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잠시 고민을 하는 척했으나 역시나 기억나지 않았다. 플로라는 이 침묵이 싫어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억나지 않는다고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저 혼자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실망한 것인지 아이든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불쌍한 강아지처럼 굴었다. 그러나 이내 혼자 자기 합리화를 끝낸 듯 살짝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됐지. 기억 못 할 만도 해. 네가 날 걱정한 일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
“아무튼 내가 슬퍼하고 있는데, 너는 날 걱정해 줬어. 괜찮냐고 물었지. 난 그때부터 네가 거슬렸어. 그땐 나도 어렸잖아. 날 걱정하는 네가 거슬린다고만 생각했지, 이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어.”
역시 기가 막히는 자기 합리화였다. 플로라는 그저 듣기만 했다. 자신이 질문한 것이니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도 끝까지 들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네가…… 이상하고 싫다고 생각했어. 감히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아 싫었고.”
아이든의 말을 듣고 있으니, 불현듯 잊고 있던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끔찍한 과오를 깨달았다. 정말 한때 그를 걱정했던 때가 있었다. 메린 성의 연구 초기 단계에 아이든은 많은 실패를 거듭했고, 그로 인해 라비우에게 항상 얻어맞기만 했다.
그때는 정말 아이든을 불쌍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라비우는 자신이 큰돈을 들였으니, 연구의 결과가 그만한 가치가 없으면 그 분노를 항상 폭력으로 풀곤 했다.
아이든은 제 주인에게 찍소리 못하는 찌질이여서 늘 얻어맞기만 했다. 연구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 같았다. 얼굴은 멍이 들어 얼룩덜룩하고 목덜미에도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는 아이든은 늘 의기소침해 보였고,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그래, 그를 걱정했었던 때가 생각나 버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폭력뿐이었다.
플로라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아이든에게 죽기 바로 직전까지 목이 졸렸던 때였다. 그는 네까짓 게 뭔데, 감히 자신을 동정하냐는 듯 화를 냈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아이든은 불쌍해 보였을 때조차 그런 놈이었으니까.
다만 충격적인 게 있다면, 자신이 실제로 아이든을 불쌍하게 여겼고 걱정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아이든이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니.
“네가 떠나고 많이 생각했어.”
“…….”
“그리고 이제 확실해졌고. 내가 왜 너에게만 알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지. 널 사랑하는 거야. 내 옆에만 두고 싶어. 네가 곁에 없을 때 난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고.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몰라.”
그의 고백이 하나도 와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감정이 조절되지 않아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고백하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플로라는 손에 들고 있던 케이스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이 점차 광기에 물들고 있었다.
“그냥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찾았고, 그러다 만나서 반가운 마음이 든 것뿐일 거야. 아이든. 다시 잘 생각해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난 널 다시 만나면 죽이겠다고까지 했어. 그런 날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
“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겠지. 아직 깨닫지 못한 것뿐이야. 너야말로 잘 생각해 봐. 솔직히 기분 좋지 않아? 내가 널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짜릿하지?”
말이 통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왜 이곳을 떠나겠다고 마음먹고, 널 다시 만나면 죽이겠다고 했는지. 잊었어? 아이든?”
플로라는 지그시 아이든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든의 앞에서 그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르네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었다.
“알아.”
“그런데도…… 날 좋아한다는 소리가 나와? 날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한 거냐고.”
“하지만 넌 날 죽이지 못하잖아. 나와 비슷한 마음일 테니까. 증오하면서도 좋아하는 거지. 아니야?”
“…….”
“그리고 플로라. 다시 말하지만 그때 그 일은 연구의 일부분이었어. 내가 내 기분 풀자고 죽인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큰 쓰임이 있었다고! 그 애에겐 영광일 거야.”
더 말해 봤자 입만 아플 것 같아 플로라는 대답하길 멈췄다. 르네와 그 아이를 떠올리자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앞으론 네가 원치 않는다면, 네가 이곳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을 거야. 내 다짐을 보여 주기 위해 사적인 훈련도 허락해 준 거고.”
