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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6)화 (106/154)

106.

무투 대회는 귀빈들의 방을 배정하고 진행되도록 시간이 짜여 있었다. 시몬은 그사이 짧은 시간 동안 칸나를 만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투 대회를 함께 보러 온 황제의 연인처럼 보였으나, 그는 무투 대회가 끝난 직후 곧장 하네칸을 떠날 채비를 다 해 둔 채였다. 자신의 제국을 떠나는 친구를 눈감아 줘야 한다니. 막상 그녀를 떠나보낼 거란 생각을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뭘 그렇게 봐? 이제 와 내게 반한 건 아닐 테고.”

칸나의 새침한 말에 시몬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아직 번복할 기회가 있어.”

“내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시몬.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가 청혼을 한다고 해도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

“너무 오래 기다렸어.”

그렇게 말하는 칸나는 아주 오랜 세월을 하네칸에서 보낸 것마냥 추억에 가득 잠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새장에서 벗어난 그녀가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그래. 괜찮겠지.

“돈은 있어?”

“날 뭐로 보는 거야. 시몬.”

“필요하면 언제든 서신을 보내. 칸나.”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구겼던 칸나는 시몬의 호의에 못 말린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좋아. 그럼 마지막 데이트를 즐기기 전에…… 네게 선물을 줄 차례인가?”

칸나가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어떤 대단한 이야기를 하게 될지 궁금했다. 주변에 있는 기사들을 전부 물리고, 단둘만 응접실에 남게 되었다. 긴장되는 듯 마른침을 삼켰던 칸나가 이내 결심이 선 모양인지 시몬을 보았다.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이상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어.”

“무슨 일?”

“불법 경매장.”

“경매장……? 거기서 뭘 파는데?”

시몬의 물음에 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꼭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사람이었어.”

칸나는 자신의 집에 종종 어린아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하녀로 키우기 위해 먹고 재우고 교육을 시키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점차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은 보았으나, 한 번도 저택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저택이 크다 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몇 번, 칸나는 결정적으로 아이들이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잠이 오지 않아 창가에 서서 어둠에 잠긴 고요한 정원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데다 워낙 작은 그림자들이라 꼬물거리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무리 생활을 하는 짐승들처럼 줄지어 어디론가 이동했다.

저 어린아이들을 밤늦은 시각에 무엇에 쓰기 위해, 어디로 데려간단 말인가.

우연찮게 발견한 풍경 하나가 칸나의 마음에 풍덩 돌을 던졌다.

지금까지 외면해 오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이 저택에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이 들어왔었지만, 현재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들은 몇 명 없다는 것.

칸나의 호기심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한 번 흥미롭게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끝장을 보아야 했다. 대부분의 일들을 무심하고 따분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한번 무엇에 빠지면 누구도 말릴 수가 없을 정도로 깊게 몰두했다.

칸나가 우연히 보았던 그 아이들의 그림자가 그러했다.

그녀의 호기심이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넌지시 어린아이들이 많이 들어왔던 것 같은데, 저택에 남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물으니 아버지에게서는 냉담한 말이 돌아왔다.

“고용인들에게 일일이 마음 쓰지 마라. 우리 저택에서 쓸 만한 인재들이 아니라 돌려보내었을 뿐이다.”

가끔 아버지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완벽한 프로그램은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서재를 몰래 뒤적거려 보기도 하고 데려온 아이들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확인도 해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저택에 있는 이들은 일단 전부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간, 아버지의 귀에 금세 들어가게 될 것이다. 칸나는 예전부터 숨죽여 사는 것에 대해 배우고 터득했기 때문에 눈에 띌 정도로 수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들이 몇 가지 있었다.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암시장을 다니신다는 것. 그리고 그날마다 저택으로 데려왔던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것. 인정하긴 싫지만 충격적인 사실 한 가지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아이들을 데려오지도, 데려가지도 않았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고.”

“그럼 이제 더 이상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닐걸.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젠 네가 찾아내면 돼.”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가늠도 하지 못하긴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 끔찍하고 추악한 사실에 절로 화가 치솟았다. 시몬은 멍하니 칸나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 일을 알아 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넌 괜찮은 건가? 그런 일을 알고도.”

“처음엔 소름 끼치도록 아버지가 싫었지. 원래도 단호하고 냉혈한이어서 두려워했지만, 그 사실을 알았을 당시에는 더 무서웠어. 단순히 내 추측뿐일 거라고 그냥, 그렇게 믿으면서 사는 수밖에 없었어.”

시몬은 칸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시몬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뜻밖의 큰 수확이었다.

예상보다도 더 큰 선물에 마음은 두근거렸으나 대놓고 좋은 표정을 지을 순 없었다. 시몬은 고마워해야 할지, 위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칸나가 다시 팔짱을 뀌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 줘도…… 정말 괜찮은 거야? 나와 공작의 관계가 좋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널 쥐고 흔들려 애썼는데. 거기에 나까지 포함시켜서 더 큰 권력을 꿈꿨지.”

“…….”

“난 아버지를 포기했어. 그 새장에서 떠나기로 결심했고. 그러니까 처분은 네게 맡길게. 나쁜 짓을 했으면 죗값은 치러야 하잖아.”

시몬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 예상하고 있는 그것이 마르웰 가의 추악한 이면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바로 잡는 것이 맞았다.

“자, 그럼 이제 가볼까요. 시몬 폐하? 마지막 데이트네요. 오늘은 좀 더 무례하게 굴어도 이해해 주세요.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하니까요.”

칸나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시몬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몬의 손 위에 살포시 제 손을 얹은 칸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발버둥 치고 있긴 했으나, 언젠가는 칸나와 자신이 혼인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결국 마르웰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렇게 황제로서의 여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시몬은 그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 * *

무투 대회는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플로라는 센칸 덕분에 건국제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은 전부 경기를 즐거워했다. 올해의 우승자는 럼이었다. 일반 용병들이나 기사들도 참가했기에 마스터여도 마력은 금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훌륭한 실력으로 순식간에 우승 상금을 차지했다. 항상 뚱한 것처럼 보였던 럼의 얼굴에도 처음 보는 환한 미소가 자리 잡은 채였다.

매번 농땡이만 피운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본 실력에서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정예 기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 플로라는 럼에게 검과 상금을 하사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도 보였다.

녹색의 싱그러운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 칸나 마르웰.

멀리서 보아도 두 사람의 모습은 연인 그 자체 같았다.

플로라는 마음을 꾹꾹 내리눌러 놓았음에도 질투라는 감정이 비집고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역시 질투가 난다고.

시몬은 이해해 달라고 했지만,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피어나는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역시도…… 플로라가 다른 이성과 함께 있을 때 질투를 느낀다고 했지 않았는가. 분명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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