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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2)화 (102/154)

102.

건국제에 초청한 이들이 제국을 방문하는 날이 벌써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시몬은 점점 더 바빠졌고, 플로라의 훈련 일정도 더욱 촘촘하게 짜였다. 그리고 곧 열릴 격투대회에 근위대는 자율로 참여하되 근무가 잡힌 사람들은 폐하를 호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중에서 플로라는 후방에서 시몬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각국의 인사들이 방문하는 시기에는 라비우도 올 테고, 그 시기에 맞물려 격투대회가 열리기에 그를 마주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플로라는 자신을 위한 시몬과 에르네의 배려라는 걸 알았기에 수긍했다.

플로라와 함께 원거리에 배치된 인원은 총 다섯 명이었다. 활을 주로 쓰는 사람은 플로라뿐이었기에 틈틈이 배치된 선배들과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플로라 경. 잠시.>

오늘도 어김없이 훈련을 하던 중, 에르네가 직접 플로라를 찾아왔다.

플로라는 하던 훈련을 멈추고 대장을 따라나섰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곳은 시몬이 있는 황제의 성이었다.

<요즘 훈련에 힘든 일은 없나?>

“……예. 없습니다.”

<원거리 배치에 불만도 없겠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잘 감시하겠습니다.”

<아마 다른 기사단도 각각 구역을 맡아 배치가 되겠지만…… 경은 특별히 폐하께 접근하는 사람을 잘 봐야 한다. 수상한 사람이 보인다면 바로 신호를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몬이 있는 방 앞이었다.

역시 폐하가 찾으셨던 모양이구나.

플로라는 설렘을 안고 성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날, 시몬과 함께 정원을 거닌 일 빼고는 함께 대화를 나눈다거나 오래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었다. 근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하신다는 말을 들어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그와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도 고민되었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동안 문이 열렸다.

플로라는 에르네가 전한 말을 듣고, 등 떠밀리듯 혼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몬은 편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서류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흐트러진 검은색 머리칼을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환히 웃었다.

“플로라. 왔어?”

그의 웃음에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가 다 풀리는 것만 같다. 이 엄청난 사람.

“부르셨습니까. 시몬.”

플로라는 머뭇거리다 용기 내어 시몬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가 요구하지 않아도, 그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다.

“보고 싶어서.”

“…….”

“이리 앉아. 플로라.”

쭈뼛거리다 그의 곁으로 가자, 가볍게 손목을 잡아끈 시몬이 제 옆에 플로라를 앉혔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다정한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성에 들어오면서부터 시몬을 만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는데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 모든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이 행복이 진짜였으면.

플로라도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

“건국제 때문에 많이 바쁘시다 들었습니다.”

“……응. 당장 며칠 후면 각국에서 초청받은 이들이 오니까.”

“광장은 축제 준비가 한창이라고 합니다.”

“가봤어?”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내일이면 나가 볼 수 있을 거예요.”

“응. 보고 어떤지 얘기해 줘.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럴게요.”

플로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시몬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얼른 건국제도 지나가고, 너와 편안하게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좋겠어.”

정말 시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달콤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반사적으로 자신의 볼을 다시 한번 꼬집으려던 플로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실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꿈이라고 해도 깨고 싶지 않으니까.

플로라 역시 조심스레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시몬의 입꼬리가 유연하게 말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

“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야? 전보다 더 마른 것 같아.”

“시몬이야 말로요. 요새 끼니도 잘 거르신다고 들었습니다. 잠도 제때 주무시지 않고요.”

“……에르네가 그랬지?”

플로라는 잠시 눈을 굴렸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에르네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요새 통 잠을 주무시지 못하신다. 원래도 제대로 주무신 적은 없으나, 최근에는 더하셔. 게다가 끼니까지 거르고 계시니……. 경이 잘 설득해 줘.>

“…….”

<경의 말이라면 들으실 테니.>

이미 시몬은 누가 얘기해 줬는지 눈치챈 낌새였지만, 플로라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저녁은 꼭 드셔야 해요. 거르지 마시고요.”

“……알았어. 그럴게.”

“오늘 저녁도 드실 거죠?”

“응. 오늘은 칸나와 식사 약속이 있으니…….”

칸나의 이름에 플로라가 잠시 숨을 멈췄다.

여전히 칸나 영애를 만나고 계신 것일까. 플로라는 섣불리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물을 수가 없었다. 함께 이리 지속적으로 식사를 하는 사이라면…… 역시…….

“플로라.”

플로라가 안 좋은 생각으로 점점 더 빠지려던 찰나, 시몬이 그녀를 불러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끔 했다. 플로라가 텅 빈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아니야.”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요.”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칸나 영애와는 왜 계속 만나는 걸까? 뭐, 그런 생각?”

“잘 아시네요.”

플로라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시몬이 잡았던 손을 놓고 플로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이리 솔직하게 말하니 얼마나 예뻐.”

“……그래서 대답은 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이 일 때문에 오늘 플로라를 부른 거야.”

“…….”

시몬은 플로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자였다. 그녀를 보지 못하는 동안 매일매일 생각했지만, 역시 실제로 보는 것만 못하다. 계속, 계속 자신의 눈에만 담아두고 싶었다.

이내 플로라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살짝 불그스름해진 그녀의 뺨도 귀여웠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칸나 영애와 친구일 뿐이야. 대외적으로 어떤 소문이 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칸나와 계속 만나는 것은 그녀와 내가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기 때문이고.”

“…….”

“미안하지만 이 일에 대해 네게 자세히 말은 해 주지 못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그녀가 오해하는 것이 싫었다.

앞으로 칸나와 함께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면 플로라는 분명 상처받을 것이었다.

“무투대회까지는…… 칸나와 함께 참여할 것 같아. 플로라.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플로라는 시몬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버림 받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모습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플로라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분간 다른 여자와 함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싫었다.

그럼에도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몬에게는 조금 솔직해져 보기로 했으니까 저, 솔직하게 말할게요.”

“……응.”

“사실 두 분의 모습을 보는 게 괜찮을 것 같진 않아요.”

“…….”

“그렇지만 시몬이 하는 일에는 이유가 있을 거니까…… 믿을래요.”

플로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사랑스럽다. 시몬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손을 만지는 것으로는 아주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자신을 믿겠다고 하는 말이. 그리고 조금 뾰로통한 표정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시몬은 자신의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 나아질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갈증이 일었다.

졸지에 그의 품에 안긴 플로라의 불편한 마음은 어느새 와르르 무너진 후였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시몬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고마워. 믿어 준다고 해 줘서.”

“나중에는 얘기해 주실 건가요?”

“응.”

나중에라도 솔직히 얘기해 주겠다면. 그거면 됐다. 플로라는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먼저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설명해 주고 오해하지 않게 하려는 태도부터 보기 좋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누군가 자신을 챙겨 주고, 좋아해 준다는 것이 너무 좋다. 같은 감정을 교류할 수 있음에 행복했다. 플로라는 못 이기는 척 시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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