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반박할 말도 없어 짧게 실소를 흘린 카신이 다른 질문을 건넸다.
“아카데미에서부터 네가 시몬에게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지금 뭔가 바뀌었을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해 봤어?”
“음…… 많이 했지. 수도 없이 해 봤지.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못 할 거야.”
“왜?”
“난 칸나와 시몬이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줄 때까지 줄곧, 걔넨 결국 이어질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
“시몬에게 당장 다른 정인이 생긴다고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말이야. 그래서 시몬이 플로라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이상하게 부럽다거나 희망 같은 게 생기지 않았어. 내가 그의 정인이 되었더라도 플로라와는 입장이 달랐을 테니까. 난 내 소중한 친구와 한 남자를 놓고 평생 경쟁해야 하는 거잖아.”
“칸나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라도 고백해보지 그랬어?”
“시몬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너도 아까 봤잖아. 둘이 엄청 애틋한 거. 내가 마음을 고백했다고 뭔가 달라지진 않았을 거야. 시몬은 내게 관심이 없어.”
“…….”
“근데 이걸 내 입으로 꼭 말해야겠어? 너, 참 잔인하다.”
“그냥 네가 오랜 시간 혼자 앓은 게 안타까워서 해 본 말이야. 이것저것 후회가 많을 것 같아서. 이제 그만 털어내.”
“너도. 눈빛이 엄청 진심인 것 같던데.”
“……네가 뭘 안다고.”
퉁명스러운 대꾸에 네이라가 비죽 웃으며 카신을 올려다봤다.
“참. 근데 그 사람은 깨어났어? 광장에서 습격당했다던 여기사 말이야. 이브니에 경이었던가? 이든이 그 일로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더라고.”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네이라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이브니에. 하필이면 주제를 틀어도 그쪽으로…….
갑자기 이브니에의 창백한 낯빛이 떠오르며 머리가 무거워졌다.
“고비는 넘겼다는데.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어.”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카신은 이브니에의 과거를 조사했다. 자신에게 했던 말이 사실인지 그조차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그녀가 했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거짓이었다면 지금 남은 얼룩진 감정들마저도 전부 잃었을 텐데 불행 중 다행인 일인 걸까.
“걱정되겠다. 네 부하였잖아.”
“…….”
“조용해질 만하면 사건 사고가 계속 터지는 느낌이야.”
“…….”
“이러다 한번 제대로 일이 터질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네이라는 잠시 울상을 지었다. 최근 계속 국경 지역에 세워 둔 마법 결계에서 이상한 신호가 감지되어 마법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카신도 대충 알 테고, 네이라 역시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대충 전달받았다.
센칸. 소피 님도 그렇고, 네이라도 그렇고 황제에게 은밀하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센칸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했다. 어떤 사람이기에 교묘하게 마법을 속이는 장치를 만들어내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저런 사람이라면 언젠가 일을 터트려도 제대로 크게 한 번 터트리겠다 싶어 매일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별일 없을 거야.”
“건국제 때는 더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
두 사람은 센칸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미 서로가 알고 있는 일이기에 말은 통하니 그나마 참 다행이었다.
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센칸을 초청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의 낯빛도 금세 어두워졌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의문의 남자. 그 남자도 함께 성으로 들어오려나.
“그러게.”
네이라는 목이 뻐근한지 고개를 돌리다가 어느 한 곳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있잖아. 카신.”
네이라가 여전히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카신의 팔을 툭툭 쳤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왜.”
“우리 좀 빨리 걸어야겠어.”
“왜?”
카신이 의아한 듯 묻자, 네이라가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냈다.
“저기서 칸나가 우릴 엄청 노려보고 있어. 나 아까도 지각했잖아. 약속도 안 지키는 무례한 인간이라며 바쁘면 늦어도 되는 거냐고, 누굴 백수 취급하는 거냐고, 욕 엄청 먹었단 말이야.”
“……난 네가 억지로 끌고 나갔다고 할 거야.”
