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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13)화 (113/154)

113.

아이든이 무엇을 제안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든이 제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다만 그것이 분명 지금까지의 거래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일은 아니리라는 것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칸나를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었으니까.

그는 온갖 험한 일이란 일은 다 겪고도 이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하지만 센칸은 언제나 그로 하여금 새로운 모험을 하게끔 했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던 이세리스 공작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손을 잡게 되었을 때부터 센칸은 여러 번 그를 놀라게 했고, 덕분에 종종 섬뜩한 기운을 느끼곤 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마르웰 공작은 이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센칸은 예외였다. 여전히 아이든을 만나면 등골이 오싹할 때가 잦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태 그들과의 거래를 끊을 수 없는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르웰 공작은 센칸이 원하는 것을 알았고, 센칸도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믿음에 배신하지 않았고, 하나를 내주면 배로 돌려주는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마르웰 공작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칸나까지 조건으로 내걸면서 아이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르웰 공작의 매서운 눈은 답을 종용하듯 계속 그에게 닿아 있었다.

곧 그의 입술이 열렸다.

“플로라라는 기사를 알고 있죠?”

플로라? 마르웰 공작은 고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특이한 이름.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일이 아닐까. 지금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마르웰 공작은 자신이 기억해야 할 것과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가 분명했다.

선대 황제가 제 재산을 얼마나 전쟁에 쏟아부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플로라란 이름에 대해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황제의 근위대에 소속된 기사요.”

아이든이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입 밖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예민해지는 듯 그의 눈초리가 전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마르웰 공작은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은발 머리의 여자를 떠올렸다.

“아. 센칸에서 전달받은 사항이 있습니다.”

무르고 약해 빠졌다고 생각했던 황제가 플로라에 대해서는 워낙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황제의 객기인 줄 알았다. 현재 근위대의 단장 자리에 앉아 있는 놈도 그렇고, 플로라도 그렇고. 제국 내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작자들을 끌어들여 제 사람만으로 채워 댔으니까. 그것이 눈꼴시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으나 시몬은 말을 통 듣지 않았다. 게다가 알고 보니 센칸의 반역자라니. 처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받았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하지만 공작은 뭐 아무렴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센칸의 반역자라면 그녀는 얼마 못 가 죽을 테니까. 그녀가 죽기 전에 한발 물러서는 척 거래를 제안했고, 시몬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마르웰 공작은 칸나를 황후로 만드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거래가 성사된 이후 그는 플로라에게서는 완전히 신경을 껐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는 줄 알았던 칸나와의 혼인이 이제는 완전히 무산되었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패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제 손을 떠났다. 플로라의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칸나와 시몬의 관계까지 닿자, 갑자기 칸나가 처음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배신감이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공작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었나 봅니다.”

비웃는 듯한 비릿한 미소에도 잠깐 신경이 예민하게 팔딱거렸으나, 마르웰 공작은 꾹 참아내며 겨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센칸에서 금방 처리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마르웰 공작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그런 자잘한 일들까지 그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탓으로 몰아가며 자존심을 깎아내리려는 말을 이해해 주고 싶지 않았다.

곧 아이든의 눈썹이 볼썽사납게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의 이름이 나온 이후부터 아이든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감정을 제 마음대로 컨트롤하기가 어렵다는 듯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댔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결과 이런 감정에 대해서 잘 알았다.

사랑처럼 부질없는 것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놈들도 많이 보았다. 이 미친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거다.

어쩔 수 없는 사내놈.

마르웰 공작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 * *

플로라는 임무가 끝난 직후 숙소에 들러 여분의 옷을 몇 벌 챙겨 들고 황제의 성으로 향했다. 황제의 성문 앞에 에르네가 서 있었다. 그가 직접 보초를 서고 있을 리는 없었으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에르네의 표정이 살짝 서늘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플로라가 쭈뼛거리다 후다닥 단장의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따라와.>

얼핏 보기에는 단장이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무얼 잘못했나 싶어진 플로라는 주변 선배들의 눈치까지 슬그머니 살피다 천천히 대장의 뒤를 따랐다. 에르네는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플로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해.>

아……. 그것 때문이었나.

플로라는 잠시 연회장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가 설핏 한쪽 눈썹을 구겼다. 귀족의 팔을 꺾어버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괜히 입안이 바짝 말랐다.

자신 덕분에 시몬이 곤란해진 것은 아닐까? 플로라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천천히 자신이 겪었던 일을 빠짐없이 얘기했다. 그의 무례에 팔을 꺾어버린 것 또한 말했고, 마침 연회에 참석한 카신 단장이 저를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감 없이 이야기하자, 에르네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제가 단장님과 폐하를 곤란하게 한 거라면…… 그분께 직접 사과하겠습니다.”

에르네는 미련한 소리에 혀를 쯧 찼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그럼 됐다. 폐하께 가봐.>

“혹시 폐하도 알고 계신가요?”

에르네는 침묵했지만, 플로라는 그것이 긍정이라는 걸 알았다.

괜스레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플로라는 시몬의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그녀는 마치 마굴에 들어서는 것처럼 긴장한 채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플로라.”

이미 잘 준비를 마친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시몬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미묘한 분위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플로라는 그가 가까이 오라고 하기도 전에 그에게로 다가섰다.

저 애틋하고 따뜻한 눈을 보니,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플로라가 용기 내어 가까이 다가서자 시몬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몬 보고 싶었습니다.”

플로라의 고백에 시몬이 손을 잡으며 자신도 그랬다고 대답했다.

확실히 오늘은 그가 더 그리웠다. 이런 표현이 술술 나올 정도로.

“오늘 연회에서의 이야기는 들었어.”

손을 잡아끌어 제 옆에 플로라를 앉힌 시몬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플로라는 괜히 연회장의 일을 떠올리자 자신이 죄인이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네가 왜 사과를 하지?”

시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살짝 눈썹을 구겼다.

“제국의 축제입니다. 귀빈을 상대로 무력을 썼습니다.”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더라도 그자는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건드렸으니.”

“…….”

플로라가 눈을 깜빡이며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그가 뭐라고 했지?

놀란 그녀와는 달리, 시몬은 인상을 찡그린 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대로 그는 바로 추방 조치했어. 또한 그 나라의 누구도 다시는 하네칸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고, 교역도 중지시켰어.”

죽이고 싶은 걸 꾹 참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리비에르도 연회장 앞으로 찾아와 마법으로 그의 머리를 단숨에 터트려 버리겠다고 하는 것을 겨우 뜯어말렸다.

“……네? 시몬.”

너무 과한 처사에 플로라의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일순 차가운 빛이 서리는 것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 무례한 귀족을 떠올리자 화가 난 듯했다. 자신의 일에 이토록 함께 화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에게 무어라 더 말하려다, 어차피 들어 주지 않을 것 같아 플로라는 그저 시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미 기분은 풀렸다.

그가 제게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했던 시점부터.

시몬의 몸이 잠시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은 것 맞아?”

“아닌 것 같아요?”

“응.”

“정말 괜찮아요. 그저…… 폐하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조금만 이러고 있어도 될까요?”

“계속 이러고 있어도 돼.”

그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들으며 플로라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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