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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9)화 (109/154)

109.

“플로라.”

플로라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는 걸 시몬은 단번에 눈치챘다. 그는 부러 플로라의 손을 더 꽉 쥐며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자신을 바라보는 듯했으나 이내 금방 눈을 돌리는 행동이 수상하게 보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부끄러워서 그렇겠거니 생각했겠지만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달랐다. 시몬은 촉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무슨 일이야?”

시몬의 질문에 그제야 플로라가 다시 시선을 맞춰왔다. 그녀의 커다랗고 검은 동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이따금 답답할 때 올려다보던 어두운 밤하늘처럼 느껴졌다. 별을 수놓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에 입을 맞추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네?”

플로라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모른 체하는 것뿐이었다.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었던 거지?”

그가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면 발가벗겨진 채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처음엔 그녀도 이런 시선을 싫어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몬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싫지 않았다.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의 눈빛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타인의 마음을 믿지 못하던 시절은 지났다.

“그냥 좀…… 피곤한 모양입니다.”

“플로라.”

시몬은 집요했다. 원래의 그였다면 모른 척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닌 플로라였으니까. 그녀와 마음이 닿고, 이제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는데. 그녀와 자신 사이에 더는 다른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플로라를 이길 수 없음을 곧 깨달았다.

“나중에요. 생각이 정리되면 말할게요.”

센칸의 놈들을 만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리비에르와의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면……?

재촉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시몬은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술은 많이 드셨습니까?”

“아니. 조금…… 장단에 맞춰주었지.”

“지금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술이 들어가면 신나지 않아도 조금은 기분이 들뜨더군. 그래서 자주는 아니지만…… 기분이 너무 안 좋을 때는 종종 마시기도 해. 걱정이 사라졌으면 해서.”

“……그렇군요.”

“플로라도 술을 마셔?”

“가끔 마시긴 합니다.”

하지만 까마득한 기억이긴 했다. 언제 술을 마지막으로 마셔 보았더라…….

플로라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시몬을 바라보다 웃었다. 점점 취기가 오르는 모양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볼이 붉어지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하지만 시몬에게 직접 말하기엔 무례하다 생각해서 그저 속으로만 꾹 삼켜내었다.

얼마간의 침묵 후 시몬이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에 리비에르와 수양딸이 사라진 얘기를 했을 때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잠깐 해주었는데, 오늘은 좀 더 세밀하게 자신이 지닌 기억들을 풀어 놓았다. 그는 무얼 하고 놀았었는지, 또 어떻게 이 성에서 친구도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지내었는지.

“내가 어렸을 때는 이 창밖에 타란튤러스 꽃이 가득했어.”

창밖을 내다보는 시몬의 눈빛에는 추억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타란튤러스요?”

“응. 어머니가 좋아했거든.”

연보랏빛의 타란튤러스 꽃이 겹겹이 쌓여 바람결에 살랑이는 것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같았다.

“저도 타란튤러스는 좋아합니다.”

“그래? 건국제가 지나고 나면 나도 이 정원을 다시 가꿔봐야겠어. 이런 거엔 영 소질이 없긴 하지만 말이야.”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좋아.”

시몬은 생긋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에 오롯이 마음이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몬의 이야기를 듣는 건 즐거웠다. 그가 어린 시절에 리비에르와 아이처럼 다투던 이야기, 그리고 아카데미 시절에 땡땡이를 치다 하필이면 아카데미 학장님께 걸려 벌을 받았던 이야기까지.

“에르네가 나 대신에 죄를 덮어쓴 적도 여러 번인데 말이야.”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셨군요.”

“……으응. 그렇지 뭐.”

플로라가 쿡쿡 웃었다. 그녀는 경험해보지 못한 딴 세상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타인과 어울려 논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보다 상대를 죽이는 방법을 먼저 배웠다.

“저도 수업을 듣긴 했습니다만…… 워낙 치열한 곳이었어요.”

그녀도 무언가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어둠까지도 감싸 안아 줄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낡은 기억을 헤집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시몬이 눈을 반짝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붉게 물든 뺨을 어루만져 보고 싶었다.

“수업은 매일 정해진 일정대로 진행되었고, 기계처럼 생활했어요.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 훈련하고……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그중 뛰어난 사람을 골라냈죠.”

“…….”

“성실하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치열했어요.”

시몬은 잠자코 들었다. 그녀가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어떤 공부를 해 왔는지.

들을수록 치가 떨렸다. 센칸은 괴이한 나라라는 것이 점점 더 사실화되어 갔다.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곳이란 생각이 들어.”

아이들을 잡아가서는 기억을 지우고, 훈련을 시킨다…… 라.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인간의 정신 머리로는 해낼 수 없는 일 같았다.

“……나쁜 기억이지만 그래도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이런 말도 할 줄 알게 되다니.

플로라는 자신이 조금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플로라는 뭔가 배우는 게 좋지?”

“네.”

“그럼 하네칸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좀 더 받아보는 것은 어떻겠어?”

그녀는 책을 읽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흥미를 느꼈다. 시몬도 그녀가 종종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기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리비에르도 마법 수업을 할 때, 그녀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었고. 정식 교육을 받는다면 지금보다 더 훌륭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교육이요?”

시몬의 제안에 플로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솔깃한 말이기는 했다.

“리비에르의 저택으로 곧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가게 되면 이제 하네칸 제국민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거야. 네가 리비에르의 수양딸인 것을 밝히는 셈이 될 테니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히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나의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뭔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대로 리비에르의 저택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까? 플로라가 금방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시몬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플로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영애가 된다면 네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테니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본 거야.”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거짓말.”

“제 얼굴에 그런 생각이 쓰여 있습니까?”

“응. 다 드러나는걸.”

“전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심지어는 사람을 죽일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그녀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며 감정 따위는 잃은 지 오래인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이리 쉽게 마음을 들켜 버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 사람이어도 돼. 뭐가 어때서.”

“…….”

“적어도 나한테는 다 보여줘도 돼. 솔직해져도 되고.”

플로라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입술을 떼었다.

“그럼 아까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해도 될까요?”

“……뭔데?”

시몬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망설이던 플로라는 손을 뻗어 시몬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볼이 빨개요. 지금 엄청 귀…… 귀여우십니다.”

그녀의 말과 동시에 시몬의 얼굴은 더 붉게 달아올랐다. 화르르 귓불까지 빨개지는 것을 보자,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곧 시몬이 시선을 가만두지 못하다 이내 고개를 폭 숙여 버렸다.

귀엽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제 뺨에 닿은 손길에 온 신경이 격렬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든데, 이렇게 훅 선을 넘어 버리면 곤란하다. 시몬은 숨을 참았다. 자신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 부, 불쾌하셨다면…….”

“그리고?”

“네?”

“귀엽기만 한가?”

겨우 마음을 추스른 시몬이 고개를 들고 뻔뻔하게 물었다.

혹여 얼굴이 빨개진 것이 당황스럽고, 불쾌하고, 또 허락 없이 얼굴에 손을 댄 것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일까 싶어 걱정했는데. 그의 눈치를 살피던 플로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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