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아이든이 제 방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언뜻 느끼기엔 테스트 약속이 되어 있던 시각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는 플로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 굉장히 즐거운 듯 보였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순진하게 눈을 굴리며 플로라를 반겼다.
“플로라, 네가 날 만나러 와 주다니!”
“……오늘따라 훈련도 하기 싫고, 테스트도 해야 하니 네 생각이 나더라고. 좀 일찍 가서 차라도 한잔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야.”
플로라가 아쉽다는 투로 말하자, 아이든도 덜컥 그 말을 믿으며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데 말이야. 지금이라도 차 마시고 시작할까?”
“하지만 널 돕는 다른 분들이 기다리시잖아.”
“말 그대로 날 돕는 거니, 내 일정이 늦어지면 기다려야지.”
아이든은 일말의 미안함도 못 느끼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참, 성에서 전하를 뵙고 왔어.”
“전하는 잘 계셔?”
“늘 똑같으시지. 기복이 거의 없으신 분이잖아.”
아이든은 라비우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빛냈다. 그는 이상하게 라비우를 진짜 자신의 주인인 것마냥 섬기고 있었다.
“네 이야기를 나눴어. 전하께 네가 충성을 맹세하고 싶어 한다고 전달 드렸어.”
“그래? 전하께서는 뭐라셔? 아직 날 믿지 못하실 텐데…….”
“곧 직접 널 보고 판단할 거라고 하시는군. 그래도 꽤 긍정적인 반응이셨어.”
아이든은 정말 기쁘다는 듯 맑게 웃어 보였다. 플로라가 정말 센칸에 복종하리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미소였다. 플로라에게 좋은 소식은 결코 아니었지만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어 보였다. 향긋한 티를 우려낸 아이든이 플로라의 앞에 잔을 내려놓고 마주 앉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응.”
“근데 나 때문에 육지까지 나가서 전하를 뵙고 온 거야?”
“아, 그 일 때문만은 아니고…….”
아이든이 말을 골라내듯 잠시 숨을 삼켰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번에 하네칸에 초청받아 다녀오면서 그곳 사람과 거래를 좀 한 물건이 있거든.”
“물건이라면? 마법석 말하는 거야?”
마법석을 꾸준히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래하는 이들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거래를 그만둘 수 없도록 그들을 압박하고 위협했을 거라는 것도.
문득 이브니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 말고도 아마 거래하는 사람들은 더 있을 터였다.
“그것도 있고…… 아이들도 몇 데려왔거든.”
“뭐?”
“뭘 그렇게 놀라? 새삼스럽게.”
아이든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 데려왔는데?”
“그야 당연히 우리랑 같이 왔지. 같은 배를 타고 있었는걸.”
“……납치한 거야?”
“무슨 소리야? 정당하게 값을 주고 거래했어. 오고 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둬서 키우다가 필요할 때가 되면 우리에게 보내는 거지. 그 작자, 이 일로 돈 꽤나 벌었을 거야.”
플로라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하네칸에서 벌어졌던 실종 사건이 문득 떠올랐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이야?”
“……뭐가?”
플로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하자, 곧 아이든이 물었다.
플로라는 사색에서 벗어나 다시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센칸을 떠나기 전에도 먼저 내게 들르는 법은 거의 없었잖아. 네가 날 기다렸다고 하니까 이상해서.”
아이든의 표정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예리한 눈을 빛내다가, 플로라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맞추자 다시금 순수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미소짓기 시작했다.
“무슨 일 없어. 말했잖아. 훈련하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그 말을 믿어야 해? 플로라, 넌 날 용서한 거야?”
“어떤 용서?”
“네가 이곳을 떠나던 날을 종종 생각했어. 넌 날 원망하고 있었잖아. 하네칸에서 센칸으로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널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해 줘.”
“갑자기 네게 호의적인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그래. 물론 난 널 좋아하기 때문에 금방 휘둘리지만, 가끔은 걱정이 될 때도 있어.”
플로라는 옅게 실소를 터트렸다.
