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이브니에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깨어난 이브니에도, 카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경이 진심으로 과오를 반성하고 있다면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경을 헤맬 때 아르제카 신께 자신의 실수를 되돌리고 싶다고 빌었다. 그래서 이브니에는 저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참 간사하지. 후회라는 것을 했으면서도 선뜻 도와드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두려움에 휩싸였기 때문일지 몰랐다.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어깨와 손이 제멋대로 떨렸다. 바로 눈앞에서 황제를 마주하고 있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이의 목소리는 한없이 온화했다. 당장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은 마음이었을 텐데도 시몬, 그는 평온을 유지한 채 이브니에에게 몸 상태를 물었고, 도움을 청했다. 그 속에도 분명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날은 숨겨져 있는 듯했다. 과연 한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브니에는 자신이 벌인 일이 수치스럽고 창피해 고개조차 똑바로 들 수가 없었으나, 용기를 내어야 할 때라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카신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푸른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심해에 빠진 듯해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단장의 눈빛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카신의 눈에는 여전히 혐오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응원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리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지만. 착각이라 하더라도, 그 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꾸만 떨구어지려는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없을 테니, 며칠 생각해 보도록 해.”
이브니에가 할 말을 잃은 채 카신만 바라보고 있자, 시몬은 당장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그녀가 선택해야 할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반역자로 죽느냐, 아니면 죄를 고백하고 사면받느냐.
메린 섬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 무척 바빴기에, 시몬은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 낭비를 할 수 없었다. 카신에게 이브니에 경이 결정을 했다면 전해 달라 명령하고 치유실을 빠져나갔다.
거대한 폭풍처럼만 느껴지던 황제가 사라지자, 조금 숨통이 트인 이브니에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좀 누워 있어.”
그런 이브니에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카신이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눕도록 도와주었다. 이브니에가 마른침을 삼키며 카신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따뜻함을 느낄 때마다 와락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주책맞은 심장이 계속해서 뛰었다. 그를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걸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대장.”
이브니에는 겨우 입술을 떼어 중얼거리곤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 * *
플로라는 식당에서 고고하게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파르베를 보았다. 그래도 아직 사람은 사람인 건지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목구멍에 음식을 처넣는 모습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파르베의 앞에는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는데, 그에 대한 소문이 워낙 많아 어떤 사람인지 알고는 있었다. 파르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사람이었다. 오늘 새로 왔다지. 파르베의 모습이 두렵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때 알렉샤가 멀뚱하게 서 있는 플로라를 빈자리에 앉혔다.
“플로라 경, 식사부터 하세요. 든든하게 드셔야죠. 오늘도 야간 훈련이 있잖아요.”
알렉샤의 말에도 플로라는 파르베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때 파르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플로라 쪽으로 고개를 시선을 던졌다. 그는 플로라를 한참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마저 했다. 비위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이 섬에 있는 것들처럼 미쳐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주변에서는 알게 모르게 파르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댔다. 플로라가 오래전 혼자 식사를 하러 올 때마다 들어야 했던 그 수군거림들을 이제는 파르베가 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측은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가 한 짓과 하고 있는 짓, 앞으로 할 짓들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약과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파르베, 그가 직접 선택한 가시밭길이었다.
“플로라 경은 다음 주에 있을 경기에도…… 출전하셔야 하나요?”
“응?”
알렉샤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탓에 플로라의 시선이 결국 제 앞에 앉은 소년에게로 넘어왔다. 알렉샤가 둥그런 눈을 깜빡거리며 걱정스럽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출전? 하고 고개를 갸웃했던 플로라가 또 다른 태산을 만난 것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에 라비우가 방문한다고 했다. 라비우가 방문할 때면 항상 열리는 그 경기가 또 개최될 것이니 플로라는 이곳 사람들의 유희거리가 되어야 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마 아이든이 말을 제대로 전했다면, 라비우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 수도 있겠지.
아아, 벌써부터 다음 주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제가 대신 나가 볼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플로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알렉샤를 혼냈다. 그는 제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가끔은 너무 저돌적이어서 두려웠다. 타인의 시선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플로라의 꾸짖음에 알렉샤가 살짝 주눅이 든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사이, 식사를 마친 파르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르베는 식당을 빠져나갈 때가 되어서야 플로라를 발견했는지, 눈을 맞추곤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얄미운지 몰랐다. 보랏빛으로 변해버린 피부 때문인지 전보다 인상이 더 험악해진 듯했고, 그저 웃는 것일 뿐일 텐데도 광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가 플로라의 앞으로 다가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플로라 경, 오랜만이에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던 알렉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숟가락을 떨어트릴 정도였다. 파르베의 행보에 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몰렸고, 플로라는 상당히 불쾌해졌다.
“우리가 반갑게 인사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뒤끝이 좀 있으신 모양이네. 저는 이제 선배에게 아무 감정 없는데요. 다시 한배를 탄 사이가 됐으니까…….”
“난 뒤끝이 좀 있어서 감정이 많아. 그러니 꺼져. 여기 있는 사람들도 특별히 널 반기진 않는 것 같은데 말이야.”
냉랭한 반응에도 파르베는 약간의 타격도 입지 못했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선배랑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
그가 살짝 상체를 숙여 고개를 기울였다. 제멋대로 구는 건 여전했다.
“이분은 카나락 님이세요. 유능한 마법사시구요. 라비우 전하께서 저를 위해 특별히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보내주셨어요.”
“…….”
“선배는 하네칸에 계셨잖아요. 대마법사님들께 뭐 배운 거 없으세요?”
“없어.”
“아쉽다. 선배한테도 마력은 느껴지는데 왜 쓰지 못하시는 걸까요?”
파르베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카나락이라는 마법사를 보았다. 카나락은 가만히 플로라를 바라보았지만 그 어떤 말도 먼저 꺼내진 않았다.
“이참에 아이든 님께 말해서 저와 함께 마법을 배워보시는 것 어떠세요?”
“마법엔 더 이상 관심 없어.”
“가진 재능이 아깝지도 않으세요? 선배는 종종 어리석은 선택을 하시는 것 같아요.”
플로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 넣어두었던 단도를 꺼내 휘둘렀다.
기다렸다는 듯 파르베가 공격을 피하며 씩 웃었다.
“그 성격 좀 죽이세요. 우리 같은 편이라니까.”
“다른 기사들과는 같은 편이 될 수 있어도, 너랑은 못하겠다.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내 눈앞에서 얼쩡대지 마.”
“무서워라. 그럼 선배, 마음 바뀌면 얘기해 주세요.”
파르베는 이 이상의 도발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마법사와 함께 식당을 떠났다. 그제야 적막하고 무언가 터질 듯하던 긴장감이 확 풀렸다. 사람들의 시선도 하나둘씩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언제나 끔찍하다.
“플로라 경……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린 알렉샤가 말을 더듬거리며 플로라를 챙겼다.
“괜찮아.”
플로라는 도로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저를 들었다.
“……파르베 경은 정말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옆에 오시면 괜히 무섭고 긴장이 되고 그런다니까요. 마수를 봤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마수의 마력을 가졌으니 그렇겠지.
“밥이나 먹자. 안 그래도 없는 밥맛, 더 떨어지고 싶지 않아.”
플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식사를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한 번 잃어버린 입맛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식사는 마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