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21)화 (121/154)

121.

플로라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이 와도 의연하고 담담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아이든이 언제든 자신을 연구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에나 잘해 주는 척 꼬리를 살랑거리지, 곧 있으면 이빨을 드러낼 거란 것도 이미 다 파악했던 사실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빨리 그 시간이 도래했을 뿐.

플로라는 멍하니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하면서도 기뻐하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그녀를 실험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친놈. 턱 끝까지 올라온 욕설을 플로라는 겨우 내리눌러 삼켜냈다. 그래, 자신이 그동안 참아왔고 또 참아내야 할 것들에 비하면 이 정도 욕설을 참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른 임무는 받지 않는 건가?”

“임무를 받고 싶어?”

“매일 같은 훈련을 받는 것보단 낫지.”

“라비우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다면. 지시를 내려주실 거야.”

충성을 맹세한다라…… 플로라는 자신이 없었다. 거짓으로라도 라비우에게는, 센칸에게는 충성을 맹세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목적을 가지고 다시 이곳에 왔으니, 이루기 전까지는 무엇이든 해야겠지. 플로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지.”

“전하께 말을 전해 둘게.”

“고마워. 아이든.”

플로라가 고맙다는 말을 하자, 아이든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아, 아까는 미안해. 플로라.”

가까이 다가선 아이든이 헝클어진 플로라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그 손길이 소름 끼치게 싫었으나, 플로라는 꾹 인내했다.

“그런데 아이든.”

“응?”

“실험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

“뭐가 궁금해?”

플로라의 질문에 아이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그는 자신의 실험에 굉장히 민감해서 관련한 질문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도 예외로 적용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라비우와 연구원들이었다. 플로라는 애초에 실험 도구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험과 루엘들에 대해선 말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좀 다를까 하여 넌지시 말을 꺼내 보았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예민하게 변하는 걸 보니 기밀을 빼내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플로라는 굴하지 않고 아이든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에 손이 얹어진 채로 그가 빤히 플로라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시몬이 자신을 쓰다듬어 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느끼는 감정부터 감촉까지 전부. 하지만 여기서 불쾌함을 드러낸다면 제게 좋을 것이 없었기에 플로라는 먼저 눈을 피하지도 못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냐고.”

아이든이 재차 물었다. 플로라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네 실험의 성공작이 있잖아. 파르베.”

“……아아, 파르베는 왜?”

“어떻게 성공한 건지 궁금해서.”

“오래 노력했지. 마법석에서 마력만 추출해 내는 법을 연구했어. 비록 외형이 보기 싫어지긴 했지만 마력을 얻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처음에 보고 솔직히 좀 놀랐거든.”

“플로라에게도 마력을 더 심으면 어떻게 될까? 마법을 쓰고 싶지 않아?”

“마법 얘기는 지난번에 끝났잖아. 아이든. 난 이제 마법에 관심이 없어.”

“그래도 노력해야지. 센칸을 위해서. 그러라고 살려서 데려온 거잖아. 라비우 전하의 깊은 뜻을 모르겠어?”

“……알고 있어.”

“원래 탈출한 기사는 죽음으로써 죗값을 치러야 하잖아. 그게 우리의 규칙인 거 알고 있지?”

아이든이 협박 섞인 목소리를 내며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에 힘을 실었다.

플로라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알고 있어. 자비를 베풀어 주신 전하께 감사하고 있어.”

“내게도 감사해야지. 나도 널 살리는 데에 동의했어.”

“고마워. 아이든…….”

“아직 완벽하게 널 믿을 수 없지만 우리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너의 마음도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서서히 돌아오겠지. 우리 지난날들은 잊자.”

단 한 번도 그에게 믿어 달라고 한 적 없다. 지난날들을 잊자고? 말도 안 돼.

플로라는 크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앞으로 그런 말을 하고 다녀선 안 돼. 탈출을 도와주겠다느니 하는…….”

“그래 볼게.”

