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시몬의 손은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온몸의 핏줄이 팔딱거리는 것만 같다.
그는 자신의 손을 놓칠세라 꽉 쥐며 걸었다. 플로라도 조심히 그 곁을 따랐다. 숨을 쉬는 것도, 눈을 굴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그와 마주 닿은 손가락 끝에서도 맥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좋다. 밤 산책을 하거나, 온실을 구경할 때마다 네가 떠올랐어. 옆에 네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시몬과 손을 마주 잡고 하네칸의 정원을 걷고 있다.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발걸음을 뗄 때마다 시간이 멈추길 기도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던, 그 정원이 오늘따라 별빛이 더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장이 이렇게나 뛸 수 있는 거구나.
심장이란 걸 가진 사람인 줄 몰랐는데. 자신 역시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또 깨닫는다.
시몬이란 사람을 만나 이렇게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모임에는…… 가지 않으셔도 돼요?”
“네가 이렇게 손을 꽉 잡고 있는데, 어떻게 가?”
“아…….”
플로라가 눈을 깜빡이며 손을 놓으려 하자, 시몬이 다시 그 손을 꽉 쥐며 급하게 답했다.
“어어, 농담이야. 가지 않아도 돼.”
그러면서 하여간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다, 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모두들 바쁜 시간을 내서 모이신 건데…….”
누군가의 상황을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위해 본 적 없다. 그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가도, 혹시라도 자리를 비운 일로 난처해질까 걱정이 됐다.
“괜찮아. 나 없는 건 신경도 안 쓸 거야. 자리에 없다고 신랄하게 내 뒷담화를 하고 있을걸.”
시몬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러면서 안심하라는 듯 플로라를 보며 웃어주었다.
“그런 거 걱정할 필요 없어.”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계속해서 그녀를 보며 걸었다.
그에게도 이 시간이 소중하고, 벅차고, 떨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계속 눈에 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한때는 자신을 이성으로 봐 주지 않는 것 같아 매일 같이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녀의 감정은 언제 이렇게 변한 건지 궁금했다.
수줍어하고, 볼이 붉어지는 것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그런 모습들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뒤로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근데 우리 황제, 연애는 참 못하는 것 같지?”
“처음일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바로 시몬의 친한 친구이자 황제의 측근인 네이라와 카신이었다.
“네가 플로라에게 가보라고 등 떠밀지 않았다면, 시몬은 지금도 우리 사이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을 거야.”
카신의 말에 네이라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색에 미쳐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황제가 사실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숙맥이라니. 참 잘도 속여 왔네.”
“……근데 너, 괜찮은 거냐.”
카신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걱정 어린 눈으로 네이라를 봤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몬을 짝사랑해왔다. 기억하기론 아카데미 시절부터였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니네.”
네이라가 정곡에 찔린 듯 씁쓸히 웃었다. 카신 역시 이 상황에 마음이 쓴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동질감을 느꼈지만 위로 대신 핀잔을 던졌다.
“그러게 뭐 좋은 거라고 몰래 훔쳐봐? 왜 쿨한 척 나서서 등을 떠밀어. 이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그럼,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으니 다 같이 망해보자고 달려들어?”
“……거기까지는 너무 갔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야지.”
“네가 그렇다면 됐다. 이만 가자. 숨어서 이게 뭐야. 가끔 보면 아직도 애 같다니까.”
“맞아, 애. 난 왜 너희만 만나면 애가 되는 것 같지? 자꾸 철없는 짓만 하고 싶어. 그래도 재미있었잖아. 시몬이 숙맥이긴 하지만 그래도 로맨틱하다, 그치? 로맨스 연극을 바로 앞에서 직관한 기분이야.”
네이라는 시무룩했던 표정을 지워버리고, 금세 환히 웃으며 카신을 봤다.
“하나도 재미없는데.”
카신은 여전히 멀어지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의지와는 다른 일이었다. 억지로 떼었다가도 다시 그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런 카신을 물끄러미 보던 네이라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가 풀어냈다.
“……이제 보니 재미없다. 너, 괜히 데려온 것 같아.”
