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20)화 (120/154)

120.

“어이. 플로라 경.”

성으로 돌아가는 플로라의 발길을 시시껄렁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플로라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이들의 발소리에 집중했다. 목소리하며 다가오는 낌새까지 모든 면에서 위협이 느껴지고 있었다. 플로라는 일정 거리까지는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생각으로 곧 뒤를 돌았다. 그러자 보이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익숙했다.

한때는 동료라고 불렀던 사람들이니까. 물론 그때도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지?”

“말을 왜 이리 섭섭하게 해?”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해 주길 바라? 왜 불렀는지 용건만 말해. 이렇게 오래 마주 보고 있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내 기억엔 그러한데.”

“뭐, 별 뜻은 없었어. 네가 돌아오고 난 이후로 제대로 인사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이제는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이였다. 플로라에게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플로라의 눈을 바라보며 죽은 사람 같다며 소름 끼친다며, 모진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던 이라 얼굴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반갑다는 건가?”

“반갑겠어?”

여자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구겨진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럼?”

“왜 돌아온 거야? 저 잘났다고 오만하게 굴며 도망칠 땐 언제고. 제 손으로 동료들은 다 죽여 버리고선.”

갈색의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가진 여인의 눈빛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 성을 탈출하던 그 날 자신이 죽였던 사람 중, 이 여인과 가까운 이라도 있었던 걸까.

플로라는 무심결에 그 일들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억들을 오래 머릿속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경들의 이름도 가물가물해.”

“……뭐?”

“나를 싫어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도 우리가 얼마나 악연인지도 모르겠고.”

“…….”

“경들의 눈빛에서는 날 향한 질투가 느껴져. 혹시 내가 부러운 건가?”

기사들의 표정이 급속도로 냉랭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리란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센칸을 탈출한 것이? 아니면 내가 아이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이?”

“누가 누굴 질투해? 누굴 부러워하냐고! 미치광이 주제에, 말이면 단 줄 알아?”

플로라는 격렬히 반응하는 기사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이 화를 낼수록 점점 더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아서. 어차피 그녀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힐 수도 없는 이들이었다. 하물며 이렇게 대놓고 열등감을 드러내 보인다니.

“전자라면 센칸을 떠나는 것을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후자라면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

“이쯤 되었으면 경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거야. 경들의 동료를 처참히 살해하고 탈출한 사람이 버젓이 살아서 이곳에 돌아와 있으니. 화도 나겠지. 맞아.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어.”

플로라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과거의 악연은 뒷전이었다. 예전처럼 제 앞길을 가로막는 이들을 다 죽이고 무모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하네칸을 떠나고 보니,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였으면서도 이제야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된 걸까.

플로라는 스스로가 변했다는 사실밖에 말할 변명 거리가 없었다. 자신도 이곳을 벗어나고 나서야 무엇이 이상하고 잘못된 것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곳에 남은 자들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뼈저리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제 뿌리도 모른 채로 아이든을 창조주로 삼고, 첩자로서 살아간다. 검을 든 사람이 떳떳해야 할 일들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을 싫어하건 어쨌건, 플로라는 남은 이들이 불쌍했다.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고 보니 이제 이들 또한 측은하게만 여겨졌다.

플로라의 그런 눈빛을 확인한 것인지 기사들이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듯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에게 이런 동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이 끔찍하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경들도…… 잘 생각해 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들이 진짜 맞는 건지.”

“……플로라 경! 그 입 닥쳐. 지금 아이든 님과 라비우 전하께 총애를 받는다고 또 기고만장해진 거야? 건방진 발언 그만해. 경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모르겠어. 내가 무사할지는. 경들의 손아귀에 달린 것 같기도 하고.”

플로라가 이들에게 ‘센칸을 떠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미혹한 것은, 그들의 표정에서 흔들림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플로라가 말을 마치고 등을 돌린 순간에도 기사들은 씨근덕대며 자신은 절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정하는 중이었다. 플로라는 그 또한 긍정의 의미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럼 내 말 잘 생각해 봐.”

기존에 있던 기사들도 의아함을 느끼는 모양이니, 이 성을 뒤흔드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플로라는 아이든을 만났다.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고, 그가 지난번처럼 또 방으로 찾아왔으니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든. 노크도 없어?”

“플로라. 건방지게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거리며 방으로 불쑥 들어온 아이든의 모습은 이전에 자신을 찾았던 때처럼 소극적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플로라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고, 번뜩거리는 눈은 거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였다. 보아하니 지금 반쯤 돌아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말?”

“네가 기사들에게 이 성을 떠날 수 있게 돕는다고 하고 다닌다며?”

모두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긴장하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니까.

플로라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아이든을 올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아이든.”

“뭐?”

“우리 말이야.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어. 기억해?”

“기억 안 나.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말해!”

“네가 내 머리채를 잡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아이든이 이를 아득 물며 세게 붙들고 있던 플로라의 머리칼을 놓아 주었다. 여전히 진정한 얼굴은 아니었다. 얘기해 줄 때까지 이 방에 있을 작자로 보여 하는 수 없이 플로라는 입을 열어야 했다.

“내가 밤마다 건장한 루엘들을 몰래 한 명씩 빼 와 잠자리를 즐긴다는 소문이었다지.”

“…….”

“그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은 넌 내 머리채를 잡으며 화를 냈어. 그 소문들이 사실이냐고.”

“플로라, 그건…….”

아이든은 이 상황에 그런 얘길 꺼내 무엇하냐는 듯 억울한 표정을 했다.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몰아붙이던 모습은 어디 가고, 본인이 불리해질 것 같으면 저리 꼬랑지를 내리는 모습이 역겨웠다.

“그때 결국 소문일 뿐인 걸로 밝혀졌지? 상식적으로 내가 루엘들이 있는 곳을 매일 같이 드나들 순 없을 테니까.”

“그럼 지금 그 말을 꺼내는 것은, 내가 오늘 들은 말들이 그저 소문일 뿐이라는 건가?”

“네가 들은 말이 정확히 뭔데?”

“센칸의 기사들을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다더군.”

아이든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그랬다고 하면 날 죽일 건가?”

“진짜 네가 그랬어?”

솔직히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미 성내의 기사들은 그동안 흔들 만큼 흔들어 놨기 때문이었다. 플로라가 큰 부정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으니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인지 아이든이 험악한 얼굴로 다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래도 이번에 센칸에 와서는 머리채를 잡힌 일이 없어 아이든이 조금은 변했나 싶기도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플로라!”

“…….”

“네가 또 탈출을 입에 담아? 하네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거야?”

“기억해.”

“허튼수작 부렸다간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전부 잃게 될 거야. 플로라.”

“…….”

“대답해.”

“알았어.”

아이든이 원하는 대답을 건네자, 그제야 그가 머리채를 내팽개치듯 놓아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억겁 같은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아이든이 다시 말했다.

“플로라. 미안하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널 연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이긴 했으나, 여전히 그 안에 광기는 숨겨져 있었다.

“그게 왜 미안해?”

“……전엔 네가 싫어했잖아.”

“싫어하지 않았어. 아무 생각이 없었을 뿐이야.”

그동안 자신을 해부해 보고 싶어 어떻게 참았을까.

“알았어. 미리 스케줄만 전달해 줘.”

플로라의 순순한 반응에 갑작스럽다고 느꼈는지 아이든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플로라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만들어진 가짜가 아닌 진짜 마력은 제게만 있다는 것. 그리고 마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이 메린 성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기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플로라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