“예전 일들을 마음에 담고 사는 건 내 스스로에게 못 할 짓이더라고. 호언장담하며 센칸을 떠났지만 난 네게 쫓기기만 했지 복수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냥 체념하는 게 내게도 또 모두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 너와 다시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거야. 아이든.”
“그래?”
“응.”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아이든이 차분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그럼 같이 노력해 보자. 나도 널 믿도록 해 볼게. 미안해. 자꾸 의심해서.”
“……응. 네 말대로 시간이 필요할 거야.”
플로라는 다 이해하는 것처럼, 세상 좋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아이든을 보았다. 악에 받친 외침들은 꾹 내리누른 채로.
* * *
같은 시각, 하네칸에서는 아직도 플로라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벌써 그녀가 사라진 지 한 달여가 지났다. 시간이 이리도 빨리 흐를 수 있다는 걸 요즘 들어 더 적나라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커다란 회의실 안에는 시몬 황제를 필두로 그의 측근과 기사단장들이 모여 있었다. 백기사단의 소속 마스터 사르트와 그리고 리비에르의 발표에 사람들은 수심 가득한 눈빛으로 서류를 보며 침묵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성기사단, 그리고 흑기사단의 단장은 센칸의 실체가 낱낱이 적힌 서류들을 보며 더더욱 충격받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키라의 얼굴에 아주 오랜만에 웃음이 지워진 채였다.
충격에 말문도 막혔다. 감히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하네칸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던 실종 사건들도 일련의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플로라 경이 센칸에서 왔다면, 일부러 함정을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인 겁니까?”
플로라를 가까이에서 보지 않았던 성기사단의 단장은 그녀를 가장 먼저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를 가까이 두고 보았던 모두가 플로라를 믿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를 대표하여 시몬이 대답했다.
“단장이 의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플로라 경은 믿을 만한 사람이야.”
황제의 대답이니, 단장은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신관님과 차기 대신관으로 거의 확정된 이든까지도 시몬의 말을 따르고 있으니 자신도 별수는 없겠다고 판단해 더 이상의 목소리를 내지 않기로 했다.
사르트와 리비에르는 주변이 조용해진 듯하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르트는 플로라와 백작령에 다녀왔던 직후부터 ‘센칸’을 조사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면 그저 넘어갔을 작은 일들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기 이르렀다.
리비에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욱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마력이 고갈되어 다신 쓰지 못하게 되더라도 센칸 같은 작은 나라 하나쯤은 쑥대밭으로 만들겠단 심정이었다.
마법석 밀매, 마수로 변한 듯한 인간, 실종 사건, 그리고 과거 베일리스 가문의 수양딸 이레나 실종 사건과 그녀의 정체가 곧 플로라라는 사실까지. 그들은 가감 없이 모든 것을 전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으나 곱씹을수록 센칸에 대한 분노는 거세어지기만 했다.
“이 사실들을 알았을 때 진작 전쟁을 일으켜야 했어.”
“……그러실 수 없었을 겁니다. 과거로 돌아가신다고 해도요.”
시몬이 자책하자, 곁에 앉아 있던 이든이 그를 위로했다.
센칸. 작은 속국이라고만 생각했던 곳에서 크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들의 본거지는 이쯤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보입니다. 섬에 대한 정보는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것 같더군요.”
리비에르는 플로라가 말했던 것을 토대로 센칸 주변에 위치한 섬들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 그리고 지도에도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작은 섬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비인간적인 실험들을 자행했다면, 지도에 표기된 곳은 아닐 터였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곳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수 있었겠지.”
“…….”
“출발은 언제쯤 하는 것이 좋겠나?”
시몬이 미간을 좁힌 채 묻자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때 근위대 부단장이 침묵을 깨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하게.”
“아직 적의 병력 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폐하의 몸이 다 낫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근위대의 부단장이 진중하게 말을 전하자, 카신과 에르네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지금 당장이라도 좋으니 센칸에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만약 정말로 플로라가 지금 그곳에 있는 것이라면, 그녀가 감당하고 있을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플로라를 위한다면, 더욱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회의장에는 다시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