“와.”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럼 먼저 실례.”
카신이 네이라의 걸음 속도를 맞춰주던 것을 멈추고 본래의 속도대로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야!”
곧 뒤에서 네이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고 있겠지. 카신은 킥킥 웃으며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 * *
플로라와 가볍게 산책을 하고 돌아왔을 때, 만찬은 거의 끝나 있었다.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칸나였다.
“표정이 많이 좋아졌어. 마음에 품었던 사람과는 잘된 모양이지?”
시몬은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됐어.”
“그거 계약 위반 아닌가?”
“네 얘기는 하지 않았어.”
“당연히 그래야지. 조금만 참아. 금방 떠날 거니까.”
“일주일 후면 떠날 거라고 했던가?”
시몬의 무미건조한 질문에 칸나는 여린 새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내리깔았다.
“응. 그쯤이면 이제…… 초청받은 각국 유명 인사들이 제국으로 몰려들겠지. 아버지는 정신없을 테고.”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하네칸에 머무는 동안 마음이 바뀌진 않았어?”
“응. 매일 날짜 세면서 기다리고 있는걸. 이 숨 막히는 곳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
“…….”
“아. 그렇다고 하네칸 제국을 욕하는 건 아냐. 우리 집이…… 갑갑할 뿐이지.”
칸나는 무얼 쥐고 있는 걸까.
일주일만 참으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궁금해서 입이 근질거렸다.
“오늘 자리 마련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가기 전에 친구들이랑 좋은 추억 하나 더 쌓았어.”
칸나는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일주일만. 나랑 더 열심히 만나줘. 요새 아버지가 참 많이 웃으시더라.”
그녀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황후의 자리를 꿰찼다면 다른 가문의 화목한 가족들처럼 살 수 있었을까. 칸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 * *
“플로라 님!”
훈련 장소로 향하던 플로라는 뒤에서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선배, 오셨어요?”
“플로라 님! 어제, 있잖아요!”
다다다 뛰어온 루가르가 숨도 돌리지 않은 채로 본론을 말했다. 뛰는 모양새가 어쩐지 위태로워 지켜보고 있던 플로라가 의아한 눈을 했다.
어제? 하고 의문을 가졌던 플로라의 뺨이 붉어졌다.
‘네가 좋다.’
오늘 하루만 수백 번은 족히 머릿속에서 내보내야 했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시몬과 손을 잡았던 감촉이 여전히 선연하게 살아있는 양,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억이 하루 종일 플로라를 괴롭혀서, 오늘은 일에도 통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는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펴 보이며 루가르를 보았다.
“네. 어제 왜요?”
“어제 플로라 님도 대장을 보셨죠? 폐하의 티가든에서 대장이랑 같이 있던 분, 플로라 님이죠?”
“아…… 네. 맞아요. 폐하께 전할 말이 있어 대장께 안내를 받았어요.”
혹시 루가르가 오해를 한 건가 싶어 급하게 대답하자 ‘아!’하고 탄성을 터트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플로라 님은 대장을 밝은 곳에서도 보셨겠네요! 차림새가 정말 근사하지 않았나요?”
“……에?”
“아니, 사실 그렇게 어두운 밤은 아니었는데 뭔가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한 기분이에요. 대장이 갑자기 와서 말을 거는 바람에 당황한 거 있죠.”
플로라는 이어지는 루가르의 말에 처음엔 당황스러워했다가, 결국 옅게 웃었다.
인사도 차치하고, 오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한다는 얘기가 결국 ‘대장이 너무 멋있었다!’라니.
혹시라도 대장과 그 저녁에 함께 티가든으로 돌아온 것을 오해하진 않을까 싶어 급하게 대답한 것이 무안할 정도였다.
역시 어제 대장에게 구박 들을 각오를 하고, 선배에게 가보라고 괴롭힌 보람이 있었다.
……이런 게 팔불출인가?
루가르는 이 호들갑을 떨고 싶어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에르네를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