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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33)화 (133/154)

133.

“앞으로 내가 하는 일에 이런 식으로 끼어들지 마. 알았어?”

성 밖으로 나온 아이든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를 내었다. 뒤따라 걷던 플로라도 아이든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화를 많이 참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플로라의 눈엔 이런 그의 모습들이 진심으로 전해지기보다는 신기하면서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결코 아이든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아이든이 대답을 재촉했다. 플로라는 눈을 들어 아이든을 똑바로 보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다. 단지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테지만, 그녀는 순순히 그리 따르고 싶지 않았다.

알렉샤를 생각해서라도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자유가 좀 더 억압당하고, 아이든에게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저를 대신해 뜻을 이어 줄 믿음직한 이들도 있지 않은가. 자신의 거부가 오히려 그들이 움직이는 데 도화선이 될 수 있다면…….

“난 네 명령에 마냥 복종하는 개가 아니야. 아이든.”

“……뭐?”

“방금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난 똑같이 행동할 거라는 말이야.”

“플로라!”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성이 난 듯 씩씩거리며 성큼 다가온 아이든이 플로라의 머리채를 쥐었다. 고개가 갑작스레 확 꺾이자 눈앞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여전히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그래. 네가 참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입 닥쳐! 플로라.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야?”

“……넌 애초에 이런 사람이었어. 이제 알겠어?”

아이든이 짜증 난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선연히 보였다.

“네가 누굴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날 좋아한다고? 아니, 아이든. 너는 그저 날 복종하게 하고 싶은 거야.”

“그만해.”

“네게 온순하게 구는 날 보며 희열을 느끼고 싶은 거잖아.”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짝, 하는 마찰음이 귓가에 천둥처럼 떨어져 내리며 눈앞이 핑글 돌았다. 맞는 건 익숙했다. 어느 정도 예상도 하고 있었기에 아프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균형을 잃고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진 플로라의 위에 올라탄 아이든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의 눈에 광기가 일었다. 이러다간 정말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간신히 발로 아이든을 걷어차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래?”

목을 붙잡고 여러 번 켁켁거리며 숨과 기침을 함께 뱉어냈다.

아이든도 나동그라져 있고, 플로라 역시 흙바닥에 뒹구는 꼴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이것이 진정 아이든과 제게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걸이를 걸어 주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고, 사랑을 속삭이는 건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우리’라는 말로 그와 자신을 함께 묶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아이든도 인지하길 바랐다. 그동안 그가 한 말들이, 한 행위들이 얼마나 역겨운 일이었는지.

“좀 솔직해져, 아이든.”

플로라가 아이든의 위로 올라타 뺨을 세게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이든은 원래가 몸이 허약한 편이어서, 달리는 것 외에는 전투 기술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작자였다. 그가 무기 없이 일대일로 전투했을 땐 무조건 플로라에게 승산이 있었다.

“넌 그냥 날 굴복시키고 싶은 거야. 네 말이면 죽는시늉도 하는 충성스러운 개새끼로 만들고 싶은 거라고. 근데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아이든이 몇 번 그녀에게서 벗어나고자 몸을 바르작거렸으나, 플로라의 계속된 주먹질에 결국 몸에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누군가 뒤에서 플로라를 강하게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그를 죽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진작 이렇게 거절했어야 했어. 다신 내게 혼인이라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역겨운 말 하지 마. 알았어?”

씩씩거리며 힘없이 늘어져 있는 아이든에게 발길질을 했지만,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에게 저지를 당해 더 이상의 폭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쉬이…….”

“…….”

“그만하시죠? 이미 충분히 볼만 했답니다.”

귓가에 느껴지는 목소리, 그리고 단단한 힘. 플로라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두피까지 소름이 끼치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파르베 경. 이거 놓지?”

플로라는 단숨에 평정심과 냉랭함을 되찾곤 파르베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든 님을 저렇게 만드시는 바람에…… 처벌은 면치 못하시겠어요.”

“상관없어.”

“선배도 가만 보면 참 미련하시다니까요.”

“…….”

“아이든 님은 센칸에서 라비우 전하 다음가는 권력자예요. 좀만 온순하게 구셨더라도 화초처럼, 꽃처럼 보살핌받으며 편히 사실 수 있었을 텐데요.”

“내가 그런 걸 원하는 사람처럼 보여?”

