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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3)화 (103/154)

103.

무투대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칸나와 시몬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을 누군가 콕콕 찌르는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도 있는 거구나. 매일이 행복하고 새로우면서도 아프기도 하다. 플로라는 복합적으로 밀려드는 감정을 하나하나 깨닫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단순하게 누군가 좋다, 싫다로 나눌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 또한 필요했다.

예전에 느꼈던 고독과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홀로 사색하는 시간이 퍽 마음에 들었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이제 습관처럼 자신을 돌보는 일에 힘썼다. 그것은 플로라가 지닌 마력을 다스리는 데도 훌륭한 역할을 했다. 금세 방법을 터득한 그녀는 마력을 모으는 것에도 거의 성공했다.

오늘은 임무도 없는 데다 단체 훈련도 늦은 밤에만 잡혀 있어서 하루 종일 침대에 걸터앉아 사색을 즐겼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한 평화를 깨트리는 노크 소리에 플로라는 눈을 떴다. 옅게 남아 있는 마력의 잔재들이 원형의 형태로 응집된 코어에 모이지 못하고 다시 흩어졌다. 플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플로라 경!”

루가르의 모습이 보였다. 플로라도 선배, 하고 그녀를 부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잘 쉬었어요?”

“네. 선배는 지금 교대하신 건가요?”

“네. 방으로 가려다가 플로라 경은 잘 쉬고 있나 궁금해서 들렀어요.”

“아…… 잘 쉬고 있었어요.”

“하루 종일 뭐 했어요?”

“방에서 푹 쉬었어요. 늦잠도 자고, 생각도 좀 하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요.”

플로라의 대답에 루가르가 숨을 크게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 밖으로 외출은 안 하신 거예요?”

“네. 마땅히 갈 곳도 없고요.”

“광장은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예요. 구경하면 재미있을 텐데요!”

“……그러려나요.”

“그럼 다음에 같이 나가봐요!”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저녁 시간인데 밥은 꼭 챙겨 먹어요.”

“선배는요?”

“전 오늘따라 너무 피곤해서요. 한숨 자고 나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남은 시간 더 푹 쉬어요.”

루가르가 짧게 하품을 하고는 울상을 지었다. 뒤를 돌아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가려던 루가르가 잠시 멈칫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아, 참…… 원래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만. 플로라니까…….”

플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께서는 카신 경과 만나고 계세요. 함께 만찬을 하시려는 것 같더라고요.”

“……아.”

“오늘 근무도 없으니 궁금해하실까 봐요.”

플로라가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입술만 어버버 하고 떨자, 꺄르르 짧게 웃은 루가르는 이제 진짜 가겠다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

플로라가 카신을 만난 것은 저녁을 먹은 직후였다. 저녁을 먹고 산책 겸 잠시 밖을 돌아다니고 있을 무렵, 그 역시 만찬을 끝내고 황제의 성 밖을 나온 채였다. 플로라는 반가운 마음에 먼저 다가섰다. 갑자기 나타난 플로라의 모습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그 역시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플로라 경.”

“……아. 잠시 산책을 하려고요.”

“같이 해도 되겠나?”

“물론이죠.”

플로라의 대답에 카신이 그녀에게 보폭을 맞추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폐하를 알현하고 오시는 길인 모양이에요.”

“응. 무투대회가 곧 열려서 그 때문인지 오늘 하루 각 기사단 단장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 같더군.”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카신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말을 해보라는 뜻 같아서 플로라는 뜸을 들이다가 입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브니에 경은 차도가 좀…… 있습니까?”

폴이 얼마 만에 정신을 차렸는지 생각해 보면 이른 질문이긴 했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이브니에 경에게 가 볼까 하던 참이라, 카신을 만난 김에 그녀의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브니에 경과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걱정하는 것 같군.”

“경의 삶이 불쌍해서요. 마음이 쓰이네요. 이런 말을 하면 이브니에 경은 화를 내겠지만요.”

카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동감하는 바였다.

“지금 이브니에 경에게 잠시 들를까 하는데, 경도 함께 가보겠어? 듣는 것보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더 좋지 않겠나.”

“……그럴까요?”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카신의 옆을 따랐다.

“그런데요, 단장님.”

“응?”

“지난번에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지금 해 주실 수는 없는 얘긴가요? 함께 식사하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얘기예요?”

“……응. 말이 나온 김에 내일 오찬을 같이 하는 게 어떻겠나?”

“좋아요.”

플로라는 활짝 웃었다. 카신을 만날 일이 없어 그렇지, 플로라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카신이 어릴 적 자신을 잘 돌보아 주었던, 어린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다는 걸, 그리고 이런 말 하긴 우습지만 자신의 첫사랑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뭔가 더 가깝게만 느껴져서 늘 마음이 쓰였다. 단장과 부하 기사 같은 사이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카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함께 성밖에 나가보지 않겠어?”

“아……! 좋아요. 광장은 벌써 축제 분위기라던데요.”

“그렇다고 하더군. 나도 제대로 구경은 못 했어. 나가도 늦은 밤에만 나가서 전부 문을 닫았을 때였지.”

플로라와 카신이 이브니에가 머물고 있는 치유 성전에 들어섰을 땐, 아직 치유를 진행하고 있었다. 작게 난 창 너머로 보이는 사제들과 이든의 모습은 상당히 지쳐 있는 듯했다. 이든은 이브니에가 독하고 복잡한 사술에 당했다고 했다.

아이든과 라비우 같은 작자들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에 다시 한번 힘이 실렸다.

고요함 속에서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사이, 문이 열리고 사제들이 빠져나왔다. 치유가 끝난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갔을 땐 이든만이 이브니에의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을 긁었다. 아무리 강한 치유력을 가진 존재라고 하더라도, 최근에 많은 마력을 쏟아부었고 지금 역시 매일 무리하게 일을 하고 있기에 매일이 피로한 것 같았다.

뒤늦게 카신과 플로라를 발견한 이든이 반색했다.

플로라를 발견했을 때는 특히, 그동안 쌓였던 모든 피로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눈이 반짝였다.

“레이디.”

“이든.”

“이브니에 경을 보러 오셨나요?”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카신은 벌써 이브니에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플로라도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든이 말했다.

“지난번에도 겪었지만, 역시 독해. 어디서 이런 걸 만들어 낸 건지.”

설설 머리를 가로젓자 이든의 윤기 나는 보랏빛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해독제는 따로 만들 수 없는 걸까요?”

“안 그래도 제국에 약초나 연금술을 잘 다루는 이들이 있는지 수소문하고 있어요. 하지만 쉽지 않네요. 마법의 폐해죠. 마법 이외에 다른 것들은 열등하게 생각하는 인식 때문인지 그들은 음지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아요.”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서 제가 뭐라도 해보겠다고, 공부는 하고 있는데…… 워낙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쉽지 않네요.”

이든은 이미 업무량이 허용치를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공부까지 하려고 하다니.

플로라도 자신이 산속에서 지냈던 경험을 빌어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돕겠다고 나섰다. 희귀한 약초까지는 잘 몰라도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초들에 대해서는 나름 빠삭하게 외우고 있었다.

“레이디께서도 요새 바쁘실 텐데.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세요.”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이브니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것 같았다. 이브니에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카신에게 언뜻 들어 그녀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삶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기구하고 안타까운 삶이 분명했다.

자신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듯, 그녀에게도 다시 한번 새 삶을 살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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