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제국이 마수와의 전쟁, 그리고 정복 전쟁으로 한창일 때였다.
제국의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나날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ㅔ않았고, 마수가 벌인 전쟁 때문인지 날이 갈수록 제국민들 사이에서 마력은 더 귀하게 여겨졌다.
귀족들은 유행처럼 자신의 마력을 갈고닦는 데에 집중했고, 카신 역시 그 기세에 휩쓸려 자신의 마력을 성장시키는 데에 흥미를 느꼈다.
어린 가주를 기특하게 여긴 대마법사 리비에르는 그를 저택으로 초대했다.
카신은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를 만나기 전에 정원에서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햇빛을 받아 더욱 눈부신 은발 머리가 그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특이한 머리칼이었다. 가주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나,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주가 될 준비를 해왔기에 이 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빠삭한 편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다른 이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레나 영애입니다.”
곁을 따르던 그의 기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쨌든 이름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는데, 그제야 확실히 들은 기억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 리비에르가 오랜 싸움 끝에 수양딸을 데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 아이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녀를 행운아라고 했다. 이전에도 명망 높은 공작가의 귀한 외동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그녀는 행운아가 되었다. 몰락할 뻔한 인생에 다시 한번 빛이 찾아왔다는 이유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공작은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직 말도 잘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의 영애에게 주어진 재산은 주변인들의 먹잇감이 되기 제격이었다. 제게 있는 재산을 관리하고 가주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카신 역시도 어린 나이였지만 저 아이는 더 작고 어렸다. 왠지 모를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리비에르와 식사를 하기 위해 응접실에서 티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슬쩍 문이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을 보기도 전에 특이한 은발의 머리칼이 보였다. 눈을 굴리다 리비에르를 발견한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아…… 미안합니다. 저의 딸 아이가 오늘 하루 종일 혼자 있어 그런지 심심한 모양입니다. 손님이 있을 땐 이러지 않는데……. 용서하십시오. 공작님.”
“괜찮습니다.”
카신은 의젓하게 대답하며 허리를 곧게 폈다.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시야에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소파에 털썩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이레나 영애는 들고 왔던 책을 폈다.
바보 같아.
책을 거꾸로 펼친 줄도 모르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과 발그레한 뺨을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보.
카신이 간직하고 있는 이레나와의 첫 기억이었다.
* * *
리비에르는 이레나라면 껌뻑 죽었다.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피가 섞인 부녀지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카신은 종종 저택에 초대받았다. 이레나는 낯을 가리는 법이 없어 두 번째로 만나던 날부터 카신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말도 잘 되지 않는 어눌한 말투로 어버버 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면서 여전히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직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이레나는, 좋게 말하면 보는 재미가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신경 쓰였다. 장난스레 이레나를 놀리다가도, 가끔 카신이 다른 이들에게 날 선 태도를 보이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곤 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카신은 이레나 앞에서는 항상 제 감정을 다스렸다.
또한 그녀는 솔직하고 어린 구석이 있는가 하면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면도 있어, 그것이 늘 안타깝고 마음이 쓰였다.
* * *
어느 날 이레나는 카신에게 정원에서 꺾은 꽃을 주며 자신과 함께 살자고 했다. 어린아이가 그런 말을 해 봤자 뭐 얼마나 진지한 말이겠냐마는 카신은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건 당연히 청혼이라고 생각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다. 먹어.”
카신은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더는 책을 거꾸로 읽으면서도 즐겁다고 까르르 웃던 바보 같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 아이라는 말을 들으니 계속해서 눈길이 닿았다.
……이레나.
카신은 자신이 음식을 제대로 먹고 마시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온 신경이 그녀에게 쏠리고, 그녀만 보였으니까.
플로라는 오늘 카신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외에 별다른 의심은 하지 못했다.
함께 광장을 구경하고, 식당까지 들어오는 동안에도 별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제 얼굴에 무엇이 묻었겠거니. 했다. 혹은 제게 할 말이 있다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서 계속해서 꼬집어 묻지 않았다. 그저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식사를 다 하고, 티타임을 가질 무렵에서야 카신은 입을 열었다.
“이레나.”
얼마나 오랫동안 입 안에 넣고 굴렸던 이름인가.
그녀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카신은 오랫동안 이 이름을 곱씹어 외웠다. 혹시라도 잊혀지지 않도록.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내뱉자 한기가 온몸을 덮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유적지에서 그 이름을 발굴해 낸 것만 같았다.
그의 말에 찻잔을 쥔 플로라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시선이 흔들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플로라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카신을 곱씹어 보았다.
리비에르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그 얘기를 할 사람은 리비에르밖에 없을 테니까.
어린 시절에 만났던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단장님께서 절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
“이제 와 얘기해 봤자 혼란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내가 널 어떻게…….”
카신은 말을 다 잊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말이었다. 첫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플로라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서운하고 야속하긴 했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제 마음껏 이레나를 볼 수 있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거 하나면 됐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레나. 난 한순간도 널 잊은 적 없어.”
그 시절 카신이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지금도 말하면서 심장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라 썩 좋지는 않았다. 하나 순간의 소중함을 깨달아 버린 지금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감정을 구태여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왜 기사가 되었는지.
네가 사라지던 날,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으로.
자신이 그녀를 사라지게 한 것도 아닌데,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리비에르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왔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지켜 주리란 마음으로 검을 쥐었다.
손이 부르트고 살갗이 다 터질 때까지도 펜보다 검을 더 손에 쥔 채 생활했다는 걸…… 모를 테지.
카신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플로라를 계속 빤히 보았다.
이레나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가 응답하는 것이 신기했다. 마치 꿈속인 것만 같았다.
“이레나.”
“……오라버니.”
이 얘기를 하려고 했구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레나도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을 꺼내 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라 카신에게 느꼈던 감정의 무게까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떠오른 기억을 추억처럼 꺼낼 수 있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제국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그의 미소는 예전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플로라도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때는 키가 이만했었는데.”
“오라버니라고 그렇게 차이 나지 않았을 텐데요.”
“지금은 어마어마한 차이지.”
그렇게 카신과 성으로 되돌아오며 어렴풋한 옛날이야기들을 나눴다.
우리가 어떤 황당한 일들을 벌였었는지. 무슨 공부를 함께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함께 나눌 추억이 있다는 것은 대화하는 시간을 즐겁게 했다.
“리비에르 님과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아? 더 이상 숙소에서 살 필요 없잖아.”
카신은 플로라를 바래다주었다. 여전히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신의 질문에 플로라가 대답했다.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하시는데, 아직은 숙소가 편해서요. 일이 바쁘기도 하고요.”
“……그렇군.”
“건국제가 끝난 뒤에 생각해보려고요.”
그녀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하며 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비에르에게 듣고 나서도 긴가민가했던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그녀가 평소보다 더 애틋하게만 느껴졌다.
그저 플로라가 이레나가 되었을 뿐인데.
별걱정이 다 들었다.
숙소가 불편하진 않을지, 훈련이 힘들지는 않을지.
카신은 그런 시답지도 않은 생각을 하는 자신을 어이없어하며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