. 하네칸과 이곳은 거리가 상당히 멀어 자주 서신을 주고받진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제 마력이 그리 강한 것이 아니라, 사실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기적이에요.”
실제로 카나락은 리비에르를 향해 마법 서신을 전달하며 삼일 밤낮을 꼬박 시름시름 앓았다. 아이든과 센칸의 연구를 돕는 이들이 환경이 바뀌어 가벼운 몸살 같은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일단 알렉샤와 카나락 님은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주세요. 정말 리비에르 님이라면…… 합류해서 힘을 실어 주세요. 아버지가 다치지 않게…….”
플로라의 말에 알렉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플로라 경은요?”
“나는 루엘들을…….”
“거긴 너무 위험해요!”
“그들에게도 자유를 줘야 해. 그대로 뒀다간 루엘들을 방패막이로 쓸 게 분명하다고.”
플로라가 한 번 겪어봤던 일이었다. 센칸은 루엘을 방패처럼 삼아 앞세우고, 뒤에서 원거리 공격을 하며 플로라를 절벽으로 몰아냈었다. 평생 실험과 훈련으로 고통을 느끼게 하고 허무하게 죽게 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을 구한다고 해서, 플로라 경의 말을 듣겠어요? 이미 센칸에 세뇌당한 사람들이라고요!”
“경들처럼 설득될 사람은 구할 수 있을 거야.”
정말 리비에르가 온 건지 플로라도 궁금했다. 아버지가 온 것이라면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애초에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결심한 것은 끝을 내야 했다. 과연 아이든도 그곳으로 갔을까? 플로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들을 뒤로한 채, 성의 지하로 빠르게 내려갔다.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몰라도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플로라는 자신을 저지하려는 기사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가 루엘들이 기거하는 곳에 도착했다.
지하는 방음도 잘 되고, 창문도 없어서 바깥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플로라가 문을 열자, 루엘들이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플로라 경 아니십니까?”
어떤 이는 선망의 눈빛으로 플로라를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그녀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플로라는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건, 그들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 필사적으로 도망쳐. 경들에게 기회는 지금뿐이다. 고통스러운 길을 자처하지 마. 도망쳐서 평범하게 살아.”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이 성은 곧 무너질 거고, 계속 머문다면 경들은 죽게 될 거야.”
워낙 많은 루엘들이 있었기에 긴 대화는 할 수 없었으나, 상황 판단이 빠른 루엘들은 플로라의 말을 듣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플로라가 해 줄 말의 전부였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서일까, 플로라는 그제야 늘 무겁던 마음 한구석이 해방된 것처럼 평온해짐을 느꼈다.
“플로라!”
그리고 모두가 바쁘게 흩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플로라의 이름을 불렀다. 플로라는 그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활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짐승처럼 날쌘 몸놀림으로 용케 화살을 피한 아이든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플로라가 그를 공격하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아이든에게 세뇌당한 기사들은 그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순식간에 플로라를 향한 칼날이 여럿 생겨났다.
“플로라. 이게 무슨 짓이야? 방금 날 죽일 뻔했다고!”
“죽이려고 한 거 맞아.”
“……어떻게 연락한 거야? 저들이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아이든은 지금 메린 성을 습격한 이들이 플로라를 찾아온 하네칸의 사람들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글쎄. 네가 뭐 실수한 건 아니고?”
“이러면 널 죽일 수밖에 없어. 플로라. 네가 어떻게…….”
아이든의 눈에 광기가 일었다. 배신감을 느끼는 듯 붉어진 눈동자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같은 마음이야. 일 년 전에 했던 약속을 이제 지킬 수 있을 거야.”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죽일 거라고. 아이든.”
플로라는 허리춤에 찼던 검을 들어 올렸다. 이건 그녀가 꼭 해야 할 마지막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