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위엄 있는 모습으로 단상에 오른 세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하늘 위로 폭죽을 쏘아 올렸다. 보통 플로라가 알고 있는 폭죽은 어두운 밤하늘에 쏘아 올리면 아름다운 빛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것이었는데, 꽃비 같은 것이 아름답게 내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플로라가 감탄하며 그것을 바라보는데, 곧 웅장한 음악이 광장 전체에 울려 퍼지며 사람들의 환호가 일순 멈췄다.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 모습에 다리에서부터 전율이 돋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차림을 한 황제가 백마가 이끄는 하얀색 마차를 타고 천천히 입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환호했으며 어떤 사람은 감격에 눈물을 쏟기도 했다. 단상에 도착해서야 화려한 마차에서 내린 시몬은 가운데에 올곧게 섰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인 채 시몬을 경외했다.
시몬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인사말을 시작했다. 모두가 고요했다. 플로라는 귀로는 그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한눈에 속속들이 들어와 좋았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네칸의 건국 기념일에 황제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종종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건만 해도 시몬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 때였으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오랜 전쟁에 앙심을 품은 세력의 암살 시도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부상은 면치 못했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아무 일 없이 평온한 중에도 플로라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리고 시몬의 축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이었다.
퍼엉.
단상의 오른편에서 강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며 그녀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침착해야 해. 침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말들을 되뇌며 플로라는 어디서 어떤 일이, 그리고 누가 주변에 숨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으악!”
폭죽을 터뜨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종류의 굉음이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너나 할 것 없이 파도처럼 몸을 움직였다.
플로라는 시몬을 보았다. 근위대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차분하게 황제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녀는 활시위를 당기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던 중, 소란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다시 한번 왼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광장에 연기가 자욱해져 시야가 차단되었다.
이제는 시몬이 정말 위험하다. 그런 판단이 서자 고민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붕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계단을 밟고 지면에 안착한 플로라가 사위를 둘러 보았다.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치는 제국민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플로라는 비교적 낮은 지붕 위로 달리며 시몬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달렸다.
희미한 안개 사이로 시몬을 보호하고 있는 근위대가 보였으나 시몬의 상태를 파악할 순 없었다. 무사한 걸까. 크게 다치지 않았어야 하는데.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두 눈으로 시몬을 확인해야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아 심장이 빨리 뛰며 입 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그가 무사히 대피하고, 상황이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만이 온통 플로라를 잠식했다.
이어 플로라는 건물에 숨어 시몬과 근위대, 그리고 기사들을 저격하는 적들을 찾아내며 한 명씩 활을 겨눴다. 한참 사투를 벌이던 도중, 많은 인파 속에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이 와 닿는 방향을 향해 플로라가 눈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이 느낀 것이 틀린 게 아니라는 듯, 한 남자가 플로라를 보고 있었다. 입매를 비스듬히 비틀어 올린 채로, 기괴하게 웃고 있는 남자. 분홍 머리칼, 삐쩍 마른 몰골을 한, 어딘가 피폐해 보이는 듯한 남자.
아이든이었다.
* * *
상황은 겨우 진정되었으나 제국은 비상이었다. 황제를 지키던 근위대 한 명이 독화살을 맞아 즉사했고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른 기사단도 부상이 꽤 많았다. 무엇보다도 제발 무사하기를 바랐던 시몬 역시도 다리에 화살을 맞았고, 독이 퍼져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해독하기 까다롭게 제조된 독이라고 이든이 말했다.
플로라는 침실에 누워 있는 시몬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아이든의 얼굴이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플로라 경.>
이를 악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자책밖에 들지 않았다. 아이든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심장이 난도질 당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는 그런 플로라의 어깨를 살짝 말아 쥐었다. 플로라가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깐 옆 병실 다녀올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키고 있어. 알겠나?>
플로라는 에르네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에르네가 병실을 빠져나갔고, 플로라는 천천히 시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인형처럼 미동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눈을 맞추고 웃어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어쩌다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아이든의 얼굴을 떠올리니 더 그랬다.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갈 거야.’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급하게 활시위를 잡아당겼지만, 그는 금세 종적을 감춘 후였다.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센칸에서 아이든을 진작, 진작에 죽였어야 하는데.
“……시몬.”
플로라는 떨리는 손을 겨우 시몬의 뺨에 가져다 댔다. 금방이라도 눈을 떠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일어나요, 시몬.”
그가 이러다 정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플로라는 처음으로 큰 두려움을 느꼈다.
* * *
플로라가 등 떠밀리듯 시몬의 침실에서 빠져나온 것은 사건 발생 이후 이틀이 꼬박 지난 후였다. 차마 그의 곁을 먼저 떠날 수가 없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에르네도 그런 플로라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곁에 있겠다는 고집을 부려도 그냥 내버려 두는 듯했다. 하지만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버티는 모습에 결국 에르네는 플로라에게 하루 쉬고, 다시 돌아오길 명령했다. 쫓겨나듯 숙소로 돌아온 플로라는 또다시 낯선 이가 보낸 쪽지를 마주했다.
그래, 사실은 라비우의 쪽지를 받은 후로 이런 일이 또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플로라는 쪽지를 펼쳤다.
[플로라, 내게 돌아온다면 해독제를 줄게. 내일 밤 9시까지 선착장에서 기다릴게.]
아이든의 필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플로라는 한 손으로 쪽지를 구겨 벽에 던졌다.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든은 끝내 플로라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겠다고 했던 말을 지켰다.
그렇다면 나도 내가 한 말을 지키겠다고. 플로라는 결심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땐 내가 널 죽일 거야. 반드시.’
센칸을 떠나올 때 했던 말.
어느덧 소중해진 사람들과 익숙해진 평온한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 바람처럼, 중간중간 너무 달콤한 날들 속에 잠시 잊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말이 다시 숙명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그녀는 센칸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플로라 경. 괜찮아요?”
“괜찮아요.”
“폐하께서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이든 님께서도…… 충분히 회복되실 수 있다고 했잖아요. 가망 없는 건 아니라고…….”
“네. 꼭 회복되실 거예요.”
플로라는 하네칸을 떠나기 전 자신이 사랑해 온 이들의 모습을 모두 눈에 담았다.
루가르도 만나고, 이젤도, 카신도, 에르네, 이든, 그리고 아버지도 만났다. 그들을 보며 아마 다시는 잊지 못할 그 모습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떠나야만 하노라고 마음속 깊이 되새겼다. 마지막으로 시몬의 얼굴까지 본 뒤에야 시간 맞춰 성을 나설 수 있었다.
오후 9시, 날은 어둡고 바닷바람의 냄새는 짙었다. 아이든이 말한 선착장에는 센칸의 깃발이 꽂힌 배가 한 척 정박해 있었다. 하네칸으로 왔던 귀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떠나는 시기였기에 센칸의 배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플로라가 배에 올라타려 하자, 배를 지키던 이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넌 누구지?”
그 물음에 플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로브를 살짝 거둬내자 남자들은 미간을 좁힌 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은빛 머리칼, 검은 눈동자, 살기가 깃든 차가운 표정. 말만 들었을 뿐인데도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다는 얼굴들이었다.
“아이든을 만나러 왔다.”
“…….”
그들은 자신의 창조주인 아이든 님에게 무례하게 반말하는 태도에 욱하는 마음이 치솟았으나, 이내 그녀의 기에 눌려 먼저 길을 내어주고 말았다. 어차피 아이든 님께서도 플로라가 오면 배 안으로 들여도 된다고 했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플로라는 센칸의 배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