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14)화 (114/154)

114.

이름도 모르는 귀족에게 곤란한 일을 당할 뻔했을 때보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더 싫었다. 자신이 그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 고요함과 따뜻한 사람의 곁에서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

시몬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속으로 되뇔 때마다 혀끝이 달았다.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임무로 내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야.”

부서질까, 깨질까 늘 노심초사하는 제 마음을 알까.

시몬은 살짝 곁눈질로 플로라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었다. 그녀의 비단결처럼 고운 머리칼이 뺨을 쓸어내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잠깐이나마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보기도 했고 이성에게 호기심을 느꼈던 때도 있었지만, 다 지난 어린 날의 일이었다.

시몬의 입지는 주색을 즐긴다는 소문만큼 견고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더더욱 매일이 살얼음판 같은 인생이었다. 여자에게 호감을 느낀다거나 집중하거나 깊게 사랑에 빠질 여력이 없었다. 어차피 사랑 같은 건 그의 인생에 있어 부질없다고 생각한 것도 컸다. 시몬의 오만이었다. 이제는 알고 있다.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지.

손바닥에 자꾸만 식은땀이 났다.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 죽을 고비를 넘기던 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일었다.

“시몬.”

나긋한 플로라의 어조에 시몬은 몸을 틀었다. 그의 움직임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플로라의 뺨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입술이 내려앉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말캉한 것이 입술을 스쳤다가 떨어졌으나, 뜨거운 숨결만은 여전히 가까이에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할 말을 잃었다. 시몬 못지않게 플로라의 심장도 고동치고 있던 참이다. 오늘만큼은, 플로라도 참고 싶지 않았다.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될까요?”

“……뭐?”

“자고 갈게요. 네?”

시몬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며 아랫입술이 잘게 떨렸다.

어제야 그녀가 도망갈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장난스레 말했다지만…… 오늘은…….

아, 어제의 복수인가, 싶다가도 그녀의 눈빛을 보니 꽤 진지했다. 시몬은 더 생각하길 포기했다. 실낱같던 이성의 끈이 완전히 풀어졌다.

* * *

저택에서 나왔을 때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재빠른 걸음으로 마부가 있는 곳까지 온 마르웰 공작은 마차 위에 올라타자마자 꽉 조여진 상의의 갈색 단추를 풀어냈다. 세 개나 끌러 냈지만 여전히 목은 누군가 세게 죄이고 있는 듯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공작이 목을 매만지는 손이 달달 떨렸다.

곧 마부가 마차를 몰고 출발했다. 저택이 멀어지는 것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마르웰 공작은, 조금 떨어진 거리까지 와서야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방금 무얼 본 것일까.

자신의 저택에…… 뭐가 있는 걸까.

마르웰 공작은 방금 전 본 것을 떠올렸다.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살갗은 보랏빛으로 물든 이가 뇌리에 각인된 채 지워지질 않았다. 인간도 아닌 것이 마수도 아닌 존재였다.

아이든은 그걸 자랑스레 자신의 걸작품이라 소개했다. 마르웰 공작도 젊었을 때는 검을 쥐었던 적도 있었다. 마수를 만난 적도 있었다. 마수들의 이세계에도 귀족이 존재한다고 했지. 인간의 모습을 한, 마수들을 거느리는 귀족이.

생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아마 귀족이 있다면 그런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기괴하고 기분 나쁜 모양새였으나 마르웰 공작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광기로 빛나고 또 처음 보는 외형에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든이 무어라 얘기하는지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로 허둥지둥 도망쳤다.

황제를, 그리고 플로라를…… 어떻게 하겠다고 했더라.

“위험해…… 위험해.”

밖은 시리도록 추움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가 이토록 당황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칸나가 사라졌을 때보다 더…….

하네칸의 아이들을 데려다 어떻게 쓰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데 이제는 아이든이 무얼 하는지, 센칸이 어떤 짓을 벌이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보랏빛의 피부를 가진 남자를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든이 위험하다고 느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정말 목숨의 위협까지도 느껴졌다.

그의 광기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토기를 참지 못한 마르웰이 마차를 세차게 탁탁 치자, 곧 달리던 것이 멈췄다.

뛰쳐 내리듯 마차에서 내린 마르웰 공작이 속을 게워냈다. 먹은 것이라곤 아까 귀족들과 와인을 조금 마신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잔뜩 무언가를 집어삼킨 사람처럼 계속해서 속을 게워내기 위해 애썼다.

끔찍한 밤이었다.

* * *

플로라는 쏟아지는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마음에 품은 정인의 얼굴이 보였다. 아, 어제 함께 침대에 누웠지.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으며 좋은 기색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좋아하는 감정은 참 이상하다. 노력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플로라는 빤히 시몬의 얼굴을 보았다. 이마에서부터 이어지는 매끄러운 선이 곱게만 보였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시몬의 입술에 닿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며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그런 건가.

플로라는 간밤의 일을 떠올리며 괜히 포근한 이불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오고 가던 때를 기억한다. 말캉한 혀가 얽히고, 서로의 모든 것을 탐하기 위해 행하던 손짓과 몸짓을 기억한다. 얼마나 뜨겁고도 열정적이었는지 여전히 지난 밤과 새벽처럼 모든 것이 덥고 어지럽게만 느껴졌다.

저 혼자 지난 시간을 떠올리던 플로라가 이대로 시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플로라.”

아직 잠에 취한 듯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옷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맨 허리로 시몬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닿았다.

그녀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능숙하게 힘을 주어 가까이 끌어당긴 시몬이 플로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와 살갗을 간지럽힐 때마다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팔딱거리는 것 같았다. 환한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잔뜩 취해버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진다.

“저, 시몬…….”

이제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방에 누군가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일어나자.”

그러나 그녀를 붙잡는 그의 말에 플로라는 돌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살갗에 와닿는 말캉한 감촉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곧 시몬이 짧게 기지개를 피며 고개를 들었다.

“잘 잤어?”

눈을 맞추며 웃어오는 모습에 굳어 있던 플로라의 마음도 살짝 풀어졌다.

“잘 잤어요. 시몬은요?”

“……나도. 일어나기 싫어.”

이리 게으름을 부려 본 적이 얼마 만인가. 여태 나태한 이미지를 고수해오고 있긴 했지만, 이리 한 번도 깨지 않고 깊게 자 본 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요새 오전 일찍 일어나서 피로가 쌓인 탓도 있지만, 시몬은 그런 환경은 배제하고 오로지 플로라 덕분이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살며시 정돈해 주며 시몬은 제 곁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았다. 품에 안고 보니 더 욕심이 났다. 이대로 영영 제 품 안에 가둬 두고 싶을 정도로.

“플로라. 오늘은 농땡이 피울까?”

“……예?”

가벼운 농담에도 두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 것이 귀여워 시몬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살면서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이라는 것이 완전히 자신의 손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옆에 있어 주면 바보 같은 황제로, 나태한 황제로 계속 남아도 될 것 같다. 물론 플로라가 그렇게 두지 않겠지만.

“귀빈들과의 일정이 잡혀 있으십니다.”

플로라가 농담조차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진지하게 대답하자, 시몬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알았어. 아쉬워서 그래.”

그저 농담이었고 지금도 일부러 쓸쓸한 척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플로라는 기꺼이 속아 넘어갔다.

“……저는 오늘 밤에도 폐하의 곁을 지킬 테니, 이만 일어나시지요.”

약속을 받은 시몬이 그제야 소년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