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마법으로 된 비밀 서신은 자의식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 틈을 피해 은밀하게 전해졌다. 마법부에도 센칸의 첩자가 있을 수 있었기에 일은 조심스럽게 처리되었다. 온전히 제 사람이라고 믿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마법부의 몇몇 부하들에게만 단단히 일러 두었고, 그 때문인지 다행히 그것은 중간에 소멸하지 않고 리비에르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리비에르 님, 이건…….”
“다들 나가 있어.”
“설마 확인해 보시려고요?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허가받지 않은 마법이 그의 앞에 도착해 있다는 것은 극과 극의 성향을 가진 두 가지 경우이리라. 자신을 끌어 내리고 싶어 하는 세력이 보낸 흑마법이라든지, 또는 자신의 동료의 서신. 리비에르는 일전에 자신이 부탁해놓은 것이 있어 이 마법이 후자일 거라고 짐작했다. 더구나 자신은 워낙 하네칸에서 자리를 오래 비운 터라 자신을 끌어 내리고 싶어 하는 적대 세력도 없는 편이었다.
“괜찮아. 혼자 확인해야 할 일이니 나가 있어.”
리비에르의 부마법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의 뜻을 거역할 능력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사위가 고요해지자 리비에르는 서류를 내려놓고, 빛을 내는 작은 곤충처럼 생긴 그것을 바라보았다. 띠링띠링, 괴이한 소리를 내며 리비에르가 어서 확인해 주길 바란다는 듯 울어 댔다. 처음에는 진짜 곤충이라도 되는 줄 알고 때려잡을 뻔했지만, 그것이 금방이라도 소멸할 것처럼 불투명해지는 모습을 보고 마법임을 직감했다.
먼 거리로 서신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일반 마력을 지닌 이들은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마력보다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리라. 이 서신을 보낸 이가 저를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한 건지 알 것 같아 순간 마음이 짠해졌다. 그래도 긴 방황의 시기에 인생을 헛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리비에르는 마법을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부마법사가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이레나를 다시 잃은 마당에, 잘못 걸려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심정이었다.
문득 이레나를 떠올리니 또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아직 그녀를 내 딸이라고 불러 본 적도 없었다. 그 애가 어색해하진 않을까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식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 또한 자제해 왔다. 한데 이레나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그동안 만난 사람은 신기루였던 것마냥.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눈이 뒤집혀서 모든 걸 내려놓고 혼자라도 이레나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군주마저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황제 폐하 역시 그녀의 딸, 플로라를 소중히 여겨 준 까닭에 일은 잘 진행되어가는 중이었다.
리비에르는 이레나를 찾는 데에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전처럼 방향성 없이 막무가내로 넓은 대륙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정보를 수집하는 건 훨씬 수월했다. 비록 이레나가 지냈다던 그 섬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센칸의 왕이 ‘마법’에 관심이 많다는 소문과 유능한 마법사를 찾고 있단 소문을 듣고 일부러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두었다.
그리고 큰 수확이 있었다.
리비에르는 불빛을 내는 곤충을 손으로 잡아 복잡하게 얽힌 주문을 풀어냈다. 서신은 곧 글자를 만들어 내어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읽은 리비에르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 * *
“플로라, 네게 민감한 얘기인 줄은 알지만…….”
“뭔데?”
“파르베 경은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어. 라비우 전하께서 특별히 고용해오신 마법사야.”
“……알고 있어. 소문이 쫙 났는걸. 식당에서 얼굴도 본 적 있어.”
“그래?”
“응.”
“넌 정말 마법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 나는 네가 흥미를 느낀다면, 같이 수업을 듣게 하고 싶은데 말이야. 파르베를 가르치는 걸 보니까 정말 유능한 것 같더라고. 내가 마법에는 문외한이라 보는 것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은근히 떠보는 듯한 아이든의 목소리에 플로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한 번 말한 적 있잖아. 난 이제 마법에 관심 없어. 파르베 경은 마법이 재미있대?”
