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5)화 (105/154)

105.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건국제 준비, 무투 대회 준비, 그리고 시몬, 리비에르, 카신과 에르네, 루가르와의 인연까지도. 평안하고 행복해서 이제 이것이 오롯이 플로라 자신의 일상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 언제 기구하고 힘든 삶을 살았는지, 아주 오래전 일어난 희미한 꿈처럼 느껴진다.

“이레나, 아니 플로라. 잘 지냈니?”

리비에르는 종종 그녀를 이레나라고 불렀다. 이제 플로라는 이레나 또한 자신의 이름임을 받아들였다. 플로라라는 이름은 센칸에서 온 것이다. 라비우에게 하사받았던 이름. 센칸을 떠나면서 제 이름 또한 버리고 싶었기에 이제 센칸의 플로라는 존재는 세상 속에서 영원히 지워 버리고 싶었다.

“앞으로 이레나라고 불러 주셨으면 해요.”

“…….”

“아버지.”

플로라의 말에 리비에르가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란 말은 마음 같아선 매일 듣고 싶었지만, 플로라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듯 보여 재촉하지 않았다. 매일 들을 수 없어 더 애틋한 것일까. 리비에르는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레나.”

리비에르도 그녀를 이레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았다.

“저택으로는 언제쯤 들어올 예정이니? 근위대라 바쁜 것은 알지만…… 야간 근무가 아닐 때는 종종 저택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미 가까운 고용인들에게는 은밀하게 말을 전해 두고 이레나의 방을 그동안 쭉 사용해 왔던 것처럼 새로 꾸민 상태였다. 그녀의 마음만 준비된다면 모든 것은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었다. 리비에르 역시 해치우고 해치워도 해일처럼 덮쳐오는 일들에 종종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저택에 갈 때면 늘 이레나의 방을 들여다보곤 했다. 주인을 기다리는 텅 빈 방은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건국제가 끝나면요. 저택으로 들어갈게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지금 숙소도 충분히 좋긴 했지만 아무렴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더 낫겠지. 리비에르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근위대도 건국제 준비를 해야 하므로 매우 바쁜 시기였다. 시몬이 공식 석상에 나가는 이동 동선을 짜고, 그를 어떤 위협에서든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 기사들을 배치해야 했다.

“그래. 내가 성급했구나…….”

리비에르도 요즘 성 내의 모든 고용인이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플로라를 이해했다.

조금 외로워 보이는 리비에르의 얼굴이 마음 쓰였다. 플로라는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을 애타게 찾아다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것도 쉬이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제 마력은 다 모인 것 같죠? 그동안 이걸 연습했어요.”

플로라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바닥을 펼쳤다. 이제 빛 정도는 손쉽게 뿜어낼 수 있었다. 리비에르가 마법을 가르쳐주던 날, 플로라에게 보여 주었던 나비의 형상이었다. 팔랑거리는 날갯짓이 우아했다. 리비에르가 옅게 웃었다.

“많이 늘었구나.”

“이제 저도 마스터들처럼 검에 마력을 담을 수 있을까요?”

플로라의 눈이 초롱 거렸다. 한때 대마법사의 자리에 오를까 기대했었던 아이가 검을 쥐고 있는 것이 걱정되고 마음 쓰였지만, 이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풀린다.

강한 마력을 지닌 자는 체력이 약했다. 어렸을 때는 이레나 또한 그랬다. 길을 가다 잘 넘어지기도 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열을 달고 앓는 시기가 한 번씩 있었다. 그랬던 플로라가 스스로 마법을 봉인하고, 비인간적인 실험을 당하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후천적으로도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지만, 그동안 플로라가 겪어야 했을 일들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센칸이라고 했던가.

며칠 후면 센칸의 왕이 하네칸에 도착한다. 그를 죽이는 것쯤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능할 터였다. 아아……. 리비에르는 플로라의 과거를 떠올리다 저도 모르는 살기를 내뿜고, 몸을 움찔했다.

“아버지, 무슨 일 있으세요?”

