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왔어?”
그녀를 기다린 것일까. 갑판에 올라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든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가 오랜 시간 바람에 날렸는지, 잔뜩 흐트러진 채였다. 왜소한 체구 때문인지 커 보이는 셔츠의 단추는 한두 개 정도 풀어 헤친 상태였고, 크리스털로 된 와인 잔을 든 채 플로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반짝거리는 눈빛에는 꼭 순정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올 줄 알았다는 듯한 저 얼굴에 플로라의 심기는 더 구겨질 대로 구겨졌지만 말이다.
“네 잔도 준비해놨어. 자.”
그가 탁상에 올려둔 잔을 들어 플로라에게 건넸다. 플로라는 우두커니 멈춰선 채 아이든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녀가 잔을 받아들지 않자, 아이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도로 그것을 내려놓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드디어 제자리야. 플로라. 우리가 드디어 만났다고.”
“해독제는…….”
“보낼 거야. 걱정하지 마. 플로라. 약속은 지킬 거라고.”
아이든이 맑게 웃었다.
곧 그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보랏빛으로 물든 피부와 검은 눈동자, 헝클어진 머리칼……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고,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듯하지만 그는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플로라는 흉측한 몰골에 절로 눈살을 찡그린 채 파르베를 경계했다.
파르베는 플로라를 슬쩍 보더니 아이든에게 작게 어떤 말을 속삭였다. 그에 아이든이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려놓으며 플로라에게 고갯짓했다.
“따라와. 전하께서 찾으셔.”
아이든이 전하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라비우…… 그도 여기 있었나.
먼저 간다고 해놓고, 그것 역시도 어제의 거사를 위한 계획 중 일부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다음에 또 보자고. 플로라. 나의 아이야.’
그가 마지막 가면무도회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아이든이 그녀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 정상적이고 달콤한 인간이리라 생각할 것이다. 혹 다리가 후들거려 걷다가 넘어지게 되더라도 이 손을 마주 잡느니 혼자 걷겠다. 그런 생각으로 플로라는 아이든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허공에 뻗어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아이든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보다 더 빠르게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한 선실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듯 종소리가 울렸다.
아이든이 문을 열자 화려하게 꾸며진 선실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금수를 놓은 붉은색 이불과 바닥에 깔려 있는 레드카펫, 곳곳에 자리한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조각품들까지. 라비우의 알현실을 축소해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라비우는 침대에 앉아 입으로 무언가를 피우고 있었다. 이미 선실 안에 연기가 자욱해 플로라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그 사이, 왕의 선실을 지키던 기사들이 다가와 플로라를 수색했다.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들을 모두 빼앗긴 뒤에야 그들은 물러섰다.
“다 나가 있어라.”
플로라는 라비우를 똑바로 보았다. 그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플로라를 보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이 무언지 읽어내릴 수 없었으나 약간의 두려움이 일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선실 안에 있던 모두가 라비우의 명령에 복종해 방을 나간 후였다.
“가까이 와.”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플로라는 라비우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
“길을 덜 들인 맹수 같구나. 플로라.”
“…….”
“어쨌든 센칸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지고 싶지 않았지만, 플로라는 그저 라비우의 앞에서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제 발로 돌아온 것이 틀림없으니까.
라비우는 살짝 굽힌 듯한 플로라의 태도에 조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가 잃은 전력을 생각하면,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테지만…… 넌 그보다 더 좋은 쓰임이 있으니 넘어가겠다. 우리의 위력은 이번에 네 눈으로 확인했을 터. 어리석은 짓은 다시 반복하지 말아라.”
“…….”
끝끝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라비우는 이쯤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플로라를 내보냈다. 플로라가 선실을 빠져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든이 그녀를 졸졸 쫓았다.
“무슨 얘길 나눴어?”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해?”
“궁금해하면 안 돼?”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순진무구한 얼굴을 했다. 그런 눈빛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플로라는 신경질적으로 아이든의 손을 뿌리치고, 선실이 모인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아이든은 끝까지 그녀를 쫓았다.