“또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내 귀에 들어온다면…… 어쩔 수 없어.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해도, 널 리셋시키는 수밖에 없어.”

플로라는 그것이 어렸을 때 자신이 먹었던, 기억을 지우는 약을 다시 먹인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또 지금의 기억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센칸에 복종하고자 온 것이 아니니 그 약을 먹을 순 없었다. 더욱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잊어서는 안 될 기억들이 너무나 많았다.

갑자기 기억을 잃고, 시몬을 떠올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리비에르도, 시몬도, 카신도. 소중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들을 잊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력이 없는 사람에게 마력을 넣는 건 성공했지만 아직 불완전해. 내겐 역시 플로라 네가 필요해. 어떤 이유 때문이건, 다시 내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

플로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든은 태연하게 다른 말들을 이어갔다. 그녀의 귀엔 제대로 들리는 것이 없었지만.

“이제 네 마력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지, 마력이 있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연구할 거야.”

방금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던 아이든은 왜인지 모르게 갑자기 신이 난 듯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곤 자신이 어떻게 플로라를 연구할 건지 술술 읊기 시작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작자였다. 사람을 연구하겠다고 떳떳하게 말하면서 저리 해맑은 눈을 할 수가 있을까. 듣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섬뜩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 * *

얇은 슬립 하나만 입고 진행해야 하는 연구는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를 빙자해 몸을 더듬거리는 행동을 참아내는 것은 오로지 플로라의 몫이었다. 그래도 플로라는 참아내야만 하는 일이었으므로 다시 감정을 죽이는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갗이 찢기는 듯한 불쾌한 감각도 참았고, 아이든이 말을 걸 때면 대답도 해 주며 일정에 맞춰 실험을 진행했다. 그는 역시 플로라만이 큰 도움이 된다며 기뻐했다.

“플로라 경, 괜찮으세요?”

그런 것들만 참아낸다면 예전만큼 실험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닐 적에는 생살을 찢는 고통을 느껴야 할 때도 있었고 곳곳에 징그럽고 커다란 흉터들이 생겼었는데, 적어도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쨌든 소중한 연구자료라고 생각했는지 예전처럼 험악하게 다루려 하지 않았다. 마비를 시키는 약을 먹이거나 상처를 내야 할 부위에 발라 큰 통증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팔과 손까지 붕대를 칭칭 감고 다니자, 직접 말을 걸어 오지는 않더라도 다른 기사들이 그녀를 걱정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리 남을 걱정해 주는 모습을 보니 이곳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플로라의 마음가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전 센칸의 메린 성은 혼자 살아가야 하는, 고독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적어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기사들이 보였다.

기존에 있던 기사들 또한 조금은 플로라에게 유해졌다. 플로라 역시 그들을 측은하게 보고, 대하는 것이 전과 달라졌기 때문일까.

플로라는 제 상태를 묻는 알렉샤를 바라보았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훈련 중에 다치기라도 하셨습니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혹시…….”

“아이든이 그랬어. 연구를 한다더군. 알렉샤 경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마력을 가지고 있거든.”

“아…….”

알렉샤가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플로라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이제 무뎌져서 아프지도 않아.”

플로라는 활시위를 당기며 표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알렉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아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알렉샤가 연습하고 있던 표적의 정중앙을 맞추자, 알렉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얼른 집중해서 연습해.”

“마법은 쓰실 수는 없는 상태인 거죠?”

“그래.”

물론 이제 체내에 흩어졌던 마력은 다 모였고, 마법도 쓸 수 있었다.

감을 잊지 않기 위해 방에 혼자 있을 때면 종종 연습을 하기도 하고, 검술이나 화살에 마법을 부여하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 플로라는 더 이상의 말을 원치 않는다는 듯 단답으로 차단해버렸다.

“다섯 번 전부 적중할 때까지 연습해. 아직도 엉망이야.”

플로라의 핀잔에 알렉샤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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