그거참 눈물겹게 고맙네.
플로라는 비아냥을 꾹 내리누르며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플로라가 대답을 하길 포기하자, 단둘이 있는 공간에 침묵이 일렁였다.
하지만 곧 아이든은 그 침묵을 깨부수고 플로라가 탁자에 내려 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얼 하나 싶었더니, 어느새 목걸이를 분리한 그가 플로라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머리카락 좀 정리해 줘. 내가 걸어 줄게.”
그동안 했던 말은 제대로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앞서서 타인의 이야기는 완전히 차단시켜 버린 듯했다.
플로라는 다시 한번 분노를 내리누르며 한 자씩 곱씹어 먹듯 말했다.
“아이든, 이 선물은 마음만 받을게. 내겐 너무 과분해. 부담스러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에 비하면 참 차분한 대답이었다.
“알아. 네겐 부담스러운 선물이란 거. 하지만 내가 주잖아. 널 생각하면서 샀으니 받아 줘.”
“……아이든. 네가 주면 다 감사하면서 받아야 하는 거야?”
“이 목걸이, 네 봉급을 일 년은 모아야 살 수 있을까 말까 한 값어치의 보석이야. 게다가 내가 주는 거라고. 이게 고마울 일이 아니면 뭐야?”
플로라는 어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머리칼을 치웠다. 곧 아이든이 목걸이를 걸어 주곤 저 혼자 흡족한 듯 웃었다.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작태에 없던 정도 더 떨어졌다.
작은 펜던트가 달린 그저, 목걸이일 뿐인데 꼭 족쇄를 찬 것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플로라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했다.
* * *
아이든의 소름 끼치는 고백이 도화선이라도 된 양, 그는 그날 이후로 유독 더 플로라에게 집착했다.
‘네가 이곳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을 거야. 내 다짐을 보여 주기 위해 사적인 훈련도 허락해 준 거고.’
어쩐지 순순히 훈련 외의 시간을 갖는 것을 허락해 주더라니. 그의 딴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플로라는 그날로 돌아간다면 공식적으로 이 사적 모임을 인정받지 않을 것이었다.
비밀스럽게 모이는 것이 마음은 불편하고 들키진 않을까 불안해도, 스트레스는 지금보다 훨씬 덜 받을 것이었다.
“……플로라 경.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지?”
화살촉을 날카롭게 다듬고 있는 플로라의 곁으로 알렉샤가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요새 성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제발 아이든과 나의 소문이라고는 하지 말아 줘.”
플로라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물어 왔던 알렉샤가, 플로라의 쿨한 반응에 눈을 굴리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그 얘기인 모양이었다.
알렉샤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 것인지, 슬그머니 궁금증 또는 경계가 섞인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해명을 하지 않아도 당연히 개소리라는 걸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되려 첩자 정도로 의심받는 느낌이라 플로라도 금세 무척 불쾌해졌다.
“아이든이 요새 날 귀찮게 하긴 한다만. 다 개소리야. 알렉샤, 네가 그런 소문을 믿을 줄은 몰랐어.”
플로라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알렉샤를 꾸짖었다. 알렉샤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들 틈만 나면 수군거리는걸요. 예전부터 두 분 사이에 대해선 소문이 자자했었다고 하면서…….”
“그런 말에 흔들리다니. 알렉샤. 상대는 그냥 센칸의 기사도 아니고, 아이든이라고. 내가 기억을 잃은 머저리가 되지 않는 이상, 아니 머저리가 된다고 해도 아이든과 애정으로 엮일 일은 없을 거야.”
“알아요. 그래도 확인이 필요했어요. 그럼 물어본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해 봐.”
이왕 말을 꺼낸 김에 의심이 있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다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불쾌하긴 해도 대답해 주어야 하는 게 자신의 의무임을 알았다.
“두 분이 곧 결혼을 하신다는 것도…….”
그리고 알렉샤의 다음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플로라는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