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22)화 (122/154)

122.

“저…… 플로라 경.”

훈련을 진행하던 알렉샤가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플로라에게 말을 걸어왔다. 넋을 놓은 채 애꿎은 나뭇잎만 바라보고 있던 플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다 된 모양이군.”

“……네.”

“가지. 참…… 오늘 오후 훈련이 있던가?”

“네. 있습니다.”

“끔찍하네. 벌써 허벅지가 터질 것 같고 허리가 쑤시는 기분이야.”

플로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좁혔다. 그에 나란히 걷던 알렉샤가 돌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플로라는 미간을 찡그린 채 알렉샤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뒤늦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알렉샤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였다.

“어느 부분이 웃긴 거야?”

“아, 훈련이 끔찍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이요.”

“…….”

“비웃은 건 아니었어요.”

혹시라도 플로라가 오해할까 알렉샤가 말을 덧붙였다.

“그럼?”

“플로라 경은 신입 기사들 사이에서는 신화 속에 나올 만한 존재였어요. 경이 센칸을 탈출하실 당시 저희는 일개 루엘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그때 저희는 식사도 개별 식사만 했고…… 훈련장보다는 연구실에서 능력치 테스트를 받는 일이 더 많았죠. 미래가 불투명했고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면서 살아남고 또 많은 업적들을 세워 명예를 얻으셨으면서 탈출까지도 감행하셨다니, 소문으로 듣기엔 경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

“실물로 처음 뵀을 때도 그렇고 말을 처음 섞었을 때도 그렇고, 플로라 님은 차갑고 두렵고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훈련이 끔찍하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 라는 걸 느껴서…… 그래서 갑자기 웃음이 났어요.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야. 알렉샤.”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요.”

“기분 안 나빠. 괜찮아.”

플로라는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슬그머니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알렉샤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온몸을 난도질당하는 연구 대상이 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닌 건 아니야. 경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지금 보니 그렇네요. 잘 알아둘게요.”

분위기가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알렉샤가 농담을 건넸다가 플로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오묘했다. 플로라가 한쪽 눈썹을 구겼다.

“뭐야? 그 표정은? 경에게 동정해 달라고 한 적 없으니 넣어둬.”

“솔직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는데요…… 플로라 경을 보다 보니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뭘?”

“왜 센칸에서 도망을 치셨던 건지요.”

플로라는 알렉샤의 말에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순간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며 주변을 살폈다.

“날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앞으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플로라 경도 잘만 하셔놓고…… 왜 제게 그러십니까?”

“나랑 넌 달라.”

“경께서는 다른 기사들에게도 탈출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을 하셨다면서요.”

“알렉샤 경. 난 그런 말을 하더라도 앞으로의 삶이 괴로워질지언정 목숨까지는 잃지 않아. 하지만 경은…… 달라.”

“…….”

“죽고 말 거야.”

플로라는 아이든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비록 자신에게도 가끔 성질을 죽이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그가 자신을 특별 취급하고 있는 거라는 걸, 플로라는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일개 다른 기사가 자신과 같은 말을 입에 올린다면 그가 얼마나 미친놈처럼 길길이 날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인간을 얼마나 잔혹하게 죽일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기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럼 왜 저를 처음 본 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센칸이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셨잖아요.”

“…….”

“제가 보기에는 플로라 경께서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았’다니. 자신이 그랬던가. 플로라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알렉샤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당연히 해야 마땅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거라고 지적했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모두 옳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그 말을 계속 생각하게 하셨잖아요.”

“깊이 생각해 줘서 고마워. 알렉샤 경. 하지만 계속 생각해 봤으면 더더욱 알 거 아냐.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

“경을 위해 하는 말이야. 때를 기다려. 지금 경의 생각은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어.”

알렉샤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요. 저는 플로라 경의 편을 들기로 했다는 거요.”

“…….”

“생각해 보면 그동안 저는 억지로 잊으려고 했던 것들이 많았어요.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현실에서 도망치려고만 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제게 다짐하는 듯한 알렉샤의 말에 플로라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래전, 이곳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기어코 도망치기로 결심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플로라 경! 알렉샤 경! 훈련 다녀오십니까?”

멀리서 훈련에서 몇 번 부딪쳐 인사를 나누고 검을 겨눴던 기사들이 인사해왔다. 반갑다는 듯 그들의 얼굴에 자연스레 걸려 있는 미소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플로라도 옅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어쩌면 이곳은 더 이상 괴물의 소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 * *

플로라가 자연스럽게 아이든의 방이 있는 지하로 향했다. 복도를 오고 가는 연구원들이 플로라를 발견하곤 슬금슬금 길을 피하거나, 그녀를 대놓고 위아래로 훑어보며 불쾌한 눈빛을 했다.

“플로라 경?”

“……예.”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이든과 그나마 오랫동안 함께 했던 연구원이었다. 플로라도 예전부터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고작 일 년 반 사이에 좀 더 얼굴에 주름이 늘어난 듯 보였다. 원래도 코가 길고 뾰족한 데다 입술은 작고 눈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 있어 심술부리는 마녀처럼 보였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어쩐지 예전보다 더 깐깐하게 느껴졌다. 피부를 베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플로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연구원이 물었다.

“어딜 가고 있나요?”

“아이든이 불러서요.”

“아이든 님께서?”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플로라는 자신을 의심하는 눈빛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아직 테스트를 진행하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할 텐데요.”

그녀는 곧 하얀 로브에서 금으로 만들어진 회중시계를 꺼내 살피다 미간을 좁혔다.

“일찍 도착했어요. 테스트에 앞서 아이든과 티라도 마실까 해서.”

“……아이든 님께서는 방에 계시지 않을 텐데요.”

“어딜 가셨나요?”

“잠깐 볼일이 있다고 하셔서 오전부터 육지로 나가셨습니다. 시간 맞춰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그럼 금방 오겠네요. 먼저 가 있겠습니다.”

플로라의 말에 여자가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플로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이상할 것은 없는 반응이었다. 자신을 센칸에서 도망친 배신자 정도로만 보고, 잔뜩 경계하고 있겠지. 플로라는 자신과 함께 훈련하는 기사들과는 달리, 이들과는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아이든과 다를 바 없는 미친 작자들뿐이었으니까.

돌려보내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판단했는지 여자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조금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플로라는 짧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아이든의 방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방에 들어서자 지저분한 광경이 한눈에 보였다.

한쪽 진열대에는 알 수 없는 색색의 시약들이 가득하고, 책상은 서류로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있었다. 플로라는 잠시 망부석처럼 선 채 눈으로만 주변을 훑었다가, 천천히 아이든의 책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워낙 글씨를 휘날려 쓰는 터라 억지로 살펴보지 않으면 글자 같지도 않았다. 플로라는 일찍 이곳에 도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이든의 책상 위 서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아이든의 약점을 잡기에, 센칸의 약점을 잡기에 좋은 것이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그 사이 누군가 들어오진 않을까 심장이 뛰었다. 시선은 책상 위에 둔 채로, 바깥으로 예민한 기척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득 예전에 첩자 노릇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사람을 회유해 기밀을 빼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증거 자료를 수집해야 할 때도 있었다. 센칸에서 배운 짓으로 센칸을 무너뜨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자, 갑자기 이 일이 한층 더 짜릿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들에게 하나씩 돌려주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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