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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7)화 (107/154)

107.

시몬은 자신의 옷깃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칸나를 바라보았다. 칸나가 살짝 눈을 들어 시몬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누가 보아도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한 연인이었다. 무투 대회를 즐기러 온 사람들은 경기도 경기였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에도 은근히 흥미를 느끼던 중이었다. 시몬도, 칸나도 그걸 알았기에 철저히 이용했다. 그동안 이어왔던 연극의 화려한 대미를 위해.

* * *

대회가 끝나기 무섭게 칸나는 사라졌다. 시몬은 그녀가 안전하게 제국을 떠났는지, 앞으로 어떤 새로운 사건들이 벌어지게 될지 고민하며 사색에 잠겼다. 에르네에게는 이미 사전에 그녀의 행방을 파악해두길 명령 했으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칸나는 정말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떠나 버린 것이니까.

지끈거리는 이마를 천천히 문지르던 시몬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우직하게 선 플로라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이 방에 들어올 때까지는 그녀가 아닌 다른 기사가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 교대를 한 모양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플로라를 보자 사르르 녹았다.

“플로라. 앉아 있어도 돼.”

“……근무 중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당분간은 시몬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라비우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한순간도 플로라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습격이 시작될지 모를 일이었다. 라비우가 준비도 없이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만한 위인이기도 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플로라는 수시로 창밖을 바라보며 황제의 성 밖을 지키는 근위대들과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다행히 수상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음에도 시몬의 고고한 자태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는데 살짝 찡그린 미간조차 그림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물어보기도 뭐해서 플로라는 말을 아꼈다.

시몬이 두세 번 재차 제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으나 플로라는 끝끝내 창가를 지켰다. 습격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질 줄 알고. 외부인이 들어올 수 있는 길목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희대의 조각품 같던 시몬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침실 끝에 위치한 책상에서 빨간색 벨벳 의자를 덥석 들어 올리는 모습에 플로라가 몸을 움찔하며 걸음을 떼었다.

“……시몬!”

“내가 그리 가서 앉지. 뭐.”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이 의자도 들지 못할 정도로 병약해 보이는 건 아니겠지?”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자신을 무시하냐는 투로 묻기에 플로라는 팔을 뻗었던 것을 멈췄다. 끝끝내 창가 쪽으로 의자를 옮겨온 시몬이 보석이 박혀 반짝이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까보다 훨씬 시몬과 거리가 가까워진 채였다. 플로라는 다시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의 맑은 눈빛을 바라보다가 플로라는 무심결에 질문을 꺼냈다. 촉촉하게 젖은 듯한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가 이내 눈꼬리가 축 처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 많이 신경 쓰였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투 대회에서 말이야.”

플로라는 모른 체 질문했고, 그것에 대한 답을 받자 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오늘로 다 끝났어.”

“…….”

“칸나는 하네칸을 떠났거든. 영영.”

시몬의 말에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영 떠났다니?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여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센칸을 떠나던 자신의 모습이 얼핏 비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슨 연유에서 하네칸을 떠난 것일까. 플로라가 잠시 칸나의 생각으로 빠져들었을 무렵이었다.

시몬이 우두커니 서 있는 플로라의 손을 잡아 왔다.

“센칸의 왕이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민할 텐데 괜히 마음 쓰이게 해서 미안해.”

“……칸나 영애께서는 무슨 연유로 하네칸을 떠나신 겁니까?”

지금까지 그녀를 질투하고 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거대한 궁금증이 그 감정의 자리를 가득 메웠다.

“너무 오랫동안 새장에 갇혀 살았어.”

“…….”

“그러다 강제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타국에서 생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기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결심을 한 듯해.”

칸나는 무언가 하나에 빠지면 깊이 몰두하는 성격이었다. 호기심은 물론이고, 사랑도,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렇다고 어떻게 가문을 버리고, 제국을 버린 채 홀몸으로 타국으로 도망칠 생각까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무모했으나 다르게 보면 용감하고 멋있었다. 시몬이 보기에도 그녀는 평생을 온실 속에서 갇혀 살 뻔한 인생이었다. 분명히.

그렇기에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거나 무모하다고 손가락질하고, 깊이 말리려 하지 않았다. 칸나 마르웰, 아버지가 정해 준 삶이 아닌 그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군요.”

칸아 영애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플로라도 자신이 살아온 삶, 그리고 자신의 전부를 버릴 각오를 하고 센칸을 떠났기 때문에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새장 속에만 갇혀 살았던 삶이었다면, 퍽 갑갑했을 것이 분명했다. 첩자 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타국을 돌아다닐 때에 귀족 영애처럼 위장을 하고, 그들의 삶에 녹아들었던 적도 있었다. 정말 끔찍한 기억이었다.

시몬이 맞잡은 손을 꽉 잡아 왔고, 플로라 역시 힘주어 그 손을 잡았다. 그동안 칸나와 데이트를 하고, 또 대중의 눈에 연인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무투 대회까지 함께 나갔던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아버지인 마르웰 공작을 속이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던 것일까?

그래서 시몬이 지난번에 제게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일까.

별별 생각은 다 들었지만, 칸나 영애, 그녀의 삶에 대해 깊게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잘한 궁금증은 그저 삼키기로 했다.

“칸나와 약속을 했어. 자신이 떠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모두를 속여야만 하니까.”

“…….”

“에르네에게도 오늘이 되어서야 말했어. 네이라도, 카신도, 이든도. 아직 모르고 있어.”

“어디로 떠나신 건지는 모르는 건가요?”

시몬이 걱정하는 것이 이해는 되었다. 플로라의 물음에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학 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더군.”

사랑을 위해 전부를 버린 것인가.

플로라는 다시금 칸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도 사랑 앞에선 모든 것을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멋있었다.

“칸나는 언제나 스스로 잘해왔으니, 이번에도 옳은 선택을 했으리라 생각하고 보내 줄 수밖에 없었어.”

“…….”

“내가 붙잡는다고 해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칸나를 붙잡으면 나는 미루고 미루더라도 언젠간…… 그녀와 혼인을 해야 했을 거야. 그건 나도 싫었으니, 사실 칸나를 위하는 척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지.”

칸나와의 혼인.

그 말만 들어도 가슴에 수십 개의 가시가 돋친 것처럼 따끔거렸다.

“마음에 다른 사람을 품고, 혼인하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못할 짓이잖아.”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초롱 거리는 주홍빛 눈망울이 사랑스러웠다.

그의 말에 플로라의 뺨에 단숨에 홍조가 생겨 버렸다.

칸나가 하네칸 제국을 영영 떠났다는 것이,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쓰였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제 그녀와 시몬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지 않겠구나 싶어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이기적 동물인 모양이다.

간질거리던 손등 위로 시몬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촉촉하고 말캉한 것이 살갗을 스치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플로라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시몬을 내려다보았다.

“좋아해.”

이 행복이 자신의 것이 맞을까.

플로라는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감정을 끌어안아야 했다.

“……같은 마음입니다. 시몬.”

그럼에도 당장은 이 행복을 누려보고 싶었다. 설사 언젠가 깨어질 꿈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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