“가자고. 다리 아파.”
네이라는 싫다는 카신을 억지로 끌고 온 것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기된 듯한 얼굴을 보니 이제야 친구의 진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플로라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구나.
카신이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네이라에게 손을 뻗었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네이라가 환히 웃었다.
“카신. 근데 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동지가 생긴 것 같아.”
“…….”
“있지, 요즘엔 이런 걸 0고백 1차임이라고 부른대. 얼마 전에 마법 아카데미에 초청받아서 갔는데 애들이…….”
“안 오면 혼자 간다.”
카신은 일어날 생각은 않고 계속해서 놀리는 네이라에게 차갑게 대꾸하고 손을 거뒀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카신의 곁에 선 네이라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래도 상대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좀 안심되지 않아?”
“……응.”
카신은 마지못해 답했다.
마음은 불편해도 인정할 건 해야 했다.
시몬은 플로라의 뿌리를 알까. 리비에르가 당연히 말했겠지.
그녀와 말을 섞고 싶고, 오랜 시간 그리워하던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못 볼 걸 보게 된 것 같았다. 입 안이 씁쓸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을 이제야 만났는데, 그 사람이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에 들어선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이레나인 걸 몰랐을 때도 플로라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고, 또 괜히 말을 걸고 싶었고 계속 눈길이 닿았었는데. 정작 그녀 앞에만 서면 목울대가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 쓰림은 부족한 용기의 결과일 뿐이라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동안 플로라의 마음을 돌릴 시간과 제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데 아무것도 해놓지 않고 지금에서야 후회를 하나.
카신은 다행히 자신의 분수와 처지를 잘 아는 편이었고, 그래서 이 상황이 좀 쓰려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내일 할 일은 많지만, 오늘은 진탕 마시자. 그래야 해.”
한데, 자신은 그렇다 치고, 이 친구는 정말 괜찮은 걸까.
“술도 잘 못 마시는 게 말은.”
“오늘은 진탕 마실 거야! 드디어 첫사랑이 끝난 역사적인 날이라고.”
카신은 첫사랑이 끝났단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네이라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언제나 이리 밝았다. 곁에 두면 같이 있는 사람까지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어,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별 시답잖은 얘기를 쉴 새 없이 재잘거려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게 하니까. 그러나 자신이 어깨에 놓인 짐들의 무게 때문에 억지로 감정을 숨기는 법을 터득했던 것처럼, 네이라도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이라는 유명하지 않은 자작가의 외동딸로 태어나, 성적 하나로 아카데미에 겨우 입학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내던 친구지만 강한 마력이 발현된 후, 그녀는 가문의 짐뿐만 아니라 세간의 관심을 독차지해야 했다.
관심에는 칭찬과 애정만 뒤따른 건 아니었다. 음해나 비방을 목적으로 한 불순한 가십도 많이 퍼졌다.
그러니 말은 안 해도 그녀 역시 무언가 숨기는 것에는 능통하리라고 생각했다. 이 미소 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숨겨져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네이라가 아카데미 때부터 시몬을 줄곧 짝사랑해왔던 걸 아는 유일한 친구로서, 지금 그녀의 꽤 마음이 불편할 것을 알았다.
“……근데 넌 이런 걸 왜 나한텐 다 말해? 내가 그렇게 편하냐?”
누군가에 대해 많은 걸 안다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지금 제 마음도 쓰린 와중에 다른 사람을 더 걱정하고 있으니.
그건 분명 그동안 네이라가 자신에게만 보여 준 모습들 때문이리라. 아카데미에 다닐 적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네이라는 오로지 제게만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그 이유가 이제 와 궁금해졌다.
대답은 단순했다.
“이든은 입이 가볍고, 에르네는 입은 무거운데 공감 능력이 없고, 칸나는 너무 현실적이야. 넌 입이 그리 가볍지도 않고, 적당히 공감과 위로를 해줄 줄 알고, 현실적인 팩트 폭력을 날리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편해.”
단순한 것 같은데도 다 맞는 말이라 괜히 웃음이 났다.