이미 마음속에서는 수백 번, 수천 번을 찢어 죽였다.

정작 그 왕과 주도적으로 실험을 한다는 아이든의 얼굴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한이었다.

* * *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잠들지 못한 적은 없었다. 이제 악몽도 거의 꾸지 않고, 불면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제는 날이 날인 만큼 쉽게 잠들 수 없었다.

“플로라 경.”

“아, 이젤 경. 안녕하십니까.”

숙소 앞에서 이젤을 만난 플로라는 그에게 인사했다. 플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을 잘 못 잤나 봐요?”

“아…… 네. 얼굴에 다 보이십니까?”

“눈이 빨개요.”

“긴장되어서 그런가 봐요. 근위대에 오고 처음으로 가장 큰 임무를 맡게 된 거니까요…….”

이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 시간 날 때마다 쉬어 둬요.”

“……알겠습니다.”

“배치도 보니까 플로라 경은 전부 후방인 것 같던데. 역시 활을 잘 쏘니까 든든하네요.”

“이젤 경은……?”

“오늘은 폐하의 호위를 맡았어요. 플로라 경, 그럼 잘 부탁할게요.”

플로라는 이젤과 함께 집합 장소로 향했다. 에반 부단장과 몇몇 선배들은 먼저 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플로라 역시 후다닥 그들 틈에 서서 몸을 풀고, 무기를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지났고, 이제 그녀는 후방, 정해진 자리에 위치한 채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긴장되어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간밤에 잠들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호화로운 마차들이 각국의 특산품과 보석을 싣고 성문을 넘어오고 있었다. 저들 틈에 라비우가 있다. 아이든도 있을지 모르고. 플로라는 바짝 긴장한 채 숨통이 죄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경계했다.

멈춘 마차에서는 차례대로 황제에게 초대받은 왕 또는 귀족과 사전에 허락된 그들의 고용인이 함께 내렸다. 시몬은 친히 그들을 마중 나와 반겨 주었다. 하네칸의 건국을 축하하는 자리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보니 옷을 입은 것도, 치장을 하는 것도 조금씩 달랐다. 하네칸처럼 단정한 수트 차림에 특징적으로 돋보이도록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키라보다 더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듯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온갖 보석 장식을 다 달고 나타난 세빌 왕국의 여왕이나 황금이 나는 나라에서 온 아발타의 왕이 그러했다.

아발타의 왕은 타고 온 마차에서부터 부유함이 눈에 띄었다. 씀씀이가 크다는 소문만큼이나 가지고 온 선물도 거대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상자만 보아도,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알 것 같았다.

플로라가 첩자로 활동했던 몇몇 나라에서도 방문했다. 왕 또는 황제와 직접적으로 만난 일은 없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시몬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정말 축제의 시작 같았다.

그리고…… 플로라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마지막 마차가 열리고 나서야,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머리칼과 태양빛에 오래 그을린 듯한 고동색의 피부.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그의 뺨에 길게 난 상처 자국도 보였다. 라비우 오벨리아. 그는 센칸의 왕이었다.

그는 덥고 갑갑한 것을 싫어해서 몸에 달라붙지 않는 옷이나, 팔이라든지 가슴이라든지 신체의 일부를 드러내는 옷을 주로 입었다. 하지만 오늘은 단정하게 온몸을 가린 검은색 수트를 입은 채였다. 라비우의 뒤로는 그가 데려온 시종들이 있었는데, 그들 틈에 아이든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라비우는 긴 다리로 성큼 시몬에게 다가갔다. 라비우와 시몬이 마주 섰다.

플로라의 마음에선 이미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든 활을 꺼낼 수 있도록 허리춤에 손을 댄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던 것은 잠시였다. 라비우가 시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인 라비우를 내려다보는 시몬의 표정은 일순 싸늘해졌으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라비우까지 전부 성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플로라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얼마나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던지, 화살을 쥐기 위해 허리춤으로 향해 있었던 오른쪽 손목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가 하네칸에 왔다.

센칸의 왕 라비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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