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31)화 (131/154)

131.

“대체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 거야?”

소문의 출처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플로라의 반응에 알렉샤가 실수했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듯하던 주변 다른 사람들은 짐짓 알렉샤와 자신의 대화를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렉샤가 그들을 대신해 총대를 메고 물어본 것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플로라 경.”

플로라가 원래도 아이든과 엮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러워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가뜩이나 그가 제게 청혼하던 일이 요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데다, 본인이 제 소유인 것처럼 굴어 대는 아이든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던 참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이지?”

“저도 출처가 어디인지는 몰라요.”

사실 출처야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플로라는 아이든의 병약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그럴 일 없어. 앞으로는 그런 소문에 휘말리지 마.”

알렉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행히 분위기가 일단락되는 듯했다. 모두가 은연중 허무맹랑한 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좀 풀렸다.

알렉샤는 훈련이 끝난 후에서야 그 일에 대해 다시 사과했다.

“다들 궁금해했어요. 오늘 제가 아니었더라도 플로라 경께 언제든 물어보긴 했을 거예요.”

“알고 있어.”

사람들은 플로라를 따르겠다고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녀를 어려워했다. 인사나 훈련에 관한 말 외의 대화를 해 본 사람이 손에 꼽힐 지경이었다. 그러니 비교적 그녀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 같은 알렉샤가 총대를 멘 것이겠지. 현재 얼추 어떤 분위기로 모임이 진행되어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이든에게 청혼을 받았던 건 사실이야.”

“……네?”

“미친 건 알았지만, 단단히 미쳐 버린 모양이지.”

“그럼 결국 혼인을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전에 일을 치러야지.”

알렉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담겨 있어 플로라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이든 님께서는 경을 좋아하셔서 청혼하신 건가요?”

“본인 입으로는 그렇게 지껄이더군.”

“말도 안 돼요……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아프게 할 수 있나요?”

알렉샤가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도르르 굴리며 붕대가 감긴 플로라의 팔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테스트와 연구가 진행되다 보니, 상처가 아물 틈이 없었다.

플로라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취향인 모양이지. 아이든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알렉샤, 메린 성에 살아가면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 한두 번 겪은 거 아니잖아. 지금은 못 본 척, 모르는 척해.”

“네. 하지만 한번 경을 돕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모든 게 불합리해 보여요. 참을 수가 없어요.”

“마음을 다스려. 조급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어.”

알렉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플로라를 따랐다.

숲을 빠져나가 성에 도달해 갈수록 그녀는 말수가 줄었다. 자연스레 알렉샤 역시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하는 둥 이야기의 방향이 완전히 달려졌다.

“플로라 경.”

성 앞에서는 아이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든.”

플로라의 눈치를 살피던 알렉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는 성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아이든은 심기가 불편한 듯 뛰어가는 알렉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가, 플로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야? 한참 찾았어.”

“무슨 일 있었어?”

“저녁을 함께 먹는 게 어떨까 해서.”

또 무슨 저녁을 같이 먹자는 거야…….

플로라가 마른 침을 삼키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 아이든. 배가 고프지 않아.”

“그럼 내가 식사하는 거라도 보고 있어.”

“……뭐?”

“입맛이 없어. 네가 눈에 보여야만 뭐라도 좀 넘어갈 것 같아.”

“아이든.”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어. 바쁘기도 하고, 입맛도 없고.”

그가 불쌍한 척 호소했다. 플로라는 자신을 본다고 없던 입맛이 돌아오겠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아이든은 강경하게 버텼다.

“나 피곤해. 아이든.”

“밥만 먹고 보내 줄게. 가자.”

플로라의 의사 따윈 처음부터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듯, 아이든은 고갯짓을 하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테스트를 진행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플로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자 연구원들이 흘끔 플로라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복도에서 하필이면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을 딱 마주쳤다.

이곳에서 훈련을 진행하는 것인지, 마침 방을 나오고 있던 파르베와 카나락을 마주했다.

괴이하게 변한 피부는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소름이 끼치게끔 했다.

“그래. 파르베 경. 훈련을 하고 오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진전은 조금 있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센칸의 큰 쓰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중한 파르베의 태도에 아이든이 흐뭇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나락을 바라보며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나름대로 카나락에게는 예의를 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분께서는 어딜 가시는 모양입니다.”

카나락이 묻자, 파르베의 시선이 플로라에게로 닿았다.

보랏빛의 피부, 기묘하게 뒤틀린 입매, 검게 물들어 있는 동공을 바라보자 가뜩이나 곤두박질쳐 있던 기분이 더 땅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예.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고요. 카나락 님께서는 식사를 하셨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한 것 같군요.”

“그럼 얼른 보내드려야지요. 가 보세요. 식당에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혹 원하시는 게 있다면 요리사에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나락은 아이든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곤, 파르베를 따라 복도를 지나쳤다. 플로라도 아이든을 따라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을 남겼지만, 옆에서 자꾸만 말을 걸어 오는 아이든 때문에 더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 * *

칼날이 바람을 가르고, 정확한 방향으로 몸이 움직이는 그 느낌이 좋았다. 가벼운 몸짓과 절도 있는 동작들이 얽혀 바위라도 단숨에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플로라는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길 반복하며 손끝으로,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검으로, 마력을 흘려보내기 위해 집중했다.

“플로라 경!”

그때 누군가 그녀를 다급하게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 내면의 마력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플로라는 단숨에 유리처럼 그것을 깨어 버린 후 칼을 내렸다. 이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자신과 비밀 훈련을 하는 기사들뿐이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기사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는 평소 자신에게 말을 잘 거는 이가 아니었다. 플로라는 그의 다급한 표정을 보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죠?”

아직 어떤 일인지 듣지도 않았는데,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면서 불길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기사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플로라에게 말을 전했다.

“아이든 님께서…… 알렉샤 경을…….”

“알렉샤 경?”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플로라는 어서 성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기사를 제쳐두고 빠르게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알렉샤와 아이든의 이름이 한데 얽히는 건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처음엔 빠른 걸음으로 걷던 것이 점점 더 속도가 붙어, 성에 도착할 때쯤에는 거의 달리고 있었다.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멈추지 못했다.

“아이든은 어디 있죠?”

성에 도착해 지하까지 내려간 플로라는 눈에 띄는 아무나 붙잡고 다짜고짜 아이든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곤 플로라를 스쳐 지나갔다.

다급한 그녀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구는 모습에, 정말 자신이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플로라 경.”

“…….”

“이곳에 허락 없이 마음대로 내려오시면 안 될 텐데요. 오늘은 테스트 일정도 없으시잖아요?”

막무가내로 아이든이 자주 쓰는 방을 찾아다니던 플로라는, 자신에게 말 거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이든 님과의 선약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아니라면 나가 주시겠어요?”

“이봐요.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게 있는데, 지하로 연결되는 입구는 항상 기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허락이 없었다면 그들이 아무리 동료였어도 제게 길을 비켜 주었을까요?”

말을 걸어온 익숙한 얼굴의 여자는 아이든의 측근이었다. 인사도 없이 무례한 말을 하는 통에 플로라 역시 그녀에게 공격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자신을 싫어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놀라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심히 심기가 불편한 상태여서 플로라의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제가 설마 그들을 죽이기라도 했을까요.”

플로라가 실소 섞인 옅은 미소를 짓자,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든은 어디 있죠? 말해요.”

“선약이 없다면 말씀드릴 수…….”

플로라는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벽으로 밀쳐 몰아넣고, 몸을 밀착해 팔로 목을 졸랐다. 놀란 듯 동공이 커진 모양새에 속이 좀 시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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