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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29)화 (129/154)

129.

숲의 중간까지 넘어왔을 때까지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고요를 깨트리는 건 오직 플로라와 카나락의 발소리뿐이었다. 카나락도 자신과 별다른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거라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던 참에 그가 말을 걸어왔다. 타이밍 한번 기묘했다.

“경께서는 강한 마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네. 그렇다고들 하네요. 사용하지는 못하지만요.”

“음, 그런가요? 혹시 사용하기 싫은 건 아니고요?”

플로라는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무슨 뜻이지? 그가 뭔가 알고 있는 걸까?

마력을 느낄 수는 있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판단할 수 없을 텐데. 또한 마력을 모아 전투에도 쓰일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진행했다.

불현듯 이 숲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 바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뜻이죠?”

“마력에는 고유한 냄새가 있어요. 후각이 발달한 극소수의 예민한 마법사들은 마력의 흐름뿐만 아니라 그 냄새까지 느낄 수 있답니다.”

“…….”

“플로라 경은 마법을 사용하실 줄 아는 것 같던데요.”

긴장해야 할 상황이 오면 오히려 표정이 더 차분해지는 편이었기에, 순간 플로라의 얼굴이 굳어지려 했다. 플로라는 자신이 당황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눈을 두어 번쯤 깜빡였다가, 옅게 실소를 흘렸다.

“카나락 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

“알고 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잠시 하네칸에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마법사님께 듣기론 제가 마력은 가지고 있으나 사용할 수 없고, 제어 또한 하지 못해 제멋대로 새어 나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후각이 발달한 극소수의 예민한 마법사가 카나락 님이라면 아시겠네요. 지금도 제가 마력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아, 그래서 그런 거군요.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카나락이 어깨를 으쓱이곤 짧게 실소를 터트렸다.

듣는 쪽은 전혀 웃기지 않은 상황이라, 짜증이 솟구쳤다.

“하네칸의 대마법사님들에 대해서는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분들이시죠. 플로라 경께서 그분들을 만나보셨다니, 부러운걸요.”

대화의 주제가 다른 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플로라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힘겨루기를 한 것도 아닌데 고작 잠깐 대화한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길은 안내해 주고 그와 헤어질 요량으로 플로라는 티 나지 않게 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아이든 님과 라비우 전하께서 플로라 경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어요. 파르베 경을 가르치는 일도 있지만, 감시 또한 절 고용하신 이유에 포함되었답니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말에 플로라는 다시 걸음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말이 뭔가 이상했다.

“카나락 님, 그걸 왜 내게 말합니까? 이제 말했으니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겁니까?”

말하는 목소리나 표정을 보면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플로라는 가만히 카나락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고요.”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경과 조금 가까워지고 싶긴 합니다. 이상하게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이리 이상한 사람이니까 라비우가 고용했겠거니 싶었다.

“아무한테나 친근함을 느끼시는 편인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플로라 경의 마력에 대해선 보고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 정상인 사람이 있다는 게 드문 일이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설마 이런 걸로 감동을 받거나 갑자기 친근함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같잖은 수로 저를 떠보거나 빈틈을 노리려 하는 것이었다면 더더욱 오산이었고. 플로라는 더 이상 대답하는 것을 포기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곧 있으면 숲을 벗어난다.

“여기부터는 길을 알 것 같네요. 먼저 가겠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플로라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만 까딱이고는 다시 성을 향했다. 또 길을 잃으려는 속셈인지 아니면 어두운 숲에서 더 머물다 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나락은 어느샌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어졌다.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이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든과 식사를 진행하고, 티를 마셨다. 그가 계속 힐끗힐끗 플로라를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쳐다보는 시선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훔쳐본다’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계속 눈동자만 굴려 안경 너머로 플로라를 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말이라도 하든지 왜 저런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건지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참다못한 플로라가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아이든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플로라의 행동에 놀란 것인지 아이든이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움츠리곤 고개를 들어 플로라를 마주했다.

“무슨 일이야?”

그래놓고는 뻔뻔하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아이든.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아.”

딱 잘라 날카롭게 질문하자 그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생선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줄 게 있는데…….”

아이든이 자신의 로브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벨벳으로 감싸진 네모난 상자였다.

“이게 뭔데?”

플로라가 상자를 받아들고 물었다.

아이든의 귀 끝이 붉고, 뺨이 달아오른 걸 보니 뭔가 일이 이상하게 굴러간다 싶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이게 무어냐고 물었고, 일은 저질러졌다. 문득 소름이 끼쳐 오는 듯했지만 플로라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열어 봐.”

아이든이 굉장히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다. 그의 생기 있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더 섬뜩해진다. 머리는 이 상자를 열어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화제를 돌릴 만한 사건이 없었다. 플로라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별 모양의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 것인지. 플로라는 고장 난 사람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여야 했다. 억지로 웃음이 나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불쾌함을 표현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때?”

“갑자기 이게…… 뭐야?”

“지난번에 센칸으로 나갔을 때, 네게 주려고 사 왔어. 예쁘지 않아? 센칸의 수도에서 요즘 유행하는 목걸이라고 하던데. 보석 세공도 훨씬 비싼 걸로 했어.”

상자를 쥔 플로라의 손이 살살 떨렸다. 플로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이든이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구나.”

“아니야. 예뻐. 근데 이런 선물을 왜 내게 주는 거야?”

플로라의 말에 아이든이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점점 더 진지해지는 이 공기가 싫었다. 은근히 전달되는 그의 눈빛을 가만히 받고 있기 버거웠다.

센칸에 온 뒤로 아이든과 함께 있는 자리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감정을 완전히 죽인 채 살아갈 때는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해 편한 점도 있었는데, 이제는 감정에 대해 명백하게 알고 있다 보니 훨씬 이 상황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전에도 한 번 말한 적 있는데 네가 흘려들은 것 같아서.”

“……아이든.”

“좋아해. 플로라. 넌 내가 만든 작품 중에 최고야.”

“…….”

“평생 내 곁에 두고 싶어. 다음 주에 라비우 전하께서 방문하실 때 널 내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할 거야.”

아…….

“허락받는다면 나와 결혼하자. 그럼 임무에 나가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내 연구에 관심이 많았지?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해 줄게.”

……기필코 이번 주 안으로 아이든을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 버렸다.

이렇게까지 나서서 죽여 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는 해야겠다.’

플로라는 속으로 불쾌함을 꾹꾹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벌리면 무의식중 생각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이든은 이런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화가 나는 포인트가 하나둘이 아니라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놀랍긴 해. 전엔 내게 이런 감정은 아니었잖아.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감정을 죽인 채 살아갔더라도, 정말 아이든은 플로라를 싫어하곤 했다. 아니, 거의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보일 때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 취급을 받곤 해서 당연한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변하게 된 걸까?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소름이 끼치는 반면, 그의 감정이 왜 변하게 된 것인지는 궁금했다.

또다시 도망을 갈까 봐 옆에 사랑이란 이름을 빙자해 붙잡아 두고 싶은 걸까. 그냥 이상한 놈이라 이해하길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이 불쾌함의 이유 정도는 알고 불쾌해야겠다.

“예전에는 자꾸 네가 거슬렸어.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게 싫었거든. 혹시 그때 기억해? 라비우 전하께 혼나고 있을 때 네가 지켜보고 있었던 일. 내가 뺨을 맞고 슬퍼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떠나고 네가 걱정해 줬잖아.”

플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였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아이든을 걱정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을 때는 기억을 잃고, 이 메린 섬에 처음 도착했을 시기뿐이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을 제대로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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