“하긴요. 그냥 선배가 안타까워서요.”

“네게 동정받을 생각 없으니 그딴 눈 집어치워.”

파르베가 인심 좋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이내 플로라의 주변을 에워싼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플로라는 팔이 결박당한 채로 방에 격리되었다.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지만 솔직히 속이 시원해졌다. 반쯤 정신을 잃고 피를 질질 흘리던 아이든의 몰골을 떠올리니 빙긋 미소가 지어질 지경이었다. 이대로 얼마간 밥도, 물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채 갇혀 있어야 하겠지만 감당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래, 어차피 더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준비하던 계획들도 모두 마무리해 가던 참이었으니.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알렉샤가 부디 무사하기를, 그리고 뜻을 함께하던 이들이 자신의 소식에 너무 동요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든의 목숨만은 제 손으로 앗아가고 싶었는데, 제게 그럴 기회가 올까.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조금은 무력감이 들었지만, 역시 후회는 없었다.

* * *

그리고 그날 밤. 유독 달이 환하게 하늘을 밝히고 있어 창문 틈새로 쏟아져 내렸다. 잠이 오지도 않았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되니, 저편으로 밀어 두었던 잡생각들이 의지와는 다르게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플로라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호흡했다. 마력을 연습하는 듯하면서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집중했다.

스스로의 정신을 다룰 수 없다면 이 센칸에서는 금방 미쳐 버릴 거다.

그때, 플로라는 기이한 기운을 느끼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지?’

플로라는 눈앞에 아름다운 빛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나비의 형상을 한 그것은 우아하게 날갯짓을 팔락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보낸 마력인 것 같았다. 플로라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흩뿌려지는 아름다움에 결국 넋을 잃었다. 출처가 어디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비의 날갯짓을 보자마자 문득 리비에르가 떠올랐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가 제게 마법을 가르쳐 줄 때, 보여 주던 그 마법과 흡사했다.

그를 떠올리자, 순간 꾹꾹 내리눌렀던 그리움이라는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리비에르를 제대로 아버지라고 불러 보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함께 있을걸. 자신이 다시 사라져 버렸으니 그 얼굴에 얼마나 근심과 걱정이 깃들어 있을지 안 봐도 훤했다.

문득 리비에르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시몬을 따라 광장에 나가 은밀히 만났던 리비에르의 표정과 목소리는 굉장히 지쳐 있었지. 잃어버린 수양딸을 찾아 오랫동안 헤매고 돌아다녔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안타까움이 불현듯 다시 밀려들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다시 하네칸을 떠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네칸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돌아가고 싶어.’

다시는 그리운 얼굴들을 보지 못할 것까지 각오하고 센칸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나비의 날갯짓 하나만으로, 가슴에 파문이 일기라도 한 듯 자꾸만 감정이 흘러넘치려 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싶다.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 주고 싶었다. 후회해 봤자 기회가 다시 주어지진 않을 테지만, 플로라는 솟구치는 이 감정들을 막아 내릴 힘이 없었다. 눈물이 차오르자, 자신을 위로하듯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던 나비는 은은한 빛을 뿌리며 흩어져 내렸다.

“플로라 경?”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을 쏟다 지쳐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온 신경 세포 하나하나 전부 살아 있어 주변의 움직임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누군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금방 눈을 뜰 수 있었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잠깐 눈을 감고 있던 플로라는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플로라 경.”

플로라는 문 밖에 위치한 사람의 어두운 형상을 빤히 보았다. 작게 난 창문으로 실루엣이 언뜻 보이는 것뿐이라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동료가 찾아온 것일까. 그들 중에 이만한 배짱을 가진 이가 있었나. 플로라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 카나락이 있었다.

“카나락 님?”

플로라는 눈을 의심했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는 요즘 들어 자주 눈에 띄었다. 몰래 이곳에 온 모양인지 주변을 둘러보던 카나락이 작은 통을 내밀었다.

“물 한 모금 못 드셨을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마셔요.”

플로라는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신뢰를 하게 된 것일까. 어쩐지 불편한 생각들이 들지 않았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알렉샤 경은 무사해요. 걱정하고 계실 것 같아 말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여긴 위험해요. 제게 찾아왔다는 걸 알면 카나락 님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그분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목숨은 아깝지 않아요.”

카나락이 바람결에 타고 흐르는 노랫소리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들었더라도 플로라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임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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