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플로라가 뒤를 돌아 시몬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불을 다시 켜고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살짝 가라앉은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자.”
무엇을 딱히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끝인사에 괜스레 마음에 멍울이 남는 듯했다. 플로라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그의 인사에 화답하고 방을 나섰다.
고작 옆방일 뿐인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의 곁에 이만치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먼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음에도 여전히 시몬을 향한 마음을 숨기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조금 더 용기를 냈어야 했을까.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 이 행복을 마음껏 누려도 모자랄 판에 무엇이 자꾸 스스로를 가로막는 것일까. 후회가 점철되었지만 시몬의 부름 없이 다시 침실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고된 하루를 보냈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다음 날이 되고,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떠올랐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선잠에 빠졌던 플로라는 또다시 정해진 일정을 소화해냈다. 오늘은 제국뿐만 아니라 타 대륙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배우들을 초청해 연극을 관람하는 날이었다.
플로라는 평소처럼 외곽에 숨어 황제를 지켰다.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시몬의 모습은 굉장히 화려했다. 앞머리의 반은 정돈되어 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헤어스타일에 황금색 크라운을 쓰고 있는 그는 이곳에 모인 그 어떤 이들보다 돋보였다. 한쪽 다리를 꼰 채, 가장 높은 곳에서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 시몬이 이 제국의 주인이라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황홀하며 자랑스러웠다.
플로라는 가장 높은 단 위에 앉은 시몬을 살피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보았다. 각국의 귀빈들이 배정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특이한 사항은 없었고, 수상한 사람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럼에도 플로라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네칸을 적으로 생각하는, 그리고 여러 번 자신을 죽이려 했던 센칸이 하네칸에 와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평화롭다.
라비우는 미동도 없이 석상처럼 앉아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표정도 무뚝뚝하다. 불행이라는 이름의 실체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플로라는 악몽에 사로잡히기 전에 시선을 돌렸다. 고요하다. 이 고요가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라비우는 은밀하게 자신에게 쪽지를 보냈으나 그 외엔 별다른 낌새가 없었고, 마수처럼 변한 파르베는 종적을 감췄다. 가만히 있을 작자들이 아닌데. 왜 이렇게 고요한 것일까. 플로라의 불안은 타당했다.
오늘의 일정은 비교적 빨리 끝났다. 연극과 화려한 공연을 끝으로 파티를 시작했는데, 이는 귀족을 위한 연회였으며 각국의 왕과 황제는 따로 회담 겸 식사 자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라비우가 어떤 비굴한 모습으로 시몬의 앞에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으나, 식당으로 들어가 보초를 설 만큼의 용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호기심일 뿐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얼굴을 보면 과거의 악몽들이 되살아날 것만 같으니까.
“기사를 하기엔 무척 아름답군.”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럽던 찰나, 누군가 플로라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말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남자가 제복을 차려입은 채 앞에 서 있었다. 파란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맑은 남자였다. 속눈썹도 길고 쌍꺼풀도 진한 데다 피부색은 살짝 그을려 있어 그런지 이국의 느낌이 물씬 났다. 하네칸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제국의 근방에 있는 국가인 모양이었다.
연회장 안을 지키던 선배들과 다른 기사단이 힐끗 플로라 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플로라는 살짝 눈을 내리깐 채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순 없었다.
“경의 이름은 무엇이지?”
습격과 같은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사적으로 귀족과 말을 섞는 일은 결코 없어야 했다. 이 안에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귀족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이름은 무엇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어디 소속인지. 듣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기가 이토록 어렵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지나가는 말로 듣기에 제국의 성에서 일하는 시녀들에게도 치근덕거리는 귀족이 있다더니 이 남자도 그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머리칼이 참 아름다워. 내 살면서 이리 반짝거리는 빛을 내는 머리칼을 가진 이는 처음 본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길 바랐건만 남자는 끝끝내 플로라에게 손을 댔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을 테냐?”
“…….”
