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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12)화 (112/154)

112.

“괜찮나.”

카신의 말이 들려왔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신은 계속 걱정하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플로라에겐 이런 일쯤은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것만 제외하고는 그녀의 표정도 평소와 같았다.

카신에게서 돌아오는 말이 없어 플로라는 자신이 근무 배치 받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연회장은 여전히 고요했고,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남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즐기지 않았기에 빨리 모두의 관심이 사라졌으면 했다.

귀족에게 험한 일을 당할 뻔했던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싫었다. 의연한 척하려 했으나 사람들의 시선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그녀의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것 같았다.

“잠깐 나가지.”

그녀의 상태를 파악한 모양인지 카신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플로라는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젓고는 다시 무의미하게 주변을 훑어 내렸다. 짧게 한숨 쉰 카신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뒤를 돌아섰다. 시선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회는 시작 되었다. 제게 쏠렸던 시선이 사라지자 플로라 역시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연회와 함께 플로라의 임무가 끝이 났다. 귀족들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것을 확인한 플로라도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먼저 다가와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걱정해 주는 마음이야 고마웠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단답으로 네, 하고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플로라.”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로라는 그가 자신을 찾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카신은 여전히 아까처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플로라의 물음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연회에서의 일을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보다 저를 더 신경 쓰는 듯한 태도에, 플로라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저를 따라오라는 카신을 순순히 쫓아야 했다.

“괜찮아?”

사람이 없는 발코니까지 나가서야, 카신은 입을 뗐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을 것은 없었다. 모두 자신이 험한 일을 당한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플로라 그녀 자신이 느끼기에는 흔하디흔한 일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요, 카신 오라버니.”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신을 올려다보았다.

“응?”

“그 자에게 대체 뭐라고 하신 겁니까? 겁에 질려 나가서는, 다시 보이지도 않더군요.”

“아. 그거.”

카신이 코웃음을 치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갑자기 의기양양해지기에 대체 무슨 말을 했을지 불안했지만, 그래도 내내 불편한 기색을 하고 있던 것보다 웃는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좋았다.

“……너는 하네칸 제국의 근위대 소속 기사이며 대마법사이신 리비에르 님의 장녀라고 말했지.”

“아. 그게 전부입니까?”

생각보다 별거 아닌 말에 안도하는 한편 조금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그것에 겁에 질릴 거였으면서, 왜 앞뒤를 재지 않고 덤벼든 것일까. 하기야. 귀족 사회에서는 신분과 명예만 들이밀면 납죽 엎드리는 작자들이 많았다. 다시금 느끼는 실리에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뭐가 더 있겠어?”

“저는 오라버니께서 험한 욕이라도 하신 줄 알고, 기대했거든요.”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저는…… 괜찮습니다. 익숙한 일인걸요.”

익숙한 말이라는 것조차 카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모욕을 플로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센칸에서도 마찬가지였고, 하네칸에서 처음 기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저의 검을 보지 못했으니 오해하실 만합니다.”

“참느라 애썼다. 네 마음이 다쳤을까 걱정돼.”

“마음이 다친 건 아닙니다.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자리에서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목이라도 베어 놓았어야 속이 시원했겠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요.”

플로라가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는 듯 카신이 픽 웃었다.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래. 고생했다.”

“네. 오라버니도요. 아, 참…….”

발코니를 먼저 나서려던 플로라는 카신을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아까 연회장에서도 느꼈지만, 그의 표정 덕분인지 한껏 꾸민 모습은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가문의 가주라는 것이 실감 날 만큼.

“제복 잘 어울리세요.”

플로라는 그 말을 남기곤 살짝 웃어 보인 뒤 발코니를 나섰다.

* * *

연회에서 먼저 빠져나왔던 마르웰 공작은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저택이 아닌, 제국의 중심에서 벗어난 외곽 지역이었다. 빠르게 달리다 보니 그리 늦지 않은 시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작의 또 다른 저택 안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공작은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리다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뚜벅뚜벅 정원을 걸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어서 그런 것일까. 자신의 저택임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저택 안은 고요했다. 환하게 불을 밝히는 것조차 장식의 일부인 것처럼, 싸늘하고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마르웰 공작은 이런 스산한 기운을 잘 알았다. 이 남자를 만날 때면 항상 이런 섬뜩함을 느끼곤 했으니까. 이 저택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죽임을 당한 것만 같았다. 한때는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마르웰 공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 왔군요?”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마르웰 공작이 불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잘게 떨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게 그 남자가 등 뒤에 와 있었다. 마르웰 공작은 계속해서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축이기 위해 혀를 살짝 내둘렀다. 그리고 이내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풀려 애쓰며 뒤를 돌았다. 두려운 사람이긴 했지만, 아직은 아군이었다.

“거래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르웰 공작이 그와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정중하게 인사했다. 머리 위로 남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곡선처럼 떨어져 내렸다.

“뭘요. 이 저택에 머물게 해 주신 것도 그렇고, 우리가 고맙죠. 라비우 전하께서도 감사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마르웰 공작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아이든을 보았다. 볼품없이 마르고, 눈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은 건 처음 봤을 때와 똑같았다. 정돈되지 않은 흐트러진 금발 머리와 손님을 맞을 준비 따윈 하지 않은 듯한 옷차림을 보면 여전히 불쾌하고 무례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마르웰은 그에게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잘못 건드려서 좋을 것 없는 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좀 앉아서 대화할까요?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오래 서 있기 좀 피곤하네요.”

“네. 그러시죠.”

마르웰 공작은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에 서 있는 시종을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차가 준비되고, 잠시 눈을 감은 채 비스듬히 앉아 있던 아이든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마르웰 공작을 보았다. 한쪽 눈만 게슴츠레하게 뜬 채였다.

“이번에 보내준 아이들 말이에요.”

“……예.”

“품질이 좋더군요. 듣자 하니 한 명은 마력도 가지고 있다던데. 귀족입니까?”

“사생아입니다.”

마르웰 공작은 그 이상의 말을 아꼈다. 그럼에도 아이든은 다 알아들었다는 듯 두 눈을 번쩍 뜨고 환하게 웃었다.

“아, 그렇군요. 좋네요.”

마력을 가진 아이를 찾는 것이 어려운 만큼, 센칸은 마력을 가진 것을 가장 최상품으로 취급해 좋은 값을 주었다.

그저 그뿐. 아이든이 아이의 출신에 대해 더 캐묻지 않는 것처럼, 마르웰 역시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참. 이번에 내가 보자고 한 것은 거래 때문만은 아닙니다. 뭐 하나 제안 드릴 것이 있어서.”

“……무엇입니까?”

“그 전에, 공작가의 비보를 전해 들었어요. 영애가 사라지셨다죠?”

“그걸…… 어, 어떻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아이든은 대답 없이 씩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보기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 워낙 미친 작자다 보니, 그의 입에서 칸나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뛰어대었다.

“많이 상심하셨겠습니다. 공작께서는 영애를 황제와 혼인 시키고 싶어 하셨는데 말이죠.”

“칸나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원하신다면 찾아드릴 수 있어요. 저희가 하는 일이 그런 거니까요. 마침 저희가 준비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생긋 웃는 미소는 독을 품은 뱀처럼 간교해 보였으나,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마르웰 공작은 여전히 칸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센칸은 온 나라에 첩자를 심어 두었으니, 자신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오늘의 거래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리라 예상하기는 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칸나의 이름이 나오니 조급해진 마르웰이 성급히 물었다.

“저는 무엇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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