“생각보다 금방 배운다는 것 같아. 뭐…… 아직 거창하게 뭔가를 할 줄 아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마수의 마력을 가졌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파르베의 강한 의지 때문일까.
마법 습득력이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플로라도 빠르게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직감했다. 아마 파르베의 능력이 높아질수록, 플로라는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라비우나 아이든이 알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편리한 생활은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파르베는 신체 능력도 강화가 되어 있는데, 마법까지 완벽하게 숙지하게 된다면 플로라가 이길 수 없을지도 몰랐다. 등 떠밀리듯 일을 진행해야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돌발 사태에 대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 오던 게 있으니 그리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았다.
“파르베 경은 좋겠네.”
플로라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팔에 지익, 상처가 생기는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테스트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 줘.”
“……그럴게.”
“파르베 경은 유용하게 쓰일 거야. 이제 마법을 쓸 줄 알게 된다면 센칸의 문명도 더 발전하겠지?”
아이든은 기대가 된다는 듯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아이든. 다른 연구는 진행하지 않아? 파르베 경에게 했던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루엘들에게 이미 진행하고 있어.”
“…….”
“파르베가 특이한 경우였고, 연구가 완벽하지는 않아.”
“그렇구나.”
“내 연구가 궁금한 거야, 플로라? 예전에는 아예 관심도 없더니. 요새는 연구에 대해 좀 자주 묻는 것 같은데?”
언제 친근하게 대화했었냐는 듯이 아이든은 날 선 목소리를 내었다. 또 별걸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플로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랬어. 거북했다면 사과할게.”
플로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사과를 던졌다. 비록 아이든은 받아 주지 않았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조금 있으면 또 침묵을 못 견뎌 저 혼자 재잘거릴 것이 분명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플로라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네게 파르베와 같은 마력을 넣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하지만 넌 너대로의 쓰임이 크니 마음대로 연구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네게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고.”
아이든이 정말 아쉽다는 투로 입맛을 쩝, 다셨다. 플로라는 눈꺼풀이 의지와는 다르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꽉 물었다.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서슴없이 실험을 해야겠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당장이라도 저 입속으로 칼을 쑤셔 넣고 싶다. 순간, 플로라는 지난번 복도에서 마주쳤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애는 무사히 돌아갔을까. 돌아갔다고 한들 실험은 끝나지 않을 텐데. 그 작은 몸으로 혹독한 실험들을 견딜 수 있을까.
“연구가 아직 많이 불안정한가 봐.”
“그래. 아직은…… 루엘들에게 실험해봤을 때, 결과가 장난 아니야. 사람이 막 녹아내렸다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펑 터지기도 하고, 그렇다니까. 하네칸의 건국제 기억해? 그때 하늘 위로 폭죽이 솟아올랐잖아. 마치 그것처럼…… 장관이었어.”
“어린 루엘들에게…… 연구를 하는 거야?”
“다양한 연령층이야.”
아이든은 신이 나서 재잘거리다가, 플로라가 침묵하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 역시 잠시간 말을 멈췄다.
이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걸 보며 아마 그는 르네의 아이를 떠올렸으리라 생각했다.
“참, 다음 주에 라비우 전하가 방문하시기로 했어. 이번에도 네 경기에 거는 기대가 크신 듯해. 컨디션 조절 잘해 둬. 기분 좋으실 때, 이제 임무를 달라고 부탁해 보자. 너도 전하께 충성을 맹세할 때도 된 것 같고.”
“……그래. 그래야지.”
아이든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플로라는 덤덤히 대답했다.
하지만 라비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플로라는 살짝 눈을 뜨고 아이든을 노려보았다. 한 번 마음을 먹고 나니, 단단하게 굳어져서는 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든을 죽인다. 죽이고 싶다.
그것만이 그녀의 삶의 목적이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