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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18)화 (118/154)

118.

“이날을 기다렸어. 기대되는구나. 자, 경기를 시작하지.”

챙그랑. 플로라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보급용 검을 바라보다 이를 악물었다.

라비우 이 개자식…….

잇새 사이로 나오려는 욕을 틀어막고 검을 쥐었다. 내던져진 곳에서 그녀는 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테니까.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루엘을 보았다. 플로라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덩치도 훨씬 큰 거구의 남자였다. 그의 갈색빛 눈동자는 영혼을 잃고 누군가에 조종당하는 듯 탁했다. 눈빛에서부터 살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플로라를 죽여야 할 ‘적’으로밖에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든은 종종 실험에서 쓸모없어진 인간들을 직접 죽이거나, 놀이용으로 경기장에 내던져 두었다. 아마도 이 자는 후자인 것만 같았다.

시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거구의 루엘은 성큼성큼 플로라에게 다가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미 넋은 잃어버린 듯했지만, 플로라의 눈에는 어쩐지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플로라는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남자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공격을 열심히 피하기만 했지만, 무모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든이 이곳의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고작 이따위 시간 낭비로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올 리 없었다.

플로라는 싸우지 않으면 언제든 자신이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남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칼만 힘을 주어 휘두를 뿐 기술도, 눈치도 빠르지 않았기에 금세 플로라에게 당했다. 남자의 움직임이 둔했던 것도 플로라의 승산에 한몫했다.

오래 고통스럽지는 않도록 단숨에 급소로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던 플로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일어나 환호하며 플로라에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하마터면 자신이 오페라의 가수가 된 줄 착각할 뻔했다. 그녀는 피칠갑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끔찍하고 견디기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성큼 다시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 * *

플로라는 멍하니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녀가 센칸에 없었던 시간들이 무의미할 정도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삶이 시작된 탓에 하네칸에서 생활했던 기억들은 꿈처럼 느껴졌다. 시몬을 만나고, 소중한 동료를 얻고, 가족을 찾고, 감정이란 것을 얻었던 모든 일들이…….

그래도 모처럼 고요하고, 아이든도 없어 마음이 소란하지 않아 좋았다. 플로라는 언젠가 제 곁에 앉아 책을 보며 까르르 웃던 르네를 떠올렸다.

그동안 잊고 살았다고, 벌을 주는 거야?

환하게 웃는 미소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가, 이내 당연한 수순처럼 시몬과 리비에르가 생각났다. 시몬은 해독제를 받았을까. 상태가 호전되었을까. 아버지는 자신이 또다시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어떤 마음이실까. 많이 충격받으셨겠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질퍽하게 만들고 울적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네칸이 그리웠다.

“저, 저기…… 플로라 님.”

그때 누군가 플로라에게 말을 걸었다. 한쪽 눈을 뜨자, 앳된 소년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이제 막 기사단에 입단한 듯한 순진무구한 모습이었다. 플로라가 상체를 일으키자, 소년이 말했다.

“플로라 님께서 세, 센칸의 영웅이시란 말을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플로라 님께서 치르신 경기도 감명 깊게 보았어요.”

“…….”

“또한 오늘 저녁 훈련에서 활을 쏘시는 모습도 정말 최고였어요. 그래서 이리 용기 내어 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감히 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말을 한마디 내뱉는 것도 버겁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나 소년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부탁이라는 말에 플로라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힌 채 몸에 붙은 잡초들을 털어냈다.

“제게 화, 활을 가르쳐 주세요!”

탁탁 몸을 털어내던 플로라의 손이 멈췄다.

소년의 눈빛에는 열의가 가득했다. 그러나 플로라에게는 그 열의가 마냥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너…… 이름이 뭐야?”

“아, 제, 제가 실수를…… 죄송합니다. 저는 알렉샤라고 합니다! 플로라 님!”

알렉샤……. 플로라는 그의 이름을 작게 되뇌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네.”

“네! 그렇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플로라에겐 그저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너. 내가 며칠 전에 치른 경기, 봤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경은 그게 정말 보기 좋던가? 재미있던가?”

