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얼마 후 시몬이 입을 열었다.
“정신을 잃고 꿈 속을 헤맬 때 사역마를 만났다.”
‘사역마’라는 말에 모두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몬에게 새겨져 있는 사역마의 흔적은 현신의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더군. 좀 더 크게 다쳤다면 저가 나섰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나 뭐라나, 어찌나 잔소리를 해 대던지.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마음으로는 빨리 정신을 차리고 싶은 심정이었어. 성가시게 하는 게 꼭 누구랑 닮았더군.”
시몬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이든을 힐끗 보았다.
이든은 갑자기 제게 불똥이 튀자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경들이 나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안심해도 돼. 그리고 조급하게 생각해서 말한 건 아니었네.”
시몬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도 처음 플로라에게 센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땐 신중하게 대처할 예정이었어. 나름대로 착실히 정보도 끌어모으고, 기회를 엿보면서 뭐 하나 걸릴 걸 기다리고 있었다고.”
“…….”
“옳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해. 우린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어가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나는 참고 버틸 수가 없어졌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까지도 잃었으니.”
부단장 에반은 그럼 차라리 정식으로 센칸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냔 생각을 잠시 했지만, 황제의 눈빛에 찬 결의를 느끼고 결국 한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더 때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다음으로 잃는 것은 경들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어.”
이미 그의 고집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을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도 더 이상 시몬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하는 거겠지.
“이 일이 알려지게 된다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떠나기 전에 귀족들에게 이 사실에 대해 통보는 할 거야. 경들의 생각처럼 반발은 일어나겠지. 센칸을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내부적으로 아주 긴 전쟁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난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기로 결심했네.”
“…….”
“내가 외면해 온 모든 것들을 이제는 바로잡을 때라고 생각해.”
시몬은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날 도와주지 않겠나?”
자신이 죽는 것보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더 아프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지금, 그는 더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 * *
“대장!”
긴 회의를 마치고, 기사단 본부에 있는 단장실에 잠시 들르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에르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 루가르가 서 있었다.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갑자기 불쾌해진 에르네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무슨 일이지?>
종종걸음으로 제게 달려와 정중하게 인사한 루가르가 눈을 반짝거렸다.
“플로라 경의 소식은 아직입니까? 혹시 들으신 게 있으면 제게 언질이라도…….”
<루가르 경.>
루가르를 보자마자 그녀가 어떤 질문을 할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자 괜히 이골이 났다.
<플로라 경의 일은 네게 말할 수 없어.>
그녀가 플로라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인심을 써서 위치 정도는 파악했다고 말해 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기 싫었다.
플로라를 걱정하는 루가르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보아하니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은데. 왜 자신을 버려가며까지 타인을 신경 쓰는 것인지. 에르네는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모습이었다.
“찾아보고 계시긴 한 거죠?”
<찾아보지 않는다면?>
“단장님!”
<말도 없이 본부를 이탈한 기사 한 명 때문에 내가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루가르 경.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
<애초에 믿지 못할 사람이었다. 루가르 경. 정신 차려.>
“거짓말하고 계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진짜 믿지 않으셨다면 근위대에 영입하지 않으셨겠죠.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도. 대장은 그런 분이시잖아요.”
루가르가 입술을 삐죽였다.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자꾸 마음에 거슬렸다. 거슬리는 것조차 불쾌했다.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 부정하려고 해도 자꾸만 원점이었다.
“……지금 제게 말해 주실 수 없는 문제라면 나중에라도 꼭 말해 주세요. 플로라 경께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어 찾아와 봤는데, 역시 그러면 안 됐던 거겠죠? 죄송합니다. 대장님.”
<…….>
“제가 주제넘는 질문들을 했다는 거 알아요. 반성하겠습니다.”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잘못을 읊던 루가르가 힘없이 돌아섰다.
이러나저러나 성질이 가시처럼 돋아나는 건 똑같았다. 욱신.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증과 함께 짜증이 함께 솟구쳤다.
<찾고 있으니 기다려. 조만간 결판 날 테니.>
그는 결국 또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 루가르와의 싸움에서도 또 밀렸다. 루가르와 관련된 일이면,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승리한 적이 없었다.
<잠 좀 자고. 식사 거르지 말고.>
폐하에게는 일부러 져 줄 때도 많았는데, 루가르는 좀 달랐다. 이겨 먹으려고 해도 좀체 생각처럼 되지가 않았다.
에르네는 단장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가, 자신을 멍하니 보고만 서 있는 루가르의 얼굴을 슥 보았다. 얼굴에 혼란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르네의 마음도 그녀만큼이나 혼란으로 빼곡했다.
<뭐 할 말이라도 남았나?>
에르네는 부러 퉁명스레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가르가 고개를 설설 가로 저었다.
“아, 아니요! 없습니다.”
<이만 가 봐.>
그는 도망치듯 단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더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듯 일부러 문도 세게 쾅, 닫아 버렸다.
아까부터 자꾸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위험했다. 에르네는 칼에 찔린 것 같은 제 가슴을 천천히 문질렀다.
루가르의 힘없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더 때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다음으로 잃는 것은 경들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어.’
그녀가 사라져 버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폐하께서도 비슷한 마음이시겠지. 에르네는 이를 악물었다.
* * *
미약한 빛이 밝히고 있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커다란 쇠문을 열었다. 플로라에겐 익숙한 연구실이었다. 그녀와 아이든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실험을 자행했는지 피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아이든을 발견한 연구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이지?”
“……보고드린 대로, 파르베 경에게 행했던 실험을 동일하게 진행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아이든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던 것을 듣던 중, 플로라의 시선에 무언가 걸렸다.
바닥을 보자, 아직 미처 다 치우지 못한 핏자국들이 보였다. 일반 사람의 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피 또한 보랏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으니.
미친놈들. 그녀는 살짝 이를 악물었다가, 이내 재빠르게 표정을 감췄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겨우 바닥에서 시선을 떼자 아이든이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먹이 연구원의 뺨을 향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퍽, 하는 소리에 미약한 신음과 함께 남자 연구원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쓰고 있던 금테 안경은 저만치 날아간 후였다.
“시간 맞춰 제대로 정리해놓으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아이든의 난폭한 모습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여섯 명이나 되는 모든 연구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하얀 로브에도 보랏빛 핏자국이 드문드문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격렬한 실험을 했기에…….
플로라가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저어…… 아이든 님. 이걸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어떤 연구원 한 명이 용기 내어 아이든을 향해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그게 연구일지라는 것을 깨달은 플로라의 눈이 반짝였다.
비밀스럽고 음험한 데다 위험한 연구를 하고 있던 아이든의 비밀 연구 메모장은 챙겼으나, 저런 세부적인 내용이 담긴 연구일지도 빼돌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서류를 받아든 아이든이 의심스럽단 눈으로 연구원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이내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그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정말 결과가 이랬나? 하…….”
그리고 그가 언제 난폭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웃음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연구원들을 향해 물었다.
연구원들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지 못한 장면을 다시 볼 수 있는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
“그거 참 장관이었을 텐데 말이야.”
갑자기 아이든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그의 쩌렁쩌렁한 웃음은 한참이나 이어졌으나, 누구 한 명도 말릴 생각이 없다는 듯 고요했다. 플로라만이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며 선뜩한 눈동자에 그 모습을 담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