“도도한 꽃이로구나. 좋다. 나는 꽃을 꺾는 취미가 있으니…….”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끔찍하게 싫었으나, 익숙한 손길이기도 했다. 꿋꿋하게 참아보려 했으나 이름도 모르는 이 귀족은 상황파악도 하지 못하고 더 선을 넘었다. 플로라의 손목까지 잡아챈 것이었다.
귀족은 플로라를 끌고 어디론가 나가기 위해 문 쪽을 향해 계속해서 잡아당겼다.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으나 사력을 다하자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더듬거리며 끌려가게 됐다.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이 몸을 움찔했으나, 플로라의 반응이 먼저였다.
“……아악!”
말을 섞지 말라고만 했지,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끌려나갈 생각이 없었다. 또한 이 남자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 지금 이 순간이 에르네가 일러 준 ‘불가피한’ 상황 중 하나에 속하겠거니 판단했다.
손쉽게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의 손을 뒤로 꺾어 반쯤 허리를 굽히게끔 만든 플로라가 싸늘한 눈빛으로 귀족을 내려다보았다. 힘을 많이 준 것도 아니니 그리 아프지도 않을 텐데, 엄살을 떠는 꼴이 눈꼴사나웠다.
“이거 못 놔?”
“…….”
“내가 누군 줄 알고!”
버럭하는 소리에 일순 연회장 안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플로라가 귀족을 놓아주었다. 귀족 역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처음 플로라에게 보였던 싱그러운 미소가 아닌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은 분노에 절어 반쯤 돌아 버린 것 같았다.
플로라는 이런 작자들을 잘 알았다.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행세하고, 뒤에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라비우와 미친 연금술사 아이든의 모습과 동일했다.
남자는 순식간에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플로라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맞아 줘야 끝이 날까, 아니면 저지해야 할까.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금세 사그라졌다.
“뭐야?”
높이 치켜든 귀족의 팔을 누군가 붙잡은 것이다. 정갈하고 단정한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의 모습은 플로라에게 아주 익숙했다.
귀족 남자의 눈동자보다 더 짙푸른 색을 품고 있는 눈빛이 플로라에게 닿아 있었다. 한때는 저 표정을 무섭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차갑다고 여기기도 했다. 앞머리가 말끔하게 올라가 있어 그가 짓는 표정을 세세히 살필 수 있었다.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구긴 것을 보자, 잠시 꿈인가 싶었던 플로라는 현실을 자각했다.
카신 르벨로티아. 흑기사단의 단장이자 르벨로티아 가문의 가주. 그가 플로라를 해코지하려던 귀족을 저지한 것이다.
카신의 행색을 본 귀족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기사단에서 만나던 때와 달리, 카신의 모습은 진짜 귀족처럼 보였다. 플로라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에 듬직한 척하며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콧대만 높일 줄 알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제국에서 명망 높은 한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어엿한 공작이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용을 느낀 탓일까. 귀족의 입술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보시오. 뭐 하는 짓입니까? 이것 좀 놓고…….”
“당신이야말로 뭐 하는 짓이지?”
“이 기사의 얼굴이 반반하기에 같이 놀고자 했을 뿐이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무리 신분이 높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해도 누구보다 허울을 중요시하는 것이 귀족이었다. 그러나 예의에 어긋난 행위를 해 놓고도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그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낯짝 하나 반반한 것으로 기사 서임까지 받았을 터인데, 내 신분 상승 한번 제대로 시켜 주겠다는데 문제가 있습니까?”
순간 플로라는 보았다. 카신의 입술 사이로 작게 터진 욕설을.
자신이 모욕당했다는 사실보다, 카신이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위험 경보가 강하게 느껴졌다. 플로라가 규칙을 어기고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카신이 고개를 숙여 남자의 귓가에 무언가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귀족 남성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플로라를 바라보고, 또 이리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단숨에 겁에 질린 얼굴을 한 것을 보니 심한 협박이나 욕설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카신이 치켜 올라간 그의 손목을 놓자, 남자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카신은 이제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괜찮은지 살피듯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꼼꼼히 살피는 푸른 눈동자는 무척이나 집요해서 플로라는 잠시 숨을 삼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