“아이든, 내 방은 어디야?”
“네 방?”
“그래.”
“아 참, 여기야.”
아이든이 씩 웃으며 선실 문을 열어 주었다. 플로라는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눈으로 휙 둘러보고 있는데, 아이든이 쫓아 들어와 문을 걸었다.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오랜만이잖아. 같이 있자.”
“……나가. 아이든.”
“플로라. 나 네가 정말 보고 싶었단 말이야.”
미친 아이든.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미친놈이었는지, 다시금 그 악몽들이 플로라의 머릿속을 괴롭혀댔다.
“있잖아. 플로라.”
플로라가 아이든을 밀쳐내고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그에게 곧 저지되었다.
“넌 내 거야. 내가 만들었다고.”
“난 누구의 것도 아니야. 네가 만든 소유물이 아니야.”
“널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
“플로라, 왜 그래? 나, 나, 네가 떠나고 많이 생각했어…….”
“무슨 생각?”
“넌 내 옆에 있어야 해.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연구에 통 집중이 되질 않았어……!”
누가 들으면 눈물겨운 고백인 줄 알겠지. 하지만 그저 집착일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집착. 아이든은 마력에 광적으로 집착했고, 플로라의 마력을 복제하려 했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며 그의 집착이 자신을 향한 애정이 아닌 연구에 대한 갈망이리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 반쯤 돌아버린 듯한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메린성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자신을 괴롭힐지 불 보듯 뻔했다.
플로라는 세게 아이든의 손을 뿌리치고, 잠긴 문을 열어냈다. 도망치듯 갑판으로 빠져나가자, 시원한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하늘이 얼마만큼 가까이 있는지, 바다가 얼마만큼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플로라는 멍하니 배에 기대어 시몬을 떠올렸다. 이 배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그대로 죽으려나.
또 운 좋게 도망칠 수 있으려나.
이번엔 도망치면 어디로 가야 하지?
아마도 하네칸으로 돌아갈 순 없을 것 같았다. 자신으로 인해 시몬이 위험해지니까.
시몬을 보고 싶다는, 그의 곁에 남고 싶다는 욕심으로 결국 화를 불러일으켰다.
시몬…….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편이 울컥 아파 왔다. 창백한 그 얼굴을 떠올리면 결코 그 옆으로 돌아갈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다.
플로라는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를 다시금 새겼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겠다고 했던 아이든을, 그리고 끝내는 제게 가장 소중한 이에게 해를 입힌 그를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해결하는 건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은 버텨야 할 때였다. 악몽 같은 기억뿐인 이곳으로 다시 발을 들인 자신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 생각하며 플로라는 이를 아득 물었다.
* * *
멀리서 보아도 바다 한가운데에 보이는 저 섬이 플로라의 오랜 터전 메린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네칸에 머물며 잠시 잊었던 르네에 대한 기억과 고통스러운 기억들까지 전부 뼈에 새겨지는 듯했다.
곧 섬에 도착해 그곳에서 내린 플로라는 아이든에게 끌려가듯 성으로 향했다.
성의 외관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익숙한 얼굴 몇몇이 플로라를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다시 또 시선의 한 가운데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도망치기 전 쓰던 그녀의 방은 여전히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다. 방에 갇힌 플로라는 말없이 아이든이 건네주고 간 센칸 기사단의 단복을 입었다.
그녀의 방문이 열린 건 점심을 먹은 직후였다.
성의 고용인들에게 허둥지둥 끌려나간 플로라는 털썩, 흙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아이든을 돕는 많은 이들이 주변에 빙 둘러 서 있었고, 가운데에 있는 높은 단상에는 아이든과 라비우가 앉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라비우는 금으로 만든 왕좌에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플로라를 내려다보던 라비우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플로라, 경이 없어 그동안 경기가 적적했다.”
와아아. 이어 사람들의 광기 어린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마른 침을 삼키며 미간을 좁혔다.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내던진 것이었다. 죽음의 경기장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