알렉샤가 플로라의 날 선 말에 두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무슨 의도로 질문한 것인지 통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한때는 네 동료였을 루엘을, 쓸모가 없어졌단 이유로 잠깐의 유희로 이용하는 것이 정말 맞는 거라고 생각하냐는 말이야.”

“네?”

“…….”

“그, 그건 이곳에서는 당연하게…….”

“당연하다고 해서 그게 정답은 아니잖아. 알렉샤.”

알렉샤가 침묵했다.

“열의를 갖고 있는 건 보기 좋지만, 센칸을 위해 뭘 하려고 하지 마. 센칸은 널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 개처럼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거다.”

플로라는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알렉샤는 꽤나 충격받은 얼굴을 한 채였다.

“플로라 님, 어떻게 그런, 그런 말을 하실 수가…….”

“넌 이 모든 것들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겠지. 그래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내 말을 잘 생각해봐. 알렉샤. 너도 감정이 있는 인간이고 생각이 있다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플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처럼 굳어 선 알렉샤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날 알아본 것만 해도 충분히 똑똑하니까. 내 말뜻도 금방 이해할 거야. 그리고 활은…… 가르쳐 줄게. 다른 이유들 때문은 아니고. 이곳에 있는 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너 스스로를 지킬 능력은 키워야 하니까.”

플로라는 알렉샤를 뒤로한 채 성안으로 돌아갔다. 어두 컴컴한 성의 내부에 들어서자, 저들끼리 모여 숙덕거리던 기사들이 플로라를 보고 잠시 침묵했다. 요즘 메린 성의 이슈는 플로라였다. 당연한 말이긴 했지만, 그녀의 탈출기와 센칸에서의 활약 등 모든 것이 재조명되어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게 됐다.

함께 훈련했던 몇몇 동기들은 여전히 플로라를 싫어하고, 그렇기에 일부러 소문을 더 부풀려 험담하기도 했지만, 루엘들과 새로운 신입 기사들에게 플로라는 어찌 되었건 영웅이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늘 알렉샤만 보아도 먼저 말을 걸 정도니, 플로라는 현재 자신의 상황이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자신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이왕 목적을 가지고 센칸에 발을 들였으니 해볼 수 있는 것들은 다 해 봐야겠지. 이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그들의 놀잇감이 되어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플로라는 겨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무시한 채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거무죽죽한 계단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방이었다.

그녀의 방 앞에 아이든이 서 있지만 않았더라도, 지금보다는 기분이 덜 더러웠을 텐데.

“플로라.”

“무슨 일이야?”

실험이나 경기를 치러야 한다면 연구원들이 그녀를 잡으러 왔을 텐데, 그것은 아닌 듯했다. 플로라는 감정을 잃은 인형처럼 아이든을 바라보며 살의를 억눌렀다.

“오늘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이 되어서 왔어.”

아이든은 떠나기 전보다 좀 더 꼴 보기 싫어졌다.

원래는 보지 않던 어울리지도 않는 눈치 같은 걸 보는 척하면서 불쌍한 강아지 흉내를 내는데, 아이든을 몰랐으면 몰라도 그의 실체를 다 아는 입장에서는 그저 역겹기만 할 뿐이었다. 플로라가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채 방문을 열었다. 플로라를 미처 잡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아이든이 주춤거리며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어디 아, 아픈 건 아니지?”

“아프지 않아. 아이든.”

“근데 왜 밥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프지 않아서. 문제 있어?”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해.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최대한 맞춰볼게.”

“알았어. 할 말 끝났으면 이만 나가 줄래? 방금 훈련을 끝내고 와서 무척 피곤하거든.”

“아, 응…… 저기, 근데 있잖아, 플로라.”

플로라의 말대로 방을 빠져나가려던 아이든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가, 입을 뗐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플로라가 아이든을 올려다봤다.

“너 혹시 마력이 돌아왔니?”

코끝에 걸쳐 쓴 안경 너머로, 아이든의